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이준익 감독과 ‘그의 페르소나’ 정진영, 진화하는 두 남자의 특별한 관계
2006-03-02
정리 : 김은형 (한겨레 esc 팀장)
정리 : 전정윤 (한겨레 기자)
비주류, 왕이 되다

이번 주말 한국 영화의 최강자가 바뀐다. 지난달 21일 <실미도>의 관객 1108만명을 넘어서며 역대 흥행 2위로 올라선 <왕의 남자>가 주말에 <태극기의 휘날리며>(1174만명)를 누르고 1위로 올라선다.

이준기라는 초대형 아이돌 스타를 탄생시키고, 감우성이라는 ‘모던 보이’에게서 광대의 서글픈 고함소리를 찾아냈지만 <왕의 남자>는 이준익(47) 감독(씨네월드 대표)과 배우 정진영(42)의 콤비 플레이로 완성된 작품이다. <달마야 놀자>(2001) 때 제작자와 배우로 만난 처음 두 사람은 <황산벌>(2003년)에서 감독과 배우로 의기투합했다. <달마야 서울가자>(2004년)에서 다시 제작자와 배우로 만난 둘은 마침내 <왕의 남자>에서 감독과 주연으로 짝을 맺어 한국 영화 흥행의 최정상에 오른다.

이준익 감독은 정진영이 자신의 페르소나라고 자주 말해왔다. ‘가면’이라는 어원을 가진 페르소나는 감독의 영화세계를 대변하는 특정한 배우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는 페데리코 펠리니의 페르소나였고, 로버트 드니로는 오랫동안 마틴 스콜시즈의 페르소나로 스크린을 채웠다.

지금까지 4편을 함께 만들었던 이준익과 정진영은 각자 한 편씩 외도를 한 뒤 다시 만날 계획까지 세워놓고 있다. 이 감독은 박중훈, 안성기 주연의 <라디오 스타> 연출을, 정진영은 씨네월드의 한 식구였다가 독립한 타이거픽처스 조철연 대표가 제작하는 <번트>(가제)의 주연으로 출연할 예정이다. 이들 영화가 끝나면 둘은 연암 박지원의 생애와 그 시대를 다룬 <열하일기>(가제)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

지난 25일 늦은 오후 씨네월드 사무실에서 페르소나라고 하기엔 참 다르게 생긴 두 남자를 만나 첫만남부터 관객 1천만 영화의 주인공이 되기까지 사연과 속내를 들었다.

#첫만남

이준익=<달마야 놀자> 캐스팅하면서 처음 만났지. <달마야 놀자> 때 청명스님 역할로 대다수가 정진영을 추천했어요. 특히 박신양씨가 <약속> 때 같이 해보고 좋았던 거야. 근데 시나리오가 후져서 안 한다고 연락왔어(웃음). 그래서 만나서 얘기하자. 분당에 찾아갔지.

정진영=후지다고는 안 했어요. 솔직히 <달마야 놀자>는 오해를 했지. 하다하다 스님까지 팔아먹어서 장사하는구나. 이 팀의 진정성을 몰랐으니까. 집 앞까지 오신다니 커피 한잔 하면서 거절하려고 만났지. 첫인상부터 신기했던 게 빨간색 소나타를 타고 오대. 보통 영화사 대표에 대해 가지는 이미지가 아니잖아요.

이=<간첩 리철진>에서 소품으로 쓴 거. 70만원짜리 중고차.

정=이 사람이 얘기하는 게 더 신기해. 아나키스트, 좌파, 신채호, <간첩 리철진> <선택>까지 두서없이 얘기하는데 믿어지더라고. 천재같기도 하고. 스님 팔아서 장사하려는 건 아닌 것 같단 생각이 든 거지.

이=암튼 당신이 시나리오를 대충 본 거 같다. 다시 봐라 하고 돌아왔는데 나중에 사무실로 찾아왔어요. 한다 안한다 말도 없이 바둑을 두자고 하더라구. 한판 두더니 시나리오 다시 보니까 좋더라 말을 꺼내는 거야. 그때부터 네 작품을 같이 하게 된 거지.

