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현(42)을 보고 있노라면 굉장히 오랫동안 만나온 배우라는 착각에 빠진다. 그건 어쩌면 그가 아주 짧은 기간 동안 굉장히 많은 영화에 얼굴을 보여준 탓인지도 모른다. 2003년 <대한민국 헌법 제1조>로 영화에 데뷔한 뒤, <황산벌> <시실리 2km> 등으로 얼굴을 알렸고, TV시트콤 <올드 미스 다이어리>로 대중적 인기를 얻은 그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현재까지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작업의 정석> <왕의 남자> <음란서생>에 차례로 등장했고, <잘 살아보세> <도마뱀> <가족의 탄생>을 곧 선보일 예정이다. 비록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한 신부, 전당포 주인, 내관, 모사화가 등 비중이 적은 역할을 맡아 잠깐씩 스크린을 스쳐갔지만,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인상만큼은 머릿속에 진득하게 들러붙어 있다. 아마도 관객과 배우 사이의 거리감을 없앨 만큼 친숙함을 주는 그의 어리숙한 외모와 맛깔나는 연기 덕분이리라. 신학도에서 열혈 운동권으로, 또 술집 주인에서 연극 제작자로, 그리고 충무로에서 가장 잘나가는 조연배우로 급선회를 거듭해온 우현의 드라마틱한 삶을 들어본다.
-요즘 무척 바쁜 것 같다.
=그렇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지금 찍고 있는 <잘 살아보세>까지 따져보니 7편이다. 올 상반기에는 <올드 미스 다이어리> 영화판과 <구미호 가족>을 촬영할 예정이다. 대학 동기생 최종태 감독이 연출하는 <플라이, 대디, 플라이>에도 짧은 분량이지만 출연한다.
-특히 화제작인 <왕의 남자>와 <음란서생>에 동시에 출연한 유일한 배우다.
=두 영화에서 짧게 나왔을 뿐이지만, 훌륭한 작품에 참여했다는 사실에 마음이 뿌듯하다.
-아무리 짧은 분량이라 해도 당신이 등장하기만 하면 관객은 웃음을 터뜨리더라.
=<왕의 남자> 개봉 때 이준익 감독에게 축하 메시지를 보냈더니 전화를 주셨다. “야, 왜 너만 나오면 관객이 웃냐? 너 진지한 역할이잖아”라면서. (웃음) 사실 영화에서 웃기려 하거나 한 적이 없는데 이상하더라. 결국 연기를 좀더 억압했어야 하는 건데, 하는 생각이 들더라.
-<음란서생>의 모사화가 역할도 코믹하다.
=시나리오를 받았는데 눈을 떼지 못했다. 심지어 대본을 읽느라 다른 미팅 자리에 늦기까지 했다. 그런데 막상 내가 제의받은 모사화가 역할은 별로 하는 일이 없었다. 그때도 자잘한 다른 역할 제의받은 게 많기도 해서 영화사쪽에 ‘내가 하면 영화에 폐가 될 것 같다’는 뜻을 전했다. 그런데 김대우 감독이 만나자고 하더니 그 역할에 내가 꼭 필요하다고 하더라. 아무리 작은 역이라 해도 나를 필요로 한다면 열심히 해야지, 라는 생각에 수락했던 거다.
-아닌 게 아니라 대부분의 영화에서 코믹한 캐릭터를 맡고 있다.
=내 생각에도 특이하니까. 이 나이에 이상한 얼굴과 표정이 나오는 배우가 어디서 나타났는지, 이런 게 있지 않겠나. 현장에 가도 조금 오버하는 모습을 더 좋아한다. 요즘 드는 욕심은 오버 연기를 요구하는 경우는 좀 자제하자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음란서생>은 편안했다. 그렇게까지 요구하지는 않았으니까.
-요즘 들어 부쩍 많은 작품에 나오고 있다.
=사실 그게 두렵기도 하다. 짧은 시간 동안 여러 편에 나왔는데 ‘다 똑같잖아’라는 소리를 들을 것 같아서. <음란서생>에서도 걱정을 좀 했다. 그래서 나름대로 차별성을 두면서 자제하려고 했는데 어땠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시실리 2km>를 제외하면 비중이 적은 역할이다. 섭섭한 점은 없나.
