[커버스타]
그 안에 우는 사막의 바람, <복수는 나의 것>의 송강호
2001-08-15
글 : 김혜리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JSA의 계절’은 참으로 길었다. 꼬리를 무는 인터뷰, 해외영화제 순례, 일본 개봉에 따라붙은 홍보에 이르기까지 송강호(34)는 1년을 꼬박 ‘공동경비구역’에서 살았다. 그 사이 송강호의 책상에는 서른편 남짓한- 멜로드라마도 두편 포함된(!)- 시나리오가 쌓였다. 그리고 <복수는 나의 것>이 그를 차지했다. <복수는 나의 것>은 나긋한 회유의 손길이 아니라 막무가내의 손아귀로 송강호를 잡아 끌었다. <…JSA> 밤샘 촬영을 끝낸 지난해 봄 어느 새벽 박찬욱 감독이 들려주는 스토리에 그냥 “어어, 그렇군” 했던 송강호는, 시나리오를 손에 잡던 순간 치밀어오른 생경함과 두려움의 포로가 됐다. 작품 선택의 동기를 묻는 좁은 질문에 송강호는 넓게 답했다. “내가 아는 어떤 한국영화와도 딴판이었다. 누가 더 세련되고 예쁘게 영화를 만드나, 누가 더 세련되고 예쁘게 연기하는가를 지상 과제로 다들 앞을 다툰다. 그러나 중요한 건 영화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 밑에 깔린 열망의 강도, 누가 어떤 이야기를 어떤 색깔로 하느냐의 문제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하드보일드 스타일’로 갈 길을 공표한 <복수는 나의 것>에서 송강호는 유괴당했던 딸을 시체로 되찾은 아버지로 분한다. 그 어린 딸은, 세상으로부터 무엇 하나 부당하게 빼앗은 적 없었건만 모든 것을 강탈당한 남자가 살아야 할 마지막 이유였다. 하지만 <복수는 나의 것>은 관객의 감정을 멋대로 고문하고도 남을 ‘흉기’를 품은 격정의 드라마 앞에서 금욕을 고집하는 영화다. 그래서 송강호는 말라야 한다. 깡마른 몸, 메마른 혼을 얻을 때까지. 스튜디오 문을 열고 들어서는 그의 몸피는 실제로 부쩍 여위어 있었다. <…JSA> 때보다 어림잡아 6.5kg이 빠졌다고 했다. “영화 후반으로 가면 여기서 5kg쯤 더 줄어들 겁니다. 머리와 수염도 길러서 극도로 초췌해질 거고요.” 박 감독은 송강호의 ‘동진’ 역을 설명하며 리 마빈, 크리스토퍼 워컨을 거명했지만, 본인은 과히 신경쓰지 않는 눈치. 어차피 앙상해질 대로 앙상해져 영혼의 허연 뼈마디를 드러낼 인물인데 외형이 대수롭겠냐는 소리다. 살 빠지면 짝짝이 눈이 더 기괴하게 나올 거라고, 안 그래도 괴상하게 생겼는데 보는 사람들이 ‘저거, 저거 사람이 아니구나!’ 할 것 같다고, 예의 트럼펫 삑사리 같은 웃음을 터뜨리기는 했다.

가벼이 울 수도 웃을 수도, 울릴 수도 웃길 수도 없는 지독한 연기를 앞두고 수심이 오죽할까 하는 참견은 송강호에게 철 지난 걱정에 불과했다. “어렵긴 뭘 어려워, 너무 쉬운 연기지. 가만있으면 되는데, 뭘.” 이번 연기 난해하다고 투정부리는 송강호에게 툭 던진 박찬욱 감독의 한마디가 그의 머릿속에 낀 안개를 걷어갔다. 듣고보니 몇달 전 박찬욱 감독이 “출제자가 기대한 답과 다른, 그러나 알고보면 더 정답인 답을 적는 학생”에 그를 빗댄 일이 기억났다. 서로에게 뜻밖의 정답을 턱턱 안겨주는 관계. 누구누구는 복도 많다. “원초적이면서 건조하게. 인위적인 컨트롤은 없을 겁니다. 내가 슬프면 그냥 울 거고요. 만약 관객을 울린다면 이미 알고 있는 슬픔의 상에 들어맞아서가 아니라, 저절로 눈물이 떨어지게 하고 싶습니다.” <…JSA> 이전까지 발목에 매달려 있던 특정 이미지의 족쇄도, 영화 스타일과 연기의 소통에 대한 염려도 그를 놓아준 지금, 송강호는 어느 때보다 공격적인 게임 운영과 민첩한 풋워크를 자신한다.