이준익 - 정진영에게 페르소나라는 단어를 쓴 건 내 오만의 극치야. 그럼에도 나와 정진영이 교감을 통해 어떤 선에 닿는 게 증명돼 가는 것 같아 즐거워

#<달마야 놀자>와 <황산벌>

정=<달마야 놀자> 때였는데 우연히 이 대표가 촬영장 흡연구역에서 연출부 어린 여자친구와 이야기하는 걸 보게 됐어요. 영화의 엔딩에 대한 이야기를 한시간 넘어 이야기하더니 그 친구가 “사장님도 상업주의에 물든 속물이시군요” 하면서 가버리는거야. 영화사 대표가 연출부 막내랑 오랫동안 얘기하는 경우가 별로 없잖아요. 담배 피우면서 멀찍이서 보다가 “무슨 이야기를 이렇게 오래 했어요?” 그랬더니, “내가 해줄게 없잖아. 애들 돈도 많이 못 받고 열정 하나로 일 하는데, 얘기라도 잘 들어줘야지” 그러더라구.

이= 내 고단수에 말린 거야(웃음). 나는 이 친구가 멋진 인간이다 싶었던 게, 주연급 배우들은 숙소도 좋은 호텔 요구하잖아. 주연배우의 컨디션이 영화에 미치는 영향이 크니까 당연한 거고. 제작자 입장에서도 그래서 특별히 관리를 해야 하고. 그런데 자기는 절에서 혼자 자겠대. 처사들처럼, 승복 입고, 배우인지 스님인지…. 배우로서 특별한 요구를 하지 않는 거야 개인의 스타일이니까 그렇다치지만, 같이 일하는 팀에 좋은 기운을 전파했다는 거지. 드러내지 않고, 은은하게 드러나는 식물성 카리스마를 보여줬지.

정=별 다른 이유는 아니었고요, <킬러들의 수다> 끝나고 열흘만에 크랭크인 들어가니까 대책이 없더라구. 불경 연습 하려면 거기가 낫고, 분위기도 금새 적응할 수 있으니까 그런 거지.

이=배우로서 인기? 그것 나쁘지 않아. 돈? 다다익선이지. 그런데 정진영은 그런 것보다 영화를 찍는 시간을 굉장히 탐내는 것 같아. 그 시간에 어우러져 있는 사람들의 면면에 대해 관심이 많고 집단에서 소외된 존재들, 어려운 친구, 상심한 친구들의 결핍감을 채워주려고 애써요. 그러니까 같이 일하는 스태프들이 정진영이라는 배우이기 이전의 인간에 대해 존경심까지 갖고 있는, 그런 아주 못된 인간이란 말이지(웃음).

정=돌이켜 생각해보니까 <달마야 놀자> 찍을 때가 행복했던 것 같아. 청명이라는 스님이 갖고 있는 마음을 내가 가져야 하니까, 마음이 무지하게 편했던 거야. <왕의 남자> 끝나고는 정신적으로 후유증이 컸어. 연산 자체가 그런 사람이라 나도 그랬던 것 같아. 끝나고, 먹은 걸 다 토하는 수준으로 치유를 하고 돌아왔지.

이=<황산벌> 때 나는 감독으로 함량미달이었지. 감독의 ‘ㄱ’자도 모를 때 <키드 캅>으로 데뷔하고 또 10년 지나 다시 현장에 갔는데 연기를 디렉션한다는 게 거짓말이지. 배우들한테 오히려 물으면서 의존했어요. 정진영이 나한테 연기 연출을 지도해준 거지. 박중훈한테도 지도받고. 20년 주연한 배우한테 초짜 감독이 배우는 게 당연하지.

정=괜히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황산벌>은 연기 의존도가 높은 영화도 아니고. 첫 작품이라고 생각하니까 위태위태한 거였겠지. 뒤로 갈수록 가속도가 붙어서 잘 하셨지. 하지만 <왕의 남자>와는 비교가 안되지.

정진영 - 우리는 대단히 성격이 다르지만 비슷한 게 있어. 우리는 주류가 아니고 주류가 될 생각도 없고 그런데 주류들이 무시하지 못하는 걸 가졌지

#<왕의 남자>

정=<왕의 남자>는 <황산벌>과 다르게 준비기간이 길었잖아요. 그 사이 이 양반이 엄청나게, 진화도 아니고 번데기가 고치를 벗는달까. 아예 다른 종이 된 듯한 느낌이었어. 감독으로서도 그렇고, 세계관도 그렇고.