=그동안은 시나리오가 막 들어오는데 거절을 못했다. 주위에서는 비중있는 역할을 하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나 스스로도 문제점을 느낀다. 눈에 띄는 배역을 맡지 못했다는 게 아니라, 금세 식상한 배우로 낙인찍힐까봐 걱정된다. 그래서 당분간 작품 수도 줄이고 비중있는 역할을 맡으려 노력 중이다. 최소한의 캐릭터를 보여줄 수 있는 영화를 하려 한다. 지금 촬영 중인 <잘 살아보세>에서는 꽤 비중있는 역할을 맡고 있고, <올드 미스 다이어리>와 <구미호 가족>에서도 마찬가지다.
-여러 편의 영화에 나왔지만, 그래도 대중적인 인지도를 쌓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건 TV시트콤 <올드 미스 다이어리> 같다.
=그렇다. 1년 동안 평일에 매일 방송했으니까.
-TV에 출연할 때는 부담도 됐을 것 같다.
=걱정이 많았다. 시트콤이다 보니 내가 갖고 있는 것이 모두 우스꽝스럽게 보여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다. 게다가 내가 연기를 바닥부터 오랫동안 한 것도 아니란 점이 우려스러웠다. 또 대선배 연기자분들과 함께 연기한다는 점도 부담이 됐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많은 것을 배웠다. 그리고 나름대로 나의 진지한 부분들이 많이 각인되어서 좋다. 결국 코미디영화가 아닌 쪽에서도 캐스팅 제안이 오더라.
-그래도 힘든 점이 있었을 것 같다.
=<시실리 2km>를 찍을 때만 해도 아무런 두려움이 없었다. 그런데 하기 시작한 지 6개월 정도 지나면서 갑자기 카메라에 대한 공포 같은 게 생겼다. 내가 NG를 별로 안 내는 편인데, 대사 하나 때문에 테이크를 예닐곱번씩 가기도 했다. 내공이 얕은 게 이런 데서 드러나는구나, 하고 걱정이 들어 여러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했는데 ‘어떤 시점에서 누구나 겪어야 할 과정’이라고들 말하더라. 지금은 차츰 나아지고 있다.
-어쨌건 <올드 미스 다이어리>는 지금의 당신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한 것 같다.
=사실 출연 제의를 세번인가 거절했다. 김석윤 감독님은 그게 지금도 가슴에 맺혀 있다고 이야기하는데, 그때 만일 감독님이 네 번째 제의를 안 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보면 좀 끔찍하다. 감독님은 내가 “방송에서 이 얼굴이 커버될까요”라며 빼면 “오이 마사지를 하는 설정으로 가면 된다”라고 했고, “사실 제가 지금 영화에 출연하는 걸 고민하고 있거든요”라고 하면 “영화 스케줄 다 빼준다”라고 말했다. (웃음) 그에겐 지금도 계속 고마워한다. <올드 미스 다이어리> 영화판뿐 아니라, 그가 만드는 다음 시트콤에 출연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아무래도 외모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얼마 전 한 방송사에서 전화가 왔다. 동안(童顔)인 연예인 신드롬, 그러니까 실제 나이에 비해 젊게 보이는 연예인들을 취재하는데, 그 반대 입장에서 얘기해달라는 제안이었다. 당연히 인터뷰는 안 했다. 자랑할 것도 아닌데. (웃음) 예전에는 작은 키와 비호감인 얼굴 때문에 콤플렉스가 있었다. 지금은 여기까지 오게 된 가장 큰 이유가 외모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 고마운 마음이 든다.
-<씨네21> 편집장 말이 대학 시절 당신이 어떤 집회에서 사회를 보고 있는 모습을 봤는데, 학생이 아닌 줄 알았다고 하더라.
