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새로운 정치성을 주목한다, <박치기!>
2006-03-08
글 : 황진미 (영화칼럼니스트)
541호 남다은의 <박치기!> 비판에 대한 반론

이 글은 남다은의 ‘1968의 청춘, 그 박제된 역사’(<씨네21> 541호)에 대한 반론이다. 남다은은 재일조선청년들이 박터지게(!) 싸우는 이유를 ‘영화 속에서’ 찾을 수 없으며, 다만 장례식 장면을 통해 외부적 역사와 슬쩍 만나게끔 한다고 비판하고, 68의 풍경을 차용하고는 있으나, 68의 정신은 없고, 노래 <임진강>을 사랑의 세레나데로 변질시킴으로써 <임진강>의 정치성을 탈각시킨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나는 싸움의 이유를 영화를 통해 ‘매우 잘’ 알 수 있었으며, 일본사회가 그들 안의 소수자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 자체가 진정한 68정신이며, 노래 <임진강>이 사랑의 세레나데로 거듭남으로써 새로운 (미시)정치성을 획득한다고 생각한다.

1. 자이니치

일본 남학생이 치마저고리를 입은 경자의 저고리 동정에 잉크를 묻히며 시비를 건다. 조선학교 남학생들이 몰려오고, 두 집단 사이에 ‘조센징’, ‘쪽발이’라는 욕설이 오가고, 피튀기는 패싸움이 벌어진다. 더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랴. 이 장면은 실제로 1929년 광주학생운동을 촉발시킨 광경이며, 유럽 내 아랍인의 히잡을 둘러싸고 오늘도 벌어지는 풍경이다. 정서적 이질감은 이지메를 낳고, 이지메는 소수자들을 ‘악으로 깡으로’ 결집시킨다. ‘깡다구’는 자기 방어를 위한 것이었으나, 새로운 정체성과 폐쇄성의 표식이 된다.

영화는 이 과정을 경쾌하게 그린다. 싸움에 대한 ‘영화적’ 설명은 프랑스 내 아랍 청년들을 그린 <증오>와 비교해도 모자람이 없다. 왜 우리가 잘 모르는 세계를 그린 영화는 ‘외부적’ 지식을 동원해서라도 잘 받아들이면서, 우리가 ‘좀 아는’ 세계를 그린 영화에 대해선 상세한 설명을 요하는가? 이는 마치 ‘우리(남한사회)는 그들(재일조선인)을 잘 알고있다. 그러나 너희(일본)가 그것을 얼마나 잘 설명하는지 보겠다’는 태도이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그들을 이 영화만큼이나 알고 있는가? ‘너희는 그들을 잘 모른다. 알려고 해도 알 수 없다’는 비판적 태도는 자이니치를 일본사회의 구성원으로 보지 않고, 혈연적 동질성과 역사적 피해의식으로 ‘우리 편’에 귀속시키고, 맞은편에 ‘일본’을 위치시키는 민족주의적 사고의 산물은 아닌가?

2. 68의 정신

68을 주워섬기는 영화들은 많다. <69> <몽상가들>, <나에게 유일한> 등은 68의 구호들을 젊은 혈기와 객기 속에 버무린다. 그 결과 정치적 가치들은 무화되고 혁명은 장난이 된다. 그러나 <박치기!>는 (희화화된 담임을 통해 그러한 태도들과 결별하고), 자신들과 가장 가까이 있는 구체적인 정치성을 대면한다. 바로 자이니치라는 일본사회 내부의 인종적 소수자이자, 정치적 소수자를 그리는 것이다. 일본영화 속 자이니치는 거칠고 폭력적이며 음습하게 그려질 뿐(<GO> <피와 뼈> <개 달리다> <신 의리없는 전쟁> <플라이, 대디, 플라이> <아카메 48폭포>), 그들에 대한 일본사회의 입장은 거의 드러나 있지 않다. 그러나 <박치기!>는 여전히 낯선 존재이자 한편으론 무섭기까지 하며, 찬찬히 들여다볼수록 부채감이 드는 ‘우리(일본) 안의 타자(자이니치)’를 똑바로 응시하는 영화이자, ‘경계를 지우고 서로 섞이기’를 그 해법으로 제시하는 영화이다.

3. 사랑의 세레나데

영화가 연애라는 사적 관계와 노래라는 평화의 도구를 통해 사람들 사이의 반목과 경계를 지우려는 노력은 눈물겹다. 일본 청년은 개천을 헤엄쳐 건너고, 조선어를 배우고 ‘강개’라 불린다. 개인들간의 경계를 지우는 일은 결코 녹록지 않다. 따라서 “조선인으로 살 수 있냐?”는 경자의 질문은 자못 정치적이다. 안성이 모모코의 아이를 받아 아버지가 되고, 그들이 ‘암사자와 수표범 사이에서 태어난’ 레오폰을 보러 가는 것은 ‘변절’이거나 ‘자기 부정’이 아니며, 오히려 일상을 통한 더 구체적인 싸움일 수 있다.

북조선 애국가 작사가인 박세영이 작사한 <임진강>은 60년대 인디 밴드가 일본어로 번역하여 음반을 냈다가 금지곡이 된다. 그러나 일본어로 2, 3절이 붙여진 이 노래는 일본 학생운동의 애창곡이자, 공연무대의 노래로 꾸준히 살아남아, 여러 차례 리바이벌되고, 2005년엔 68년의 원곡이 재발매된다.

<임진강>은 68의 역사이자 현재이다. 또한 “부를 수 없는 노래는 없다”는 PD의 대사는 68의 정신이자 현재에도 유효한 싸움의 지점을 보여준다. 조선인 1세대에게 쫓겨난 일본 청년의 <임진강>은 라디오를 통해 두번 울려퍼진다. 한번은 조선어로, 한번은 일본어로. 이것은 무국적의 사랑의 노래가 아니라, 평화의 일인 시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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