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박치기!> 제작하고 CQN명동 오픈한 씨네콰논 부사장 이애숙
2006-02-17
글 : 이성욱 (<팝툰> 편집장)
사진 : 이혜정

<박치기!>는 <키네마준보>와 <아사히신문>이 선정한 2005년 최고의 일본영화다. 원작자, 감독, 배우들 모두 일본인이니 이상할 것도 없다. 그렇지만 <박치기!>는 엄숙한 예술영화가 아니다. 당돌한 유머와 비극의 드라마가 시끌벅적하게 충돌하는 청춘성장영화다. 더욱 특이한 건, 1968년 교토의 시공간으로 당대 일본의 풍모를 담지만 그 속의 진짜 주인공이 재일동포와 분단에 다가서는 진지한 시선이란 점이다. 부산국제영화제가 한국영화 공로상을 안겨주기도 했던 이봉우 씨네콰논 사장이 제작자로서 입김을 넣었기 때문이었을까. 그랬다. 그의 여동생인 이애숙 씨네콰논 부사장의 표현대로 그건 “우리 얘기”였다. 김대중 납치사건을 다뤘던 <케이티>에서 김갑수란 재일동포의 비중을 높여놓았던 제작자로서의 ‘전력’이 새삼 떠오른다. 일본을 대표하는 고도(古都) 교토에서 청춘을 보내며, (북)조선 국적을 유지하면서 겪은 이 좌충우돌 에피소드가 한국영화와 일본영화 사이의 가장 중요한 다리가 돼버린 남매를 닮았다니 궁금증이 인다. 한데 이봉우 대표에 관해서라면 알려질 만큼 알려졌다. <서편제> <쉬리> <살인의 추억> 등 무수한 한국영화를 일본에 한발 앞서 소개해왔고, <달은 어디에 떠있는가> <아무도 모른다> 등 굵직한 영화를 제작했으며, 도쿄와 고베에 3개의 극장을 운영하고 있다는 공적 영역부터 체 게바라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카페 CHE를 시부야에 갖고 있다는 사사로운 것까지. 정작 씨네콰논 직영 멀티플렉스 ‘CQN명동’과 한국영화 투자를 책임지고 있는 이애숙 부사장에 대해서는 물음표투성이다. 녹음기를 그녀 앞에 꺼내놓은 건, <박치기!>로 일본 아카데미 신인상을 받은 사와지리 에리카의 경자가 매력적이어서만은 아니었다.

-씨네콰논과 어떻게 인연을 맺었나.
=16년 전 은행 다니다가 그만두고 쉬고 있을 때, 이 대표가 회사를 차리려고 하는데 사람이 없으니 와서 전화 좀 받으라고 하더라. 아는 분으로부터 빌렸다는 사무실에 가보니 테이블 2개, 서랍장 1개가 전부였고 직원은 나 혼자였다. 정말 전화 아르바이트만 하는 줄 알고 시작했는데 키에슬로프스키, 자크 베켈 등의 유럽영화를 배급하면서 웃지 못할 일이 많았다. 극장주가 ‘현상은 어디에 맡기냐’고 하기에 ‘편의점에 맡기면 되잖아요’ 했더니 그냥 전화를 끊더라. 프린트 현상을 그렇게 말하는 줄 알 턱이 없었고 그만큼 영화에 관해 아는 게 없었다. 스틸 사진 뽑고 광고 디자인도 직접 하면서 영화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영화 공부를 따로 하지는 않았나.
=현장에서 다 배웠다. 물론 책은 많이 봤다. 마케팅부터 비평서까지. 돌아가신 평론가 요도가와 나가하루의 자서전 같은 책을 몇권 갖고 있는데 거기에 담긴 영화 이야기는 눈물이 나올 정도로 감명 깊었다.

-이봉우 대표와의 역할 분담은.
=CQN명동의 운영을 포함해 한국에 관련된 일은 내가 전담한다. <서편제>를 시작으로 한국영화를 일본에 소개할 때부터 이 대표가 통역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배우나 감독을 섭외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 일을 도맡다보니 한국 영화인들과 자연스레 친해졌다.