=늙어 보인다는 얘기는 너무 많이 들어서…. (웃음) 대학 2학년 땐가, 만원버스에서 내리려고 하는데 뒤쪽에 있던 아가씨가 “꼬마야, 좀 비켜라”라고 하더라. 내 키가 작아서 그랬나보다. 그래서 싹 쳐다보니까 바로 “어머, 아저씨 미안해요”라고 하더라. (웃음) 또 대학 졸업 직후였나 편의점에 들어가 물건을 샀다. 그곳에선 물건을 구입하면 구매 연령층을 입력하고 있었는데, 점원은 한치의 의심도 없이 ‘50대 남성’이라고 쓰여진 버튼을 누르더라. 그래서 “아가씨, 저 50대 아니거든요”라고 하니까 “어머, 죄송해요” 하더니 ‘40대 남성’ 버튼을 딱 찍더라. (웃음) 정말 그런 일 많았다.
-그런 시선이 껄끄럽지는 않았나.
=내가 갖고 있는 게 지금 이것 아닌가. 그래도 다행인 것은 외모는 늙게 봐도 내면은 어리게 보는 모양이다. 지금 출연 중인 <잘 살아보세>에서 맡은 캐릭터는 나이는 많지만 정신장애로 아이들과 어울리는 역할이다. 애초 제작진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배우를 찾았는데 결국 내게 맡겼다. 사실 나는 장난치는 것이나 동심에서 비롯된 것을 좋아하는 편이다. 결국 어떤 집안의 둘째였던 그 캐릭터는 내가 캐스팅되면서 첫째로 바뀌었다. (웃음)
-과거로 돌아가보자.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했다.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다.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때 한 전도사님의 권유로 한신대 신학과에 들어갔다. 교회를 꾸준히 다녔고 신앙심도 있었기 때문에 목사가 되려는 생각이었다. 그러다 학생운동을 하던 친구의 시험을 대신 치러주다가 학교에서 잘렸다. 그래서 이듬해 연세대 신학과에 진학했다.
-여전히 목사가 되겠다는 생각이었나.
=그때는 좀 달랐다. 1학기만 다녔을 뿐이지만, 한신대에서 보고 배운 게 있었다. 1983년, 84년 당시엔 참여적인 신앙이 뭔가 고민을 하고 있었다.
-대학 시절에는 학생운동을 열심히 했다고 들었다.
=연세대에 들어가자마자 탈춤 동아리 ‘우리문화연구회’에 들어갔다. 그 이후론 죽 학생운동만 했다. 4학년 때인 87년에는 총학생회 사회부장을 맡아 연세대에서 벌어지는 거의 모든 집회의 사회를 봤다.
-영화배우 박철민도 당대에 유명한 운동권 사회자였다고 하던데, 알고 있었나.
=아직까지 직접 인사한 적은 없는데 그분이 ‘민주대머리’라는 별명으로 워낙 유명했으니까 알고 있었다. (웃음) 어차피 <구미호 가족>에서 만나게 된다.
-배우 안내상도 연세대 신학과 동기생이라고 들었다.
=과 동기일 뿐 아니라 탈춤 동아리 동기이기도 하다. 나는 공개적 활동을 했고, 내상이는 지하에서 투철하게 운동했다. 그리고 최종태 감독도 같은 과 동기였다. 우리 셋은 88년부터는 아예 같이 살다시피 했다.
-연극계로 가장 먼저 진출한 건 누군가.
=안내상이다. 그 친구는 졸업한 뒤 최형인 교수님이 하시던 공연예술아카데미에 들어가서 몇년을 공부했고 대학로 무대를 거쳐 스크린에까지 서서히 나오게 된 거다. 내상이는 요즘 술 먹으면 내게 그런다. “이 썩을 놈아, 나는 10몇년 고생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너는 얼굴 하나로 이렇게 빨리 올라오냐”라고. (웃음)
-그럼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무엇을 했나.
=문화운동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파업현장을 돌며 마당극을 공연하는 곳에 좀 있었다. 그러다 결국은 술집을 열게 됐다. 안내상이 먼저 인사동에서 작은 카페를 운영했는데, ‘그러면 나도 하자’ 해서 신촌에 ‘지리산’이란 술집을 열었다. 1년 반쯤 고생한 뒤 대박이 났다. 그걸 보고 안내상이 성균관대 앞에 ‘한잔의 청춘’을 냈고, 최종태는 홍익대 앞에 ‘16mm’라는 똑같은 컨셉의 술집을 냈고.
