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100도 강추] 영화 ‘브로크백마운틴’
2006-03-02
글 :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미국판 ‘왕의 남자’ 베니스·골든글로브 이어 아카데미도 돌풍 예고

오는 5일(현지시각) 발표되는 2006년 아카데미상 시상식은 영화 역사에 새로운 기록을 남기게 될 가능성이 높다. 최우수 작품상 후보로 가장 유력하게 점쳐지는 <브로크백 마운틴>은 아시아인인 대만의 리안(52) 감독 작품이다. 오스카상 77년 역사에 최초로 아시아인 감독 작품이 그랑프리를 받는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최우수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등 오스카 8개 부문 후보로 올라있는 이 영화는 이미 아카데미의 전초전으로 불리는 골든글로브의 최우수작품상, 감독상 등 4개 상을 받았다. 영국 아카데미상도 4개 받았다.

이 영화처럼 비평과 흥행을 동시에 거머쥐는 경우는, 특히 최근 몇년 사이에는 매우 드물다. 1400만달러(약 140억원)라는, 할리우드 영화치고는 저예산에 해당하는 제작비를 들여 2월말까지 미국에서만 6650만달러를 벌어들였다. 대중성도 비중있게 고려하는 아카데미나 골든글로브와 달리, 작품성만 따져묻는 베니스영화제도 지난해 이 영화에 그랑프리인 황금사자상을 줬다. 그러다보니 이 영화를 둘러싸고 화제가 끊이지 않는다.

지난달 23일 에이피통신은 <왕의 남자>를 한국의 노무현 대통령은 봤는데 같은 동성애를 소재로 한 <브로크백…>을 부시 대통령은 아직도 안 봤다고 꼬집기도 했다.

두 카우보이, 그들도 우리처럼 사랑했을뿐

60년대 초반 미국 와이오밍주의 록키산맥. 여름을 맞아 20대 초반의 두 남자, 에니스(히쓰 레저)와 잭(제이크 질렌홀)이 먹고 자면서 양들을 키운다. 한철 벌이를 위해 이곳에 온 둘은 처음 만난 사이다. 사람 없는 그곳에서 두세달 넘게 같이 지내면서 친구가 된다. 어쩌다 한 텐트 안에서 자게 된 날, 둘은 몸을 섞는다. 다음날 에니스가 말한다. “난 게이가 아냐.” 잭이 답한다. “나도 마찬가지야.”

여기까지가 영화 도입부의 반쯤 되는데, 영화는 도입부 전체를 한걸음에 내달리면서 두 장면 안에 둘의 감정과 앞으로 영화가 갈 방향을 축약해 담는다. 그 한 장면. 잭은 게이가 아니라고 말해놓고는 바로 그날 밤, 텐트 안에 먼저 들어가 옷을 벗고 눕는다. 천진하게 들떠 있는 그 모습이 귀엽다. 객석에서 웃음소리가 나온다. 또 한 장면. 겨울이 다가와 둘은 일을 끝내고 헤어지게 된다. 과묵한 에니스는, 헤어짐의 아픔을 감추지 못하는 잭을 먼저 보내고 혼자 숨어서 벽을 치며 통곡한다.

행복한 한 철은 끝났다. 60년대 초반 미국 서부 깡촌에서 동성애라니. 이루지 못할 사랑이다. 이제 관심사는 둘이 사랑을 이루느냐 마느냐가 아니다. 그 꿈같은 기억을 접어둔 채 어떻게 삶을 버텨가느냐다. 옷 벗고 누운 잭의 표정에서 행복감을, 에니스의 통곡에서 비극성을 더 없이 경제적으로 전달한 뒤 영화는 외연을 확장해 나간다. 동성애는 동성간, 이성간 가릴 것 없이 금지된 사랑 일반으로 보편화되고, 둘에게 허용된 삶의 영역에는 가난과 노동, 남자가 되면서 마주쳐야 할 보편적 타락이 기다리고 있다.

<브로크백 마운틴>을 소개하는 데에 더 이상의 줄거리 전달은 불필요해 보인다. 영화는 각자 따로 결혼한 뒤, 수개월에 한번씩 만나다가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될 때까지 20년의 세월을 시간 순으로 따라간다. 거기에 등장하는 건 가난한 사람들의, 가부장 사회를 살아가는 남자들의 보편적인 모습이다. 보편적인 이야기를 보편적인 방식으로 해가면서 영화는 멜로물의 ‘심금 울림’에 더해, 보통의 상업영화는 물론 어지간한 작가영화에서도 기대하기 힘든 깊이감을 담아낸다.

노동에 지쳐 사는 사람들, 삶의 도약도 일탈도 꿈꾸지 않는 듯 침묵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브로크백 마운틴>은 그 침묵의 커튼을 걷고 안으로 들어가, 자기 존재를 확인하려는 그들의 힘겨운 노력을 중계하는 영화다. 어쩌면 사랑은,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은 자기 실존이 빛바래 가는 걸 막으려는 안간힘이 찾아낸 핑계일지도 모른다. 에니스는 잭을 붙잡지 못하면서 놓아버리지도 못한다. 그 때문에 에니스는 힘들어 하지만 그 고통이 없었다면 그는 힘겨운 노동, 무기력한 일상 속에 정말 자신을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는 금기시된 욕망을 이루기 위해 어떤 적극적 저항이나 도발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게 아니다.

잘 다듬어진 영화의 멜로 라인을 따라 슬퍼하고 이따금씩 위로받는 사이 사이로 영화는 침전물처럼 인생에 대한 단상들을 관객의 가슴 속에 떨어뜨린다. 두시간 조금 넘는 상영시간 동안 그게 쌓여 마침내 주인공이 겪은 20년 동안의 노동, 20년 동안의 그리움 만큼 무거워진다. 영화가 끝나고 그게 삶이라는 걸 새삼 받아들이기까지 쉽게 자리를 일어서기가 힘들다. 쓸쓸하면서도 매혹적인, 아니 쓸쓸하기 때문에 매혹적인 각성이자 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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