-<박치기!>의 이야기가 “우리 남매 얘기”라고.
=우리 얘기 맞다. 영화는 68년이 배경이니까 시대적으로 약간 차이는 있지만 우리는 영화처럼 살았다. 리안성(다카오카 소스케)이란 주인공은 이봉우 사장이고 실제 에피소드가 거의 다 들어가 있다. 안성이 축구를 잘하고 또 선수로 뛰고 싶지만, 실제로 하는 건 일본 학생들과 싸우고 여자 꼬시는 건데 그런 식으로 살았다. 어쩔 수 없는 현실 때문에. (북한으로 가는) 귀국선이 자유롭게 왔다갔다하는 시대가 아니었다는 것 정도만 다르다.

-오빠가 싸움을 그렇게 잘했나.
=그렇다. 정말 픽션이 아니고 논픽션이다.

-그럼, 안성의 여동생 경자(사와지리 에리카)는 이 부사장 이야기인가.
=학생 시절에는 일본 남자와 그렇게 연애한 적이 없다. (웃음) 우리 둘 다 영화 속 공간인 교토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살았다.

-원작자가 일본인인데.
=코우스케(시오야 슌)란 캐릭터는 실제로 북한 노래 <임진강>을 듣고 좋아했던 원작자 이야기다. 영화에는 일본 청년 코우스케의 시선과 안성의 시선이 다 있지만 원작에는 코우스케의 시선만 있었다.

-이 대표의 실제 이야기가 많이 들어 있다니까 좀더 분명해지는데, 영화를 일종의 출구로 삼고 있고 제작에 그대로 반영하는 듯하다.
=개인적으로나 비즈니스적으로 선택할 때, 내가 보고 싶은 영화가 우선이고 관객의 얼굴이 보이는 영화가 좋다.

-관객의 얼굴이 보이는 영화란.
=이건 어떤 사람이 보겠다,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은 꼭 보겠다는 답이 나오는 영화. 감독이나 제작자의 대리만족으로 만드는 영화들도 있는데 관객의 시선으로 만들었다는 느낌이 드는 영화가 기본이다.

-<박치기!>를 보면서는 어떤 관객의 얼굴이 보였나.
=일단은 재일동포들이 봤으면 좋겠다. 사장님이나 나는 본명을 가지고 일을 할 수 있는데 아직까지 본명을 가지고 재일동포라고 밝히며 취직하거나 일할 수 있는 친구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 둘째는 재일동포를 모르는 이들. 출연한 일본 배우들조차 재일동포의 존재를 몰랐다.

-영화가 유쾌한데 CQN명동에서만 개봉하는 게 의외다.
=메이저 배급사가 손을 대야 하는데 일본영화는 잘 안 하려고 하더라. 아직까지 한국에서 잘되는 일본 작품은 애니메이션이나 호러물이다. 그도 아니면 유명배우가 나오거나 이와이 순지 감독의 작품이거나. 한국에 극장은 많지만 가서 볼 수 있는 영화는 서너 가지뿐인데 그 속에 일본영화를 넣기란 무척 어렵다. 다른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어서 이런 극장을 만든 거다.

-극장 운영과 관련한 포부는.
=한국에 아트시네마들이 많은데 거기에 완전한 멤버로 들어가고 싶다. 또 처음 목표했던 대로 일본영화를 오래 하고 싶다. 한국 관객이 일본영화 하면 CQN명동을 떠올리는 게 목표다. CQN강남, CQN부산 등으로 두세개 관이 더 생겼으면 좋겠고.

-시부야, 긴자의 미니 시어터 운영 경험이 여기선 어떻게 반영될까.
=일본에는 마니아층이 많으니까 그럴 수 있겠지만 영화를 계속 보는 게 아닌데도 하루 종일 극장에 있는 이들이 많다. 예컨대 일본에선 영화마다 700엔에서 1천엔 정도 하는 두꺼운 프로그램을 제작해서 파는 게 일반적인데 극장에서 그걸 과거 작품부터 최근 것까지 하루 종일 본다. 영화를 좋아하면 극장은 하루 동안 틀어박혀 있어도 지루하지 않은 공간인데, 그렇게 머무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 인터넷 검색으로도 뜨지 않는 영화 관련 내용들이 꽤 있는데 그런 걸 모아 영화도서관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일본과의 동시개봉 계획은 유효한가.
=판권 문제만 해결되면 언제든. 살짝 계획중인 건 씨네콰논이 제작하고 있는 이상일 감독의 신작 <훌라 걸>을 동시개봉 첫 작품으로 할까 싶다. 일본에서 8월에 개봉한다.