개인의 복수극이라기보다 고독하고 황폐한 사회를 보여줄 영화다, 뭔가 미흡하면 내가 연기를 못해서지 다른 이유가 아닐 게다, 정말 아주 오래 기억될 훌륭한 영화다, 그리고, 그리고 또… 그의 아홉 번째 영화를 이야기하는 내내 송강호는 짐짓 무거운 말을 늘어놓고 그 말의 중량 밑으로 스스로의 어깨를 들이밀고 싶어했다. 약속의 노예가 되기를 자청했다. <복수는 나의 것>을 생각하면 사막에 남자가 홀로 서 있는 그림이 머리를 채운다는 송강호. 그는 어느 말끝엔가 <복수는 나의 것>을 배우로서 날릴 ‘카운터 펀치’라고 불렀다. 8월13일, 송강호는 카운터 펀치를 날리러 사막의 링으로 간다. 뒤돌아보지 않고. 겨울 어디쯤에서 ‘동진’이 된 그가 우리의 어깨를 두드려 돌려세우는 날, 우리 앞에는 비극의 소금기와 피딱지가 말라붙은, 몹시 낯선 그래서 잊기 힘든 송강호의 얼굴이 있을 것이다.

감량도 해야 하니 촬영 들어가면 금주할 생각이다. 크랭크인 전에 충분히 마셔둬야 한다는 뜻이겠지? <…JSA>를 찍으면서 박찬욱 감독이 내심 술을 마시고 싶은데 말을 못 꺼낸다고 생각해서 감독님 심기를 헤아린다고 일부러 술자리를 주도하곤 했다. 그런데 얼마 전 박찬욱 감독님이 실은 그때 별반 마시고 싶지 않았는데 권하는 내 심기를 헤아려 마셨다고 하질 않는가! 충격이 컸다.

야구

원래는 축구보다 별로였다. 잘 맞으면 야수 정면에 날아가서 아웃되고 빗맞으면 도리어 안타가 되는 불공정함(?)이 싫어서.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좋아지더라. 플레이와 플레이 사이의 공기, 한방 맞고도 태연하려고 애쓰는 투수의 미묘한 표정 같은 드라마를 클로즈업으로 볼 수 있다는 점에 점점 마음을 빼앗기게 됐다.

합작영화

하라다 마사토 감독으로부터 한·일 합동 마약단속반 이야기를 그린 시나리오를 받은 적이 있었지만, 공감이 크지 않아 사양했다. 합작영화라도 감독이 한국인이라면 해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작은 이야기였으면 한다. 합작영화라면 공연히 덩치만 크기 쉬운데 작은 이야기를 밀도있게 그린다면 좋겠다. 일본의 송강호 팬클럽은 역할 분담도 잘돼 있고 내게 피해를 안 주려는 배려도 세심해 놀랐다. 11월에 한국을 방문해 “당신을 언제부터 왜 사랑하는지” 말해주겠다고 하더라.

<지젤>

<복수는 나의 것>을 생각하면 오버랩되는 연극. 기성의 교범을 무너뜨리는 파격적 작품이었고 나도 ‘힐라리온’이라는 강한 역을 연기했다. 어떻게 하면 관객을 감동시킬지 고민하던 시스템을 뒤집어 객석의 당혹감을 감수하고 창작하는 ‘우리’가 주체가 됐던 무대였다. 훈련과 습관을 깨는 일은 고됐지만, 깨지는 순간 환희를 느꼈고 결과물도 관객의 마음에 꽂혔다. <복수는 나의 것>은 <지젤>이 연극에 대해 내게 준 가르침을 영화에 대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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