이=전엔 집단 속에서 나의 운동 에너지가 컸어. <왕의 남자>로 오면서는 집단으로부터 이탈되는 개인으로 내 안의 에너지가 느껴져. 집단 안에 있으면 정진영 안테나에 걸리지. 배우 정진영의 에너지를 보자면 <황산벌> 때는 이성과 감성 중에 이성적인 면, 물리적인 면이 더 강했지. 이성이나 논리를 좋아하는 먹물(서울대 졸업한 정진영을 가리키는 표현)들이 화학(감성)을 천시하는 경향이 있잖아. 그런데 <왕의 남자>를 기점으로 쇼트트랙 역전하듯이 화학이 물리를 따라잡았어.

정=연산은 내가 안하던 방식으로 연기했어요. 그 전에는 주변을 보면서 내가 맞춰갔거든. 수비수나 미드필더 역할이었지. 근데 연산은 공격을 해야 하는 거야. 맞는지 틀리는지도 모르겠으니 감독이 맞다 하면 안심하는 거고. 나는 ‘알고 한다’주의자인데, <왕의 남자>는 전혀 모르고 했지.

이=알면 물리에 갇히는 거야. 연산의 연기는 화학이지 물리가 아니거든. 캐릭터 중심의 영화가 화학 지향적이라면 <왕의 남자>는 물리, 즉 플롯 중심의 영화야. 배우가 맘대로 해도 물리는 변하지 않기 때문에 현장에서는 화학으로 승부보는 거지.

정=내가 영화를 많이 보는 편인데 <왕의 남자>는 두번 밖에 안봤어요. 시사회 때랑 동네에서 한번. 보는 게 겁나. 다른 영화는 답을 가지고 연기했으니까 영화 보면서 맞았는지 틀렸는지 짚어보는데 이 영화는 그게 아냐. 그러니 보는 게 힘들더라고. 보고 나서 잊고 싶고. 그런데 모르고 찍었던 게 더 좋았어.

이=알면 관객한테 들켜. 나도 모르겠는데 뭐.

#페르소나

이=모든 배우는 근본적으로 감독의 페르소나라고 봐요. 작가 대 배우로 지속성을 가지고 감독의 세계관을 대변해주는 피사체, 그것이 페르소나잖아. 정진영에게 페르소나라는 단어를 쓴 건 사실 내 오만의 극치야. 내가 어떤 배우에게 페르소나라는 용어를 쓸 만큼 필모그래피가 길지 않잖아. 그럼에도 영감이랄까, 교감이랄까 그런 의미에서 부여한 가치지. 페르소나는 감독과 배우의 교감을 통해 어떤 선에 닿는 거잖아. 이제는 그게 증명되가는 것 같아서 즐거워.

정=호사가들의 수식어지. 페르소나라는 말. 페르소나든 뭐든, 작업 같이 하게 되면 하는 거고….

이=싫은가봐. 이준익의 정진영에 대한 일방적인 짝사랑이었다고 써줘(웃음).

정=아니야, 그런 수식어를 붙여주는 거는 굉장히 고맙지. 사실 우리 둘이 성격은 대단히 달라요. 근데 비슷한 게 있어. 뭐냐면, 우리는 주류가 아니야, 주류가 될 생각도 없어. 그런데 주류들이 쉽게 무시하지 못하는 걸 갖고 있는 비주류 같아. 새로운 거 하고 싶어하고, 안전한 길 가기 싫고, 어느 시점되면 확 넘어가고 싶고.

이=<왕의 남자>가 관객 1천만명 들고 주류가 된 거 아니냐 하는 사람도 있지만 솔직히 부담은 없어. 골대를 향해 공을 차면 주류를 향한 몸부림인데 난 그냥 앞에 있는 공을 냅다 찬 거야. 근데 그 볼이 들어간 거야. 상대편 몸 맞고 들어갔는데 갑자기 엠브이피 된 거야. 안 그래?

