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음란서생>의 출판업자 황가 역 오달수
2006-02-27
글 : 김현정 (객원기자)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수줍음을 많이 타는 오달수는 자주 얼굴이 빨개진다. 터울이 크게 지는 큰형과 누나 두명 아래에서 막내로 자란 그는 거칠고 난폭한 영화 속의 이미지를 떠올리기 힘든 사람이다. 동생들을 위해 칼국수를 끓이는 <마파도> 초반의 신 사장이나 다정하고 여성적인 <친절한 금자씨>의 제과점 사장 장씨가 현실의 오달수와 가장 잘 어울리는 모습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올드보이>의 사설감옥 주인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한 오달수는 사채업자나 무기밀매상, 도굴꾼 등을 주로 거쳐왔고, 찬찬히 들여다볼 새도 없이 금세 영화에서 사라지곤 했다. 다만 그 순간이 매우 강렬했기에 몇년 사이 수많은 이들이 그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음란서생>은 여러 가지 점에서 지금껏 보지 못했던 오달수를 발견할 수 있는 영화일 것이다. 이 영화에서 오달수가 연기한 음란소설 출판업자 황가는 의리있고 귀여우며 영화 내내 등장한다. 욕설과 주먹으로 저자를 주름잡는 깡패가 아닌 살짝 섞인 사투리 억양과 진지한 표정이 코믹한 서민. <음란서생>의 김대우 감독은 “말의 고저장단이 표정의 고저장단과 가장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배우 중 하나”라고 황가 역에 꼭 오달수를 쓰고 싶었던 이유를 설명했다. 전날 자신이 대표로 있는 극단 신기루만화경의 일년 계획을 의논하느라 새벽 다섯시까지 술을 마셨다는 오달수는 감독의 애정어린 칭찬을 듣고선 술기운이 가라앉지 않은 얼굴을 다시 한번 빨갛게 물들였다.

-<올드보이> <달콤한 인생> 등에서 잠깐 등장하지만 강한 인상을 남기는 인물을 연기했다. 그러나 <음란서생>의 황가는 주연에 가까울 정도로 비중이 크고, 이전보다 호흡을 길게 가져야 했을 듯하다.
=이렇게 길게 나온 적은 처음이어서 부담스러운 마음이 있었다. 관객이 식상해하지 않을까, 지겨워하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하지만 배역을 잘 만났다고 생각한다. 영화 처음부터 계속 나와도 기억에 안 남는 역이 있지 않나. 그런데 황가는 약간씩 튀어주면서 끝까지 나오는 역이었다. 깡패나 악역만 들어왔는데 살았구나 싶기도 했고. 지금까지 해온 치고 빠지는 연기도 매력이 있었지만, 이번에 새로운 매력을 느꼈다.

-사극에 처음 출연했다. 분장을 하면 어울릴지, 사투리가 섞인 억양으로 연기해도 괜찮을지, 걱정되지 않았나.
=맞는 상투만 있다면, 뭐. (웃음) 옛날 사람으로 분장해놓은 내 모습을 상상해보니 재미있고 괜찮을 것 같았다. 사투리는… 나는 사극을 보면서 왜 항상 대사가 비슷한 톤인지 궁금했다. 조선은 엄격한 유교사회였고 그 법칙을 적용하려다보니 그리 되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제도에서 조금은 벗어나 있는 상민이라면 편하게 생각하고 살지 않았을까? <음란서생> 리딩을 하는데 선생님이 쉬는 시간에 대사를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가르쳐주셨다. 사투리도 쓰지 말라고. 그래서 나름대로 사극 투를 만들어 다시 리딩에 들어갔더니 김대우 감독이 편하게 읽으라고 하더라. 내가 못하니까 그랬겠지. (웃음) 사투리는 내 말이다. 관객에게 나를 가장 진실하게 전달할 수 있는 말인데 어떡하겠나.

-전에 다른 지방 사투리는 다 할 수 있는데 표준어만 안 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사투리는 시를 낭송할 때처럼 리듬이 있고 음악적이다. 그 리듬만 파악하면 사투리를 할 수 있다. 연극 <남자충동>에선 전남 사투리도 쓰지 않았나. 그런데 서울 사투리를 들어봤더니 음악성이 없더라고. (웃음)

-김대우 감독은 “오달수가 출연을 결정했다는 소식을 듣고 영화 잘 만들어야지 생각했다”고 말했다. 연기하면서도 그런 애정을 느꼈나.
=내가 윤서(한석규)에게 “나으리는 저의 보물이라고 말씀드려도 될는지…”라고 말하는 대사가 있다. 언제더라… 촬영 끝나고 집에 들어갔는데 김대우 감독이 문자를 보냈다. 달수씨는 나의 보물이라고. (웃음) 그래서 더욱 열심히 뛰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애정과 믿음을 주는 사람에게 실망을 안기면 안 되니까.