-당시 ‘지리산’은 꽤 유명한 술집이었다.
=초반에는 운동가요만 틀었다. 그러다 보니 운동권 카페로만 알려져서 영업이 안 됐다. 대중적으로 하자는 마음에 안주값을 1천원씩 받고 파는 식으로 바꾸니까 손님이 바글바글댔다. 문을 연 게 1990년인가, 91년인데 2004년에 결국 정리했다.
-연극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안내상이 연극계에서 활동하면서 대학로에 지인이 생기기 시작했다. 술집을 하면서 정치쪽 일도 좀 하곤 했다. 운동권 지인들의 선거운동 말이다. 그러다가 사람다운 모습이 그립곤 했는데, 연극하는 이들을 만나니 순수한 모습이 보기 좋았다. 한 연극 프로덕션에 들어가 술집에서 번 돈을 바탕으로 연극 제작자로 나섰다.
-연기까지 하게 된 동기는 뭔가.
=그전까지 연기자는 한번도 꿈꾼 일이 없었다. 그런데 대학로에서 일하다 보니 연기를 해보고 싶어졌다. 수천명, 수만명 앞에서 연설도 하고, 그들을 이끌고 행진도 해봤으니 스스로 잘할 거라 생각도 했던 것 같다. 내가 제작하고 학교 선배가 연출한 <라이어>란 연극이 있었는데, 거기서 게이 역할을 맡은 게 처음이자 유일한 무대연기 경험이다. 그런데 첫 리허설을 마치고선 거의 탈진했다. 정말 어렵더라. ‘내가 왜 이걸 한다고 했지?’라면서 후회도 했었다. 이문식은 아직도 당시 내 모습을 가지고 놀린다. 하여간 그렇게 시작해서 <라이어>를 1년 동안 공연했다.
-그 이후로 죽 연기를 한 건가.
= 아니다. 1년 동안 공연을 했지만, 연기는 아무나 함부로 할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라이어>를 제외하곤 연극도 흥행이 잘 안 됐다. 친구 사무실 일도 도와줬고, 선거운동도 했다. 그래도 대학로에 있으면서 결혼을 한 건 엄청난 성과라면 성과다(그의 부인은 배우인 조령씨다).
-영화 데뷔작인 <대한민국 헌법 제1조>에는 어떻게 출연하게 됐나.
=특별한 직업없이 그냥저냥 살다보니 가게도 기울고 모든 게 기울더라. 결혼한 지 3∼4년쯤 지났을 무렵인데 생활도 어려웠다. 그러던 중 최종태에게서 연락이 왔다. 자신이 프로듀서로 참여하고 안내상도 출연하는 영화가 있는데 내가 맡을 만한 역할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게 <대한민국 헌법 제1조>였다. ‘에이, 무슨 연기야’라면서 빼다가 결국 찾아갔는데, 송경식 감독님이 나를 딱 보자마자 “헛… 이 사람하고 계약해, 빨리!”라고 말했다. (웃음) 그렇게 그 영화에서 선관위 직원 역을 맡게 된 거다.
-그리곤 영화배우로 완전히 전업을 생각했던 건가.
=아니다. 배우로 산다는 생각은 미처 못했었다. 단지 첫 영화 작업이 그냥 재미있었다. 그러던 중에 안내상의 후배 몇명이 <황산벌> 오디션을 준비한다는 얘기를 듣고 함께하게 됐다. 애초 오디션을 본 배역은 전쟁터 속 병사 역할이었다. 오디션장에 가자마자 이준익 감독이 막 웃더라. 그는 내게 이것저것을 시켜보더니 바로 백제 중신 역할을 해보라고 했다. 그때 참 많은 것을 배웠던 것 같다. 그 뒤로 단편영화에도 출연하게 됐다. 처남(<어린이 바이엘 상권> 등을 만든 조운 감독)의 단편영화 몇편에도 출연했다. 배우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안내상에게 계속 개겼다. ‘야, 너 출연하는 영화 있으면 여기 싼 배우 있다고 얘기 좀 해줘’라면서. (웃음) 그러다가 <대한민국…>을 만든 한맥영화에서 <시실리 2km>를 제작한다는 사실을 알게 돼 오디션을 봤다. 애초 내가 원했던 건 마을 주민 역이었는데, 어찌어찌 오디션조차 보지 못하게 됐다. 그런데 나이 어린 배우가 맡기로 했던 임창정 패거리 막내 역할이 어찌어찌해서 내게로 오게 됐다. <왕의 남자>는 <황산벌> 때의 인연으로 이준익 감독이 다시 불려주셔서 출연하게 됐다.
