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사랑했으므로 만사형통? <음란서생>
2006-03-08
글 : 김지미 (영화평론가)
<음란서생>이 설정한 허구적 제약과 그 해결법의 문제

사극 열풍이 처음에는 브라운관을 잠식하더니, 이제 스크린까지 장악하고 나섰다. <반칙왕>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등의 시나리오 작가였던 김대우의 감독 데뷔작 <음란서생>도 외관상 사극을 표방하고 있다. 그러나 사극의 ‘사(史)가 사실로서의 역사, 실제로 존재했던 과거라는 의미를 품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 작품은 사극보다는 ‘시대극’(costume drama)이라는 용어가 더 적합해 보인다. 영웅과 거대 서사가 지배하던 ‘대문자 역사(History)’의 시대는 가고, 평범한 개인과 미시 서사를 다루는 ‘소문자 역사(history)’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영화 속에서 역사를 조망하는 방식도 바뀌고 있다. 현재까지도 극장가의 가장 큰 화제를 불러모은 <왕의 남자>도 ‘왕’보다는 ‘남자’에 방점이 찍혀 있다. 그러나 연산과 광대 공길간의 동성애적 관계가 허구이든 진실이든 간에 그 작품이 여전히 ‘사극’인 이유는 ‘사료’(史料)가 있고 그에 대한 해석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음란서생>은 그 어떤 ‘사료’에도 관심이 없다. 게다가 시기를 파악할 수 있는 어떤 인물이나 사건도 암시된 바 없이 조선시대쯤으로 보이는 어느 ‘과거’가 시간적 배경을 이루고 있다. 고풍스러운 의상과 소품은 시대를 뒷받침하는 배경이라기보다 작품의 시공간이 지금, 여기가 아님을 알리기 위한 표식이자 심미적 즐거움을 제공하기 위한 시각적 장치로 사용된다. 이 영화에서 ‘사’(史)적인 것은 모두 패션이며, 소비되어야 할 감각이다.

가상적 금기로서의 역사

사대부 집안 출신의 자제이자 당대 최고의 문장가 윤서가 있다. 그는 라이벌 집안 임가의 음모로 동생이 초죽음이 되어 돌아왔는데도 분개하지 않는다. 아내는 그를 ‘겁쟁이’라고 부르고, 아버지는 그의 침착함에 분노하고, 왕은 그의 고분고분함을 경멸한다. 그는 ‘대업’을 같이 이루자는 동료의 손을 뿌리치며 ‘대업이 뭐요?’라며 오히려 반문한다. 그는 뭔가 크고 거창한 것에는 관심이 없다. 그런 그를 한순간에 뒤흔든 단어가 있었으니, 우연히 유기전 뒤편의 불법 서적 필사가가 건넨 책에 쓰인 ‘음부’가 그것이다. 상소문을 작성하려고 앉은 책상머리에서 그의 머리를 장악한 것은 그 단어뿐이었다. 상소문이 음란서로 둔갑하고, 임금과 정치라는 공적 영역에서 좌절당한 윤서의 욕망은 규방과 성(性)이라는 사적 영역으로 위치 이동하여 반란을 꿈꾸기 시작한다. 당대 최고의 문장가인 윤서가 공적인 언어를 버리고 금지된 언어를 구사하기로 마음먹으면서 그는 ‘음란서생’으로 돌변한다.