-한국영화의 투자 계획은.
=투자는 계속 하고 있다. <음란서생>에 부분투자하고 있고 그 밖의 몇 작품을 검토 중이다. 직접 제작은 몇년 뒤라면 모를까 아직은 모르겠다.

-투자 작품 선정은 직접 하나.
=내가 직접 정하고 본사 승인을 받는다. 예전에는 일본시장에 내보낼 걸 많이 의식했는데 지금은 작품성을 제일 중요한 요건으로 삼고 있다.

-일본시장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건 일본 배급권을 조건으로 투자하지 않는다는 건가.
=100% 포기한 건 아니지만 그런 양면을 가지고 가기 어려워졌다. 그런 조건을 걸고 했으나 일본에서 맞지 않는 영화의 사례가 너무 많았다. 무엇보다 일본에서 한국영화는 위기다.

-거품 얘긴가.
=완전히 거품이다. <쉬리>를 일본에 배급한 게 2000년이고 그때부터 2004년까지 몇편씩 한국영화를 소개하면서 대체로 ‘새롭다’, ‘이런 작품도 있구나’ 하는 반응이 많았다. 지금은 드라마가 많이 들어오면서 시선이 배우 위주로 바뀌었고 작품성으로 한국영화를 선택하지 않게 됐다. 예전에 한국영화를 좋아했던 이들이 외면하게 됐고, 이렇게 되니까 극장주들이 한국영화를 기피하는 경향이 생겼다. 지난해 50여편, 올해 60편 넘게 일본에서 개봉했고 개봉할 움직임인데, 지난해에 성공한 건 <내 머리 속의 지우개>와 <외출> 2편이다. 이러니 극장주가 한국영화를 안 하려고 할밖에.

-무엇이 달라져야 하나.
=어려운 문제다. 배우의 네임 밸류로 투자가 이뤄지고 그게 일본 판권 판매로 이어지는 흐름이 수정될 필요가 있다. 한류 아줌마들은 배급사보다 상황을 더 잘 안다. DVD 나오면 바로 돌리니까 극장 갈 필요가 없다. 일본에선 새로운 것이 끊임없이 나와주지 않으면 어렵다.

-처음에는 북한영화를 더 많이 봤고 일본에 소개도 했다고 들었다.
=조총련 학교에서 일년에 몇편씩 보여주곤 했다. 지금은 제작을 거의 안 하니까 보기 힘들지만. 98년에 북한영화들을 모아 영화제 형식으로 열었던 게 마지막이다.

-국적을 한국으로 바꿀 때 씁쓸하지 않았나.
=면접을 계속 받아야 했는데 그 과정에서 이게 잘하는 건지 좀 그랬다. 일본에선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으니까 조선이라는 국적을 갖고 있어도 여권도 없고 조선 사람이란 증거를 가지고 있는 게 없다. 그래서 한국 국적으로 바꾸고 여권을 받으니까 내가 뭔가 인정받았다는 느낌이 들더라.

-<박치기!>에 은각사 입구와 ‘철학의 길’처럼 교토의 면면이 슬쩍슬쩍 보이는데, 마음의 고향으로서 가장 사랑스러운 곳은.
=마지막 결투 장면에 나오는 강가. 교토 시내에 있는데 오빠랑 강가에서 고기 잡으며 놀았던 기억이 많다. 교토는 자부심 강한 고도이기 때문에 외부인에 대한 거부감이 크다. 그래서 영화 내용과 잘 어울리는 배경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추억이 남아 있다고 하니 웃기네. (웃음)

-저고리 해코지도 당했나.
=여러 번 있었다. 북한 문제 생길 때면 타깃이 늘 여고생이다. 하얀 적삼에 검은 치마를 입는데 칼로 찢거나 잉크를 뿌리거나 한다. 그것보다 더 슬프고 싫었던 건, 교토가 영화처럼 1년 내내 수학여행 오는 곳인데, 같이 사진찍자고 할 때다. 모르는 사람의 카메라에 들어가는 것도 싫은데, ‘옷이 너무 예쁘다. 그건 옛날 일본 옷이냐’고 묻는 거다. 너무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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