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1968의 청춘, 그 박제된 역사, <박치기!>
2006-03-01
글 : 남다은 (영화평론가)
과거의 흔적들에 기대기만 할 뿐 소통하지 못하는 영화 <박치기!>

1968년. 혁명. 전쟁. 히피. 자유. 전세계로 흩어지던 물결.

그리고 60년대 일본. 전공투. 저항하는 영화. 쇼치쿠 누벨바그. 오시마 나기사의 <교사형>(1968). <교사형>에 등장하는 재일동포 사형수의 죄, 국가의 죄.

<박치기!>의 배경은 1968년 일본이다. 영화는 그렇게 선언한다(영화가 제시하는 시대적 풍경들은 영화의 주요 이야기와 왠지 분리된 느낌을 준다. 마치 시대적 배경은 68이라는 마법에 걸려 언제나 이미(always already) 거기에 고정되어 있는 듯이. 마치 ‘이것은 68의 풍경들이다!’라는 선언처럼). 그해 밴드 옥스의 자유분방한 퍼포먼스는 여고생들을 실신시켰다. 학생들은 머리에 철모를 쓰고 쇠파이프를 들고 시위에 나섰다. 자유주의자들은 프리섹스를 외치며 히피가 됐다. 전자기타의 시대는 가고 통기타 포크의 시대가 도달했다. 그리고 박세영 작사, 고종한 작곡의 북조선 노래 <임진강>을 더 포크 크루세이더가 다시 불렀지만, 금지곡이 되었다. 이것이 영화가 기억해낸 1968년의 실제 사건이다. 그러나 이 풍경들은 누구나 알고 있는 68혁명의 클리셰, 이제는 빛바랜 기억이다. 영화는 위의 사건들을 멀찍이 떨어져 무심하게 나열하고 있다.

다만, 여기서 눈길이 가는 건, <임진강>, 일본 속의 북조선 노래, 일본 가수가 불러 금지곡이 된, 낯선 땅에서 거부된 어느 노래의 낯선 운명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새로운 건, 다시 말해 살아 있는 건 오직 <임진강>의 운명뿐이다. 68년의 <임진강>. 그런데 정말 1968년과 금지된 곡 <임진강> 사이에는 (그 곡이 68년에 금지곡으로 선정되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 필연이 존재하는가? 다시 말해, 영화 속, <임진강>으로 상징되는 재일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의 갈등이 1968년 일본의 역사와 어떠한 관계를 형성해 나가고 있는가? <박치기!>는 마쓰야마 다케시의 자전적 소설 <소년 M의 임진강>을 원작으로 하고 있지만, 나는 그 소설의 배경이 언제인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그러나 만일, ‘자전적’ 소설이란 말처럼, 이 영화가 1968년, 마쓰야마의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전개된 것이라고 해도 개의치 않을 작정이다. 내가 궁금한 것은 1968년의 풍경 속, 재일조선인의 실제 이야기 혹은 일본 역사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은 재일조선인의 역사가 아니라 영화 속에서 그 둘이 만나는 방식, 그 둘의 만남에서 생성되는 또 다른 역사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1968의 노래 <임진강>은 어떤 의미인가

이 영화에서 <임진강>은 재일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에 존재한다. 그것은 그 어디에서도 경계인으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의 운명을 반영하는 동시에, 재일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에 놓여진 강, 좁혀지지 않는 벽을 의미하면서도, 그 벽이 허물어질 가능성을 예견한다. 재일조선인 경자는 <임진강>을 부르고, 일본은 그 노래를 금지하지만, 경자에게 반한 일본인 코우스케는 그 노래를 배운다. 단순히 배우는 걸 넘어 노래를 통해 역사를 본다. 사랑이 <임진강>으로 이끌었는지 <임진강>이 사랑으로 이끌었는지, 음악으로 소통하여 갈등을 초월한다(는 이야기). 이 부분의 이야기는 때때로 감동적이지만, 구조가 거의 예상 가능한 멜로에 가깝다. 이상한 건, 다른 쪽 이야기, 영화가 경자의 오빠 안성과 조선인학교 친구들, 그리고 교토 히가시학교의 일본인들 사이의 대립을 펼쳐내는 양상이다. 영화는 상당 부분을 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싸움의 방식에 할애하고 있지만, 싸움의 동기를 인물들의 입을 통해서건 영화적 맥락을 통해서건 설명하려고 들지 않는다. 거기엔 다만 서로의 육체를 짓밟고 끊임없이 피를 보고야 마는 폭력의 순환만 있을 뿐이다. 폭력은 점점 과격해진다.

나는 여기서 폭력의 무의미함 혹은 폭력의 ‘폭력성’에 대해 쓰려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건 영화가 그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어디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는지에 대한 문제이다. 물론, 그 분노의 바탕에는 재일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의 해묵은 갈등이 있을 게 뻔하다. 그건 영화를 보지 않아도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나의 관심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그 역사적 이유에 기대지 않고 이들의 싸움, 반목을 ‘영화 속’에서 읽어낼 수 있을 것인가에 있다. 왜냐하면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영화적 이야기를 통해 궁극적으로 그 사실을 어떻게 재해석하고 있는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재일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의 갈등’이라는 역사와 영화 속 이야기들의 끊임없는 부딪침 혹은 상호작용, 그리하여 거기서 파생되는 또 다른 역사 혹은 이야기. 사실 혹은 역사라고 알려져 있는 무엇은 그대로 두고, 그것의 결과 혹은 그것의 효과만을 나열하는 것, 과거와 현재를 겹쳐서 읽어내지 못하는 것은 위험하고 진부하다.