‘음란서생’이 시작되는 지점은 바로 이 금지된 것에 대한 욕망이다. 모든 서사는 갈등 구조를 만들어내기 위해 금기를 상정하고 그것에 도전하여 극복하거나 좌절하는 개인을 그린다. <음란서생>의 윤서에게는 두 가지의 금기가 작동하는데, 하나는 그가 ‘공명의 도’를 논해야 하는 사대부라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왕의 여자인 정빈을 욕망한다는 사실이다. 두 가지는 모두 계급에 따른 사회적 역할과 권한이 명백하게 규정되어 있는 전근대라는 시공간을 필요로 한다. <음란서생>이 ‘과거’라는 모호한 시공간으로 회귀한 것은 지금, 여기에는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제약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음란서생>이 만들어낸 ‘과거’는 드라마 <궁>이 만들어낸 허구의 왕실과 동일하게 소비된다. <궁>이 더이상 대한민국에 존재하지 않는 왕실을 복구해낸 것은 우선 ‘왕자’ 같은 남성을 문자 그대로 실재하게 함으로써 ‘왕자’와 ‘공주’ 혹은 ‘빈’에 담겨 있는 판타지적 기의들을 살려내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현실에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금기들을 복원해 냄으로써 극적 갈등을 양산해내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음란서생>에서 재현되는 왕실도 디테일은 화려하지만 실체는 없고 앙상한 뼈대만 있을 뿐이다. 무력한 왕과 어린 정빈, 그들이 거니는 후원에도 내신들이 꿇어앉아 명을 받는 궐내 어디에서도 왕정의 실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왕실은 시대극이라는 배경을 완성하기 위한 그림처럼 존재할 뿐이다.

사랑도, 예술도 페니스에 귀속된다

<음란서생>에서 왕의 손을 떠난 권력은 고스란히 창작자 윤서의 손 안으로 안착한다. 윤서는 왜 음란물 제작자가 되기를 욕망하는가? 단순히 ‘음부’라는 단어가 환기시킨 성적 욕망 때문이라고 해석하기에는 윤서라는 인물은 지나치게 ‘인봉거사’라는 미스터리한 작가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온 장안이 이분(인봉거사)의 새 책이 나오기만을 기다린다’는 사실에 놀라며, 글이 갖고 있는 또 다른 권력 세계에 눈뜨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그것은 사대부로서의 글쓰기가 한번도 갖지 못했던 권력이다. 정치라는 통로를 통해서 자신의 욕망을 해소할 수 없었던, 다시 말해 더이상 상소문을 작성할 수 없었던 윤서는 저잣거리의 밤을 지배하는 음란서적을 통해 새롭게 권력에 대한 야욕을 불태우기 시작한다.

이제 권력 구조는 섹스를 중심으로 다시 쓰이기 시작한다. 정빈은 윤서를 욕망하고, 조 내관은 가질 수 없는 정빈을 지키려 하고, 왕은 조 내관을 멸시하며 정빈을 욕망한다. 그리고 윤서는 자신의 글을 통한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정빈을 이용한다. 정빈은 분명 공적 영역에서 ‘왕의 여자’라는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음에도 사랑과 섹스라는 또 다른 권력 투쟁의 장에서 윤서에게 절대적 약자임을 자처한다. 그녀는 자신의 권위를 보호해주는 테두리인 궁궐을 빠져나와 윤서가 막강한 힘을 휘두르는 음란서적 제작소인 유기전으로 들어온다. 그 공간에서 그녀는 작가인 윤서와 삽화가인 광헌의 창작물을 위한 도구로 전락한다. 그녀의 몸은 윤서의 글에서 상징적으로 유린당하고, 윤서에게 육체적으로 탐닉당하며, 광헌의 그림을 통해 시각적으로 착취당한다.

