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성지루(38)가 지금까지 연기했던 십여 편의 영화 속 등장인물에는 재미있는 공통점이 있다. <공공의 적>의 마약상이나 <바람난 가족>의 아이 살해범 등 그는 대체로 이 사회의 ‘가해자’에 속하는 연기들을 펼쳐왔지만 그의 연기에는 언제나 ‘피해자’의 측은함이 배어나온다. 영화 데뷔작인 <눈물>에서 그가 연기한 천하의 악질 단란주점 사장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고 자라 자신의 진심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의 처연함같은 게 있었다. 그가 첫 주연을 맡은 <손님의 왕이다>에서는 이런 이미지가 살짝 비틀린다. 3대째 이발사를 해오며 ”깍새가 아닌 예술가”로서의 자부심을 가진 안창진은 착한 소시민으로 협박범에 시달리는 ‘대놓고’ 피해자로 출발하지만 갈수록 강한 분노에 휩싸이고 흰 유니폼을 시뻘겋게 물들이는 잔인성까지 드러내게 된다.
“전에 연기했던 튀거나 뜬금없는 인물들에 비하면 안창진은 평범한 인물이죠. 그런데 바꿔 생각하면 제가 했던 다른 역할이나 영화 속 어떤 인물도 그냥 웃기거나 그냥 악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해요. 지금의 상황이나 성격에 이르게끔 한 삶의 이력서가 있어요. 연기는 그 캐릭터의 이력서를 완성하는 작업인 거죠.”
그가 설명하는 안창진의 이력서는 이렇다. 법 없이도 살 것 같은 이발사 안창진은 자신에게 과분하다고 생각하는 아름다운 아내를 둔 탓에 아내와의 문제를 정면으로 풀지 못하고 원조교제를 시도해 본다. 그러나 제대로 성공도 못한 이 원조교제는 그의 덜미를 잡고 ‘너의 더럽고 추악한 비밀을 알고 있다’는 협박범의 모호한 위협에 무릎을 꿇게 만든다. 협박이 악랄해질수록 안창진의 불안감은 극도로 심해지면서 그의 억압된 내면은 붕괴되기 시작한다.
“안창진은 내지르는 인물이 아니라 반응하는 인물이예요. 다른 연기자들이 제대로 놀 수 있게 터를 깔아주는 역할인 셈이죠. 그래서 끊임없이 이야기는 했지만 개인적인 아이디어같은 건 오히려 절제한 작품이기도 해요. 그런 점이 약간 아쉽기도 하죠.”
‘첫 주연’이라는 언론의 요란한 수사가 어색하다지만 얼마 전 병원에서 링거를 꼽아야 했을 만큼 개봉을 앞둔 물리적, 정신적 스트레스가 예전같지는 않다. “젊은 친구들처럼 ‘야, 내가 주인공이다’ 이렇게 설렐 나이는 지났지만 개봉 직후 협박범 역할을 하는 명계남 선배가 주인공 아니냐라는 반응을 들었을 때는 마음이 좀 뻑뻑했죠.(웃음) 주인공, 조연 구분하려는 생각은 없지만 신경이 쓰이는 건 사실이예요.” 브이아이피 시사회를 앞두고 있던 그는 동료 배우들에게서 연방 오는 전화를 확인하며 “혹시나 참석자가 적으면 이게 다 내 인간관계의 문제로 느껴질 것도 같고 말이죠. 하하”라며 긴장감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예의 편안한 웃음을 내비친다. 극단 목화 출신으로 연기경력이 이십년 가까워 오지만 그는 <손님은 왕이다>가 “배우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영화가 됐으면”기대한다고 말했다.
“투자자나, 감독, 그리고 저에게도 하나의 실험이 되는 작품인 것 같아요. 비단 저에게 뿐 아니라 이런 영화적 모험이 좀 더 늘어났으면 하는 바람에서라도 손익분기점을 넘겼으면 좋겠어요.” 수더분한 그의 얼굴만큼이나 소박한 바람이다. 신인 오기현 감독의 데뷔작인 <손님은 왕이다>는 각자의 비밀을 가진 네 명의 인물간에 오가는 어둡고 음침한 거래를 금속성의 차갑고 감각적인 화면에 녹였다. 갈수록 옥죄어오는 협박범(명계남)의 거미줄 속에 빨려드는 아내(성현아), 창진의 요구로 협박범의 뒤를 캐는 해결사(이선균)의 동상이몽 속 줄다리기의 끝에서 영화는 등장인물들의 가면을 벗기는 반전을 준비해놓고 있다. 23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