-황가는 이해에 밝은 장사꾼이지만, 수줍고 귀여운 구석이 있고 윤서를 위해 희생하기도 한다. 그런 기복을 어떻게 하나의 인물로 소화했는지.
=사람이 이해타산을 따진다는 건 비인간적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윤서와 광헌(이범수)과 황가가 만나는 마지막 대목 덕분에 그가 인간적으로 보이지 않을까 했다. 그래서 한석규, 이범수에게 감동받으려고 노력했다. 교과서에 그런 게 나온다. 내가 연기가 잘 안 되면 상대 배우를 최대한 돋보이게 해라, 그러면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나온다.

-언제나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당신이 연기하는 인물들은 왠지 섬세해 보인다.
=인물을 설명하기 위해선 굵은 줄기가 있어야 하지만 그걸 강화하려면 디테일이 필요하다. 좀더 인간을 드러낼 수 있는, 많이 발견할수록 인물이 이해되는. 예를 들면 얼마 전에 찍었던 <구타유발자들>의 오근은 보청기를 끼고 다니는데 그날 하루만 집에 두고 온 거다. 그래서 말하는 사람쪽으로 귀를 갸웃하는 습관을 잊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그런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도 디테일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는 악역을 주로 해왔다. 현실에서는 만나기 힘든 캐릭터들이었는데 그런 인물은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가나.
=이것도 교과서에 나오는 건데 인물 설정표라는 게 있다. 사람은 어떤 직업을 거치면서 살아왔는지부터 어떤 색을 좋아하는지까지 채워넣어야 한다. 그렇게 비하인드 스토리를 끄집어내는 거다. <달콤한 인생>의 명구 같은 경우는 뒷배경이 필요없는 인물이었지만, 고생을 많이 하니까 악당이어도 왠지 불쌍하지 않나. 이 또한 교과서에 있는 말인데 악한의 전형성이라는 게 있다. 악하면 악할수록 연민을 불러일으키거나 웃겨야 한다고.

-도대체 그 교과서라는 것은.
=여기저기서 귀동냥으로 얻어들은 거. (웃음) 연극은 까마득한 옛날부터 내려오던 예술이어서 그 자체로 유전자라고 할 만한 무언가가 생겨난 것 같다. 공연 끝나고 합평을 하거나 선배들과 술 한잔하면서도 무엇이 나쁘고 좋았는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 들으면서 배웠다. 가끔은 그러다 술자리가 개판나기도 하지만, 그러면서 사는 거니까, 어제는 왜 술자리가 개판으로 끝났나 생각해보는 거지. (웃음)

-마음에 교과서를 가지고 있다면 선배가 들려주는 가르침을 열심히 기억했다는 뜻일 거다. 귀여움 받는 후배였을 것 같다.
=귀여움 많이 받았다. 이제 옛날 일이지만 공연을 하고 나면 술 좀 하는 선배들이 후배들을 모두 거둬먹일 수는 없지 않겠나. 집에 간다고 나선 선배가 전화를 하는 거다. 지금 어디 있는데 혼자 나오라고. 나란히 앉아 분장 지우다가, 달수야 주사 맞으러 가자(술마시러 가자), 그러기도 했고.

-연극만 하던 시절에도 지금 영화에서 맡는 것과 비슷한 역을 했었나. 악역이지만 코믹하다든지, 브로치처럼 사소해 보여도 스타일을 완성하는 역할이라든지.
=비슷했다. <405호 아줌마는 참 착하시다>라는 연극이 기억에 남는데, 배우들이 나를 싫어했거든. 그때 경비원 역을 했다. 두 시간짜리 연극이 한 시간 반쯤 지나면 등장해서 5분 동안 객석을 뒤집어놓고 퇴장했다가 커튼콜하는. 그 연극에 배우가 여섯명 나왔는데 그중 네명이 주인공이어서 한번도 퇴장을 안 했다. 그런데 관객이 모두 경비원만 기억하는 거다. 선배들에게 구박덩어리였지. (웃음) 극장에서 관객이 웃는 것과 객석 앞에서 대놓고 관객을 웃기는 건 많이 다르다. 그 카타르시스가… 행복하다. 관객이 나를 보고 즐거워하면, 참 기쁘다.