새파란 청춘들이 끊임없이 싸움을 거는 이유

그러므로 다시 돌아와, 영화는 이 청춘들의 끈질긴 싸움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그다지 내키지는 않지만, 내가 찾은 두 가지 경우는 다음과 같다. 그들은 다만 청춘의 넘치는 혈기를 제어하지 못하여 싸움에 몰두한다는 것인가? 아니면 재일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의 반목, 재일조선인의 분노는 과거를 되돌릴 수 없는 한 언제나 이미 거기에 존재하는 무엇이라는 것인가? 만약 전자라면 그 분노는 그저 청춘이 지나가면 사라질 것이다. 이들의 분노는 한때의 치기어린 반항심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영화가 활화산같이 타올랐던 전공투와 68혁명의 흔적을 대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마치 싸움의 실패를 대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이상 상처받지 않기 위해 싸움의 목적도, 그 시절의 자신도 부정하고 잊어버리려는 것처럼. 마치 후진 성장영화가 소년 시절의 분노를 철없는 반항심으로 개인화하며 향수에 가득 차 회상하듯이. 그러나 그것은 성장이 아니라 타협이며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불길 앞에서 그저 두눈을 질끈 감아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성장영화는 과거와의 단절로 안정을 찾았을지언정 자기 부정의 불행을 내재한다. 이 영화에서도 청춘의 한 시절은 흘러가고 안성과 친구들은 더이상 분노하지 않는다.

만약 그들의 분노가 청춘의 혈기 때문이 아니라 후자의 경우라면 그들은 적어도 끝까지 싸웠어야 했다. 앞서 언급했듯 영화 외부에 이미 존재하는 이유에 의존하는 것에 대해 동의를 표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야만 했다면, 영화는 입을 다물고 말로 설명하려들지 말고 그들의 끈질긴 싸움으로, 그 싸움을 통해 말했어야 했다. 그런데 영화는 후반부에 이르러 재일조선인 학생의 매우 갑작스럽고 어이없는 죽음을 기점으로 재일조선인들의 분노를 조목조목 열거한다. 재일조선인 1세들은 자신들의 과거와 일본의 만행에 대해 그동안 참았던 울분을 터뜨린다. 그들 앞에서 일본인 코우스케는 죄인이 된다. 이 지점은 <박치기> 전체의 흐름에서 가장 튀면서도 가장 의도된 장면들처럼 보인다. 일본으로 끌려와 강제 노역 당하고 여전히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그들의 한탄은 짧고 빠른 영화적 흐름을 늘어뜨린다. 지나간 역사를 꺼내며 통곡하는 어른들의 슬픔이 고통스러운 건 사실이지만, 영화는 이 슬픔을 통해 청춘들의 분노와 폭력에 의미를 덧붙이고 그 분노의 정당성을 은밀하게 암시하고 있다. 영화 중반까지 길을 잃고 헤매던 청춘들의 분노는 뒤늦게 영화 외부에서, 실제 역사를 경유하여 그 이유를 찾게 되는 것이다. 청춘들의 분노는 영화 내적으로 사유되지 않는다.

역사를 모르는 로맨스가 역사를 구원한다?

결국, 위의 두 경우 중 그 무엇으로 보아도 결론은 동일하다. 화해의 메시지. 그것이 청춘들 자신과 화해하는 것이든 재일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의 화해를 암시하는 것이든 영화는 들끓었던 감정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재일조선인 청년이 마치 희생물처럼 죽고 금지곡 <임진강>은 전파를 타고 일본 전역에 흘러퍼진다. 안성은 일본인 여성과의 사이에서 새 생명을 얻었다. 코우스케와 경자는 사랑을 시작했다. 재일조선인과 일본인이 그 기나긴 싸움을 거두고 만나는 방법은 이뿐이다. 로맨스가 사람을 철들게 하고 로맨스가 분열을 극복하며 로맨스만이 평화를 구한다. 코우스케는 로맨스의 힘으로 재일조선인 마을과 일본인 마을 사이의 강을 건넌다. 갑자기 등장한, ‘역사를 모르는 로맨스가 역사를 구할 것이다’라는 설득. 보편적인 사랑과 휴머니즘이 세상을 구할 것이라는 말만큼 무서운 예언. 이러한 화해의 분위기에 맞춰 영화는 <임진강>을 북조선의 노래가 아니라 무국적의 노래, 사랑과 평화와 화합의 상징으로 확장시킨다. 그러나 무국적의 <임진강>, 일본 전역에 울려퍼진 <임진강>은 그 순간부터 더이상 <임진강>이 아니다. 그것은 <임진강>의 죽음, <임진강>의 상실이다. 그것은 다만 사랑의 세레나데이며 그 운명은 금지곡 <임진강>만큼이나 비극적이다. 1968년 일본에는 학생들의 시위와 히피와 프리섹스와 <임진강>이 있었을 것이다. <박치기>에도 학생들의 시위와 자유주의자들과 <임진강>과 재일조선인들의 삶이 있다. 그러나 영화는 1968년의 흔적들과 공존할 뿐 소통하지 못하고, 그 흔적들에 기댈 뿐 스스로의 역사를 찾아내지 못한다. 영화 속 68년의 영상과 그 시절 청춘 군상의 모습은 생생하나 이들이 만들어낸 역사는 생생하지 않다. 싸움은 있지만 싸움의 목적은 없고, 히피는 있지만 히피 정신은 없으며, 역사는 있지만 역사적 자의식은 없다. 그 안에서 성장하지 못하고 박제되어버린 관계들. 거기, 그 지점에 불구가 되어 멈추어 선 1968년. 그 청춘, 그리고 <임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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