이 영화에서 정빈이 제시되는 방식은 포르노그래피적인 시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녀는 유기전 안에 있을 때는 물론 궁궐의 휘장 속에서도 관음의 대상이다. 관객은 윤서, 광헌, 조 내관 그리고 왕의 시선을 대신한 카메라를 통해 정빈의 육체를 훔쳐보게 된다. 정빈과 윤서의 정사신에서 그녀의 노출 수위가 그다지 높지 않음에도 그녀가 성적으로 대상화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은, 자신의 의관은 한치도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그녀를 안는 윤서의 태도와 문 틈 뒤의 ‘피핑 톰’ 광헌의 존재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여성을 대상화하면서 탄생한 ‘음란서적’을 소비하는 이들은 모두 여성으로 상정되어 있다. 유기전에 줄을 서는 일명 ‘하녀년’들이나 규방에서 추월색(윤서)의 글에 동일시의 쾌감을 느끼는 이들은 모두 여성이다. 그들은 자기의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본서에 덧붙여 일명 ‘댓글’을 적어댄다. 작품을 수용하는 행위도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라고 볼 수 있겠지만,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창작 과정은 철저하게 남성의 영역에 속해 있는 셈이다. 이같은 성별에 따른 생산·수용의 영역 구분은 그 자체로도 음험하지만, 남성의 성적 판타지를 여성이 아무런 거부감 없이 수용할 수 있다는 생각 혹은 강간에 가까운 폭력적인 관계를 여성들이 욕망한다는 논리를 바닥에 깔고 있기에 더욱 위험해 보인다. 윤서의 ‘젠체하는’ 글쓰기는 여성의 몸을 사물화하면서 발현되고, 남성들이 상상한 ‘진맛(판타지)’이 아무런 거부감없이 여성에게 전이되는 셈이다.

사랑은 권력장(權力場)으로부터 안전한가?

‘음란서생’ 윤서는 금기에 도전함으로써 예술가로서의 욕망과 대중적 글쓰기를 통한 권력욕을 향유한다. 윤서는 ‘인봉거사’를 극복하기 위해 글 사이에 음화를 넣는다는 획기적인 생각을 해낸다. 그것은 높은 판매부수를 가져오는 대신, 그가 정빈과 벌인 위험한 장난을 폭로하는 덫이 된다. 정빈은 자신의 사랑이 음화로 전락했다는 것에 배신감을 느끼고, 살로메처럼 왕의 권력을 이용해 윤서에게 복수하기 시작한다. 이 지점에서 관객은 정빈의 공적 지위와 사랑하는 이로서의 사적 지위가 복합적으로 충돌할 것을 기대하게 된다. 그러나 영화는 윤서, 정빈, 조 내관 그리고 왕이 이루는 사각관계의 감정선들을 매우 혼란스럽게 제시한다.

우선 윤서와 정빈의 관계는 매우 모순적인데, 윤서는 정빈과의 정사를 발설하겠다는 협박을 담보로 조 내관의 손에서 광헌을 구해낸다. 이를 통해 정빈에 대한 윤서의 본심은 그 바닥을 드러냈음에도 그는 다시 정빈에게 ‘자신의 사랑이 음란한 욕망을 담고 있어, 사랑이라는 말로 표현하지 못하고 가슴에 담아 두었을 뿐’이라는 모호한 감언이설을 내뱉는다. 정빈은 그 말을 사랑고백이라고 믿어버린다. 졸지에 둘의 사랑 놀음에 구경꾼이 된 왕은 갑자기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라면서 자신을 사랑의 패배자로 규정하고 물러난다. 가장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조 내관의 죽음인데, 그의 죽음은 누가 지시를 내린 것인지조차 불분명하다. 그가 죽은 이유는 그가 ‘머리의 령’과 ‘마음의 령’은 갖고 있었으나 단지 ‘거시기의 령’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해볼 뿐이다.

분명 감독은 이 네명의 엇갈리는 사랑을 통해서 처연한 비장미를 이끌어내고 싶었으리라. 하지만 관객은 윤서의 신의없음에 실망하고, 정빈의 미련함에 답답해하고, 왕의 자포자기에 당황하고, 조 내관의 죽음에 의아해할 뿐이다. 왕으로 하여금 ‘사랑’을 마치 모든 권력을 초월한 가치인 것처럼 발화하게 함으로써 나름대로 갈등의 밑그림을 형성했던 왕권을 비롯한 시대적 레퍼런스(reference)들은 완전히 무화된다. 사랑이 마치 모든 권력관계와 지배관계를 초월해서 작동하는 절대적 가치인 양 부각됨으로써 오히려 그 사랑은 현실적 지지대를 찾지 못하고 진공상태에 빠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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