-그런데 연극을 자주 못해서 어떡하나. 극단 신기루만화경의 대표이기도 해서 많이 바쁠 텐데.
=일년에 한편이라도 꼭 할 거다. 극단을 만든 건 2000년이었는데 지금도 왜 만들었는지 이해를 못하겠다. 후회하지는 않지만. 그때는 목표가 하나였던 것 같다. 놀이터가 없는 마을에 놀이터를 하나 만들어 아이들과 같이 놀자. 그래서 빚을 내 연습실을 구했고 알음알음 다단계 판매처럼 단원이 한두명씩 늘어 지금은 서른다섯명이나 된다. 대표가 이렇게 골치아픈 건 줄은 몰랐다. 이해제 연출과 같이 만들었더니 내가 나이가 더 많아 대표를 한 거였으니까. 2002년에 한·일 합작 연극을 제작했는데 월드컵 기간이어서 한달 동안 유료관객이 열명도 안 됐다. 크게 망해서 연습실도 없어졌다. 대학로에 붉은 악마가 모여 사람이 꽉 찼는데 극장은 텅텅 빈 거다. 너무 화가 나서 경기가 있던 날 하얀 추리닝 입고 나갔다. (웃음) 영화를 하면서 빚은 다 갚았고, 올해 서너편 정도 연극을 무대에 올릴 수 있을 듯하다.

-어떻게 연극을 시작하게 됐는지에 관해 두 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하나는 연희단 거리패가 공연하는 부산 가마골 소극장에 포스터를 배달하다가 극단에 들어갔다. 다른 하나는 시를 쓰던 아는 형이 극단으로 이끌었다. 어느 이야기가 맞는 건가.
=두 가지가 연결돼 있다. 인쇄소에는 교정보는 사람이 있다. 내가 아르바이트하던 인쇄소에서 교정을 보던 형은 참여시를 쓰던 사람이었는데 가마골 소극장에서 내는 팸플릿 편집장을 겸하고 있었다. 그 형 때문에 자주 배달을 갔던 거다. 몇번 가보았더니 연극하는 사람들 사는 모습이 너무 신기했다. 그래서 그냥 들러 화장실 청소도 해주고 나오는 길에 포스터 들고 와서 붙이기도 했다. 이상한 애가 계속 그러고 있으니까 너 이리 와보라고 하더라. 89년 4월이었나, 동숭아트센터 개관기념 공연에 진행요원으로 따라가게 됐다. 그때 처음으로 서울에 와본 거다. 그러다가 <오구>의 문상객 1번으로 처음 무대에 섰는데 공연보러 온 형이 너는 왜 그렇게 얼굴이 시뻘게져서 앉아 있느냐고 하더라.

-공연이 아니라 생활하는 모습을 보고 연극에 끌렸다는 게 신기하다.
=연극하는 사람들은 정말 이상하게 살더라. 찜통에다 김치넣고 밥해서 나눠먹으며 집단생활을 하고, 물질적인 혜택은 모두 포기하고. 그때 아, 맞아, 삶이라는 게 원래 남루하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나이에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삶이 남루하다면 사는 것도 의미가 있겠구나 싶었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은 쓸데없는 것이 많이 묻었다는 느낌이 든다. 나쁜 건 아니지만 살다보면 이렇게 때가 묻게 마련인가보다.

-이십년 가까이 연기를 해왔다. 경제적으로 힘든 시절도 있었겠지만, 스스로 재능의 한계에 부딪혀 힘든 적은 없었나.
=나 자신을 과신하지 않는 편이다. 만약 한계에 이른다면 그만두는 게 맞다. 그러지 못하고 계속하면 그만큼 지저분한 일이 없다. 가끔 그런 상황이 닥치긴 하지만 지금까진 뛰어넘을 수 있는 한계였으니까. 성장하는 단계가 몇번 있는데, 한번 탁 부딪치고 그걸 뛰어넘으면, 성장을 하는 거다. 마치 나이 먹듯이 연극 나이를 먹는다고 할까. 아, 이 말 좋네, 연극 나이. (웃음) 나는 황소걸음이다. 대본도 제일 늦게 외우고 인물도 연기하기 3, 4일 전에야 찾아올 때가 있다. 그래서 리딩을 하면 다들 굉장히 불만족스러워한다.

-그런 스타일이라면 오디션 볼 때 불리했겠다.
=직접 발로 찾아가 오디션을 본 적이 몇번 있는데, 맞다, 전부 안 됐네. (웃음) 곽경택 감독과는 인연이 닿지 않았는지 <친구> <똥개> 모두 떨어졌다. <마지막 늑대>의 구자홍 감독이 <해적, 디스코왕 되다>에 출연한 나를 보고 박찬욱 감독에게 이상하게 생긴 배우 있다며 추천했다. <여섯개의 시선> 조감독이었거든. 박찬욱 감독이 대본 한번 읽어보라기에 앉아서 읽었는데 신기하게 캐스팅이 됐고 영화를 시작하게 됐다. 신뢰가 쌓여서 다음 영화인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도 출연할 것 같다.

-2005년 <달콤한 인생> <주먹이 운다> <친절한 금자씨>에 출연해 뉴스에까지 나왔다. 그런 유명세를 겪으며 자신이 변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지는 않았나.
=그때 사람들이 전화해서, 너 대마초 했냐? 왜 뉴스에 나왔어? 라고들 하더라. (웃음) 사람은 모두 변하게 마련이다. 다만 어리석지는 말자고 스스로 생각해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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