정=맨 처음에 책(시나리오) 준 거 읽어보고, 200만명 들면 잘 되겠네, 해외에서 좀 팔리겠네, 그럼 빚 좀 갚겠네 그랬지. 이거 아트네요, 그러니까 감독님이 아트하면 큰일 나, 빚 갚아야 돼 그랬잖아요(웃음). 관객 많이 드는 건 좋은 일인데, 이상하게 열광이 안 돼요. 딱 2번 보고 이 영화와 내가 무관해진 거 같아. 남의 영화 같애. 축하 인사 무지 많이 받지. 근데 전혀 흥분이 안돼. 개봉했을 때 영화의 퀄러티에 대해 스스로 안심이 돼서 그럴 수도 있는 것 같고.

이젠 내 수준에서 알 수 없는 천재

정진영이 말하는 이준익
처음 만났을 때 이야기를 듣다가 ‘아, 이 사람 천재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발이 좋지 않나. 아는 선배 중에 서울대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사법·행정·외무고시 세개를 합격한 이정우 변호사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생긴 것도 조금 그렇고. 워낙 달변이라 사기꾼처럼 보이기도 하고. 이 감독은 또 이것 저것 산만하게 말이나 일을 벌여놓을 땐 애 같기도 하다.

<황산벌> 때까지는 내가 이준익 감독을 잘 안다고 생각했다. 이 감독이 산만하게 펼치면 내가 정리를 좀 해주는 역할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내 수준에서 정리가 안되는 길로 가고 있더라. 내가 알던 이준익이 아니다. <왕의 남자> 연출 때부터였던 것같다. 이 영화에선 이 감독을 그냥 믿고 무조건 따라 갔다. 상황은 바뀌었지만 어디론가 막 가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다. 바라보기만 해도 기대된다.

<황산벌> 때부터 연기할 때 뭔가를 구체적으로 지시하거나 간섭하지 않았다. 물론 하긴 하지만 드러내놓고 하지 않는다. 나를 보일듯 말듯 새고 있는 구멍을 막는 데 은근히 끼워넣는다. <열하일기>에 대해서도 나에게 말한 적은 없지만 내가 무슨 역할을 맡을지 벌써 알겠다. 박지원이 될지, 박제가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누가 되든 빈 구멍에 나를 넣을 거다. 이 감독 영화에서 나는 그렇게 구멍을 메꾸는 전담반이 됐다. 그건 배우로서 재미있는 작업이다.

소의 눈으로 세상을 통째로 보는 배우

이준익이 말하는 정진영
소의 눈은 특정한 곳을 응시하는 게 아니라 세상을 통째로 본다. 그 눈이 나를 보는지 옆을 보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정진영의 눈이 영락 없는 소 눈이다. 관객은 배우의 눈을 본다. 그 눈은 속을 도통 알 수가 없어 관객을 집중시킨다. 그래서 배우의 내적 갈등과 관객의 호기심이 일치감을 이루며 영화적 긴장이 제대로 전달된다. 배우로의 눈으로 최고다.

지금도 그렇지만 <황산벌> 때는 내 생각이 어디로 튈지 내가 몰랐다. 아침, 점심, 저녁 말이 다 달라서 스태프들한테 ‘나는 한 입으로 두 말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할 지경이었으니까. 그러면 정진영이 늘 재확인을 했다. 감독님 그것은 이것과 같냐, 그거 아닌데, 그럼 저것이 더 맞지 않나요? 맞아! 이렇게 정리를 했다. 이 인간은 내가 무슨 생각하는 지 다 안다. 그러니까 설명하지 않아도 나에게 빈 구멍을 알아서 탁탁 막아주는 것이다.

<황산벌> 때는 정진영을 김유신으로 놓고 시나리오 썼고, <왕의 남자> 때도 너, 연산이야 말해놓고 시작했다. <열하일기>도 그를 박지원으로 정해놓고 시작할 거다. 의논 같은 건 안 한다. 해도 정색하고 이야기하는 경우는 없고 바둑 두거나 술 마시면서 그냥 같이 까불고 논다. 남들 같으면 진지한 이야기를 할 시점에 더 가볍게 노는 게 우리의 작업방식이다. 놀면서 일하면서 내가 꼭 붙들어맸으니 딴 걸 할 틈이 없다. 그러니 더 의논할 게 없어진다.

사진 이정아 /한겨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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