-돌이켜보면 유독 안내상과 함께 출연한 작품이 많다.
=<대한민국…> <황산벌> <시실리 2km> <음란서생> 등에 함께 출연했는데, <황산벌> 때 오디션 도와준 것 외엔 내상이에게 업혀서 캐스팅된 경우는 없다. 그래도 우연히 자주 만난다. 심지어 KBS에서 <올드 미스 다이어리>를 할 때 내상이도 SBS에서 <혼자가 아니야>란 시트콤에 출연했다. 함께 출연해도 부딪치는 경우는 없다. 워낙 다르니까. 만약 <음란서생>에서 동시에 왕 역할을 제의받았다면 좀 달랐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농담으로 그런다. “아니, 왕이 꼭 그렇게 생겨야 한다는 법이 있냐. 고증해봤냐고. 실제 왕은 나 같은 외모였을지 몰라. 편견을 버려.” (웃음)
-본격적으로 인정받은 게 <황산벌>(2003)과 <시실리 2km>(2004) 이후인데, 짧은 시간 동안 성장한 것 같다.
=나는 운이 참 좋았다고 생각한다. 인복도 많다. 굉장히 행복하다.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했다. 그런 행운으로 시작했지만, 내실있고 실력있는 배우로 변모하고 싶은 게 욕심이다.
-이젠 어딜 나가도 많이들 알아볼 것 같다.
=<시실리 2km> 끝나고 나서부터 젊은 층이 조금 알아보더니, <올드 미스 다이어리>를 하면서 아줌마들이 알아본다. 앞치마를 두르고 가사를 챙기는 남성상이 나이 드신 분들에게 어필했나보다. 촬영을 하고 있으면 아가씨들이 지나가면서 “팬이에요!”라고 외치곤 한다. 그래서 좋아하면 “우리 엄마가요!”라고 덧붙인다. (웃음)
-현재 연기자로서 무엇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나.
=어떤 상황에서도 주눅 안 드는 배우를 보면 부럽다. 안 그런 척하지만 난 소심한 A형이다. 귀가 얇다고나 할까, 분위기에 휘둘리는 편이다. 그리고 발음이 정확한 배우가 부럽다. 고향이 광주라 그런지 발음이 또박또박한 성우 출신 배우들이 부럽다. <음란서생>에서 함께했던 김기현 선생님이나 한석규씨처럼. 그리고 나이 드신 배우분들이 가장 존경스럽다. 눈빛 하나만으로 한 장면 전체를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그분들을 보고 있으면 오랜 시간 갈고닦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부인도 배우다.
=연극할 때는 주연을 도맡았고, 영화도 <오! 수정>부터 나왔으니 나보다 선배이다. 사실 나 말고 <왕의 남자>와 <음란서생>에 모두 나온 배우가 또 있다. 바로 집사람이다. <왕의 남자>에서 성종의 빈으로 나와 경극 공연을 하니까 “우리 이야기를 하나 보오”라고 말한 뒤 연산의 칼에 맞아 죽는, 그리고 <음란서생>에서는 “인봉거사 죽어라”라고 외치고, 정빈에게 “그런 추문이라고나 할까…”라고 말하는 양반가 부인 말이다. <도마뱀>에도 함께 나오고, <플라이, 대디, 플라이>에서는 아예 부부로 출연한다. 내가 억지로 그 배역에 집사람을 밀어넣었냐고? 절대 아니다. 나보다 선배라니까.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