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무인 곽원갑>의 우인태 감독
2006-03-10
글 : 김현정 (객원기자)
사진 : 오계옥

<무인 곽원갑>의 우인태 감독이 3월9일 개봉을 앞두고 한국을 찾아왔다. <백발마녀전> <야반가성>으로 한국에 알려졌던 우인태는 다른 홍콩 감독들처럼 다양한 장르를 오가며 영화를 만들어왔고, 할리우드에선 공포영화 <처키의 신부> <프레디 vs 제이슨>으로 경력을 다지기 시작했다. 그런 우인태가 이연걸의 마지막 액션영화인 <무인 곽원갑>을 연출했다는 사실은 다소 의외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린 시절 스크린의 영웅들을 보며 소아마비로 아픈 다리를 잊었다는 우인태에게 <무인 곽원갑>은 애정의 시작을 일깨우는 반환점일지도 모른다. 개봉이 얼마 남지 않은 지난 2월24일, 다리가 불편한데도 카메라 앞에서 여러 가지 포즈를 취해준 우인태를 만났다.

-<무인 곽원갑>은 실존인물인 곽원갑의 일대기다. 그에 관한 설명을 부탁한다.
=곽원갑은 중국에선 매우 유명한 인물이다. 서구열강이 중국을 침략하던 시기에 살았던 그는 깊은 애국심을 가진 무인 중 한명이었고 외국인들의 도전에 응해 싸우기도 했다. 그는 중국 무술이 좀더 개방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 무렵 중국엔 스타일이 다른 여러 종류의 무술이 존재했고, 무인들은 서로 질시하여 <무인 곽원갑>에서처럼 최고의 자리를 두고 다투곤 했다. 그러나 곽원갑은 무인들이 시기를 버리고 단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철학은 올림픽 정신과 비슷했다. 누군가를 죽이거나 때려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개발해야 진정한 일인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마흔두살에 죽었기 때문에 자신의 철학을 펼칠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세운 무술학교는 지금 50개국에 퍼져 있고 학생 수도 50여만명에 달한다.

-<무인 곽원갑>의 영어 제목은 <Fearless>다. 두려움이 없다는 뜻인데, 왜 이런 제목을 붙였는가.
=이유는 두 가지였다. 먼저 외국인은 곽원갑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이해하고 공감하기 쉬운 제목이 필요했다. <Fearless>는 액션영화의 느낌이 나는 제목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좀더 근본적인 것이었다. 타인이 아니라 자신을 대면할 때 두려움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직시하고 그 내면으로 들어가 책임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나는 곽원갑의 전기영화를 만들고자 하진 않았다. 그의 삶과 무술에 대한 철학을 다루고 싶었다. <무인 곽원갑>은 삶에 관한 단순한 이야기다. 우리는 매우 혼란스러운 세계에 살고 있다. 우리는 테러리스트와 질병, 관계의 상실 같은 것들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이연걸과 나는 누구나 자기 안에 존재하는 힘을 발견하여 세상을 더 낫게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아시아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젊은 관객에게. 그런 건 영웅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영웅이다.

-당신과 이연걸은 진정한 무술의 정신을 전하고 싶어서 <무인 곽원갑>을 기획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지금 들려준 대답이 그런 의도와도 관련이 있나.
=그렇다. 나도 이 영화를 만들며 이연걸에게 많이 배웠다. 이전까지 나는 복수를 하기 위해 무술을 연마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연걸은 그 오해를 바로잡아주었다. 한자로 무(武)는 ‘그치다’와 ‘갈등’이 더해진 글자이고, 술(術)은 기술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무술은 ‘싸움을 피하는 기술’이라는 뜻이다. 무술의 진정한 정신은 폭력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피하는 것이다. 자신을 강하게 단련하여 자아가 성장해야 한다.

-액션영화를 연출한 적은 있지만 이연걸과 함께 액션을 만드는 건 남다른 경험이었을 듯하다.
=이연걸은 철학이 있는 배우다. <무인 곽원갑>은 그의 인생, 그가 무술을 통해 무엇을 배웠는지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이연걸과 나는 영화의 목적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토론과 논쟁도 있었지만 그건 이연걸의 생각을 영화적으로 바꾸는 과정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연걸은 진정한 고수다. 그가 주먹을 휘두르면 그 움직임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보통 무술영화는 두컷 정도 찍고 끊고 다시 찍곤 하지만, <무인 곽원갑>은 롱테이크가 가능했다.

-<백발마녀전> <야반가성>은 장르는 다르지만 매우 탐미적이고 스타일리시한 영화였다. 그러나 <무인 곽원갑>은 단순하고 남성적이다. 이런 변화는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나는 스타일이 스토리와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믿는다. 좋은 감독이라면 스타일을 스토리에 강요하지 말고, 스타일이 스토리를 뒷받침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만 관객이 영화에 빠질 수 있다. <백발마녀전>과 <야반가성>도 그랬다. <무인 곽원갑>은 무술에 관한 현실적인 이야기이므로 단순하고 남성적으로 찍었다. 사람들이 무술영화를 보고 “카메라 움직임이 정말 환상적인걸” 혹은 “음악이 진짜 좋은데”라고 이야기하면서도 스토리의 포인트는 놓칠 수가 있다. 그래서 <무인 곽원갑>은 카메라가 많이 움직이거나 개입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어떤 무술영화는 액션만 보려고 빨리감기를 하기도 한다. <무인 곽원갑>은 그런 영화가 되지 않도록 만들었다.

-<무인 곽원갑>에서 가장 화려한 액션은 곽원갑이 진사부와 싸우는 식당장면이다. 그 장면은 어떻게 찍었는가.
=그것은 액션이 스토리를 뒷받침해야 한다는 좋은 예다. 그때 곽원갑은 아직 무례한 젊은이였고 최고가 되기 위해 무엇이든 하는 싸움꾼이었다. 그는 진사부를 이기고 싶어서 이성을 잃는다. 무술이 아니라 살인에 관한 장면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연걸에게 한방에 갇힌 짐승 두 마리가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하는 것처럼 찍자고 제안했다. 그 장면에서 폭력은 무감각하게 상대를 죽이기 위해서만 사용되고, 관객이 그걸 느껴야만 했다. 드라마틱하고 현실적으로 보이도록 찍고 싶었다. 그래야 관객과 곽원갑이 모두 그가 인생 최대의 실수를 저질렀다는 걸 깨달을 수 있을 테니까. 두 팀이 2주 반 동안 거의 24시간 내내 일하면서 극 장면을 찍었다. 찍고 나니 세트가 완전히 부서져 있었다.

-<무인 곽원갑>은 동양적인 주제를 담은 영화다. 하지만 당신은 영국에서 십대 시절을 보냈고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했다. <무인 곽원갑>의 정신과 주제에 접근하기가 힘들진 않았는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내가 홍콩에서 만든 영화들은 판타지와 러브스토리, 코미디영화여서 무게가 있진 않았다. 하지만 <무인 곽원갑>은 이연걸의 꿈을 실현하는 영화였고 책임이 컸다. 게다가 100년 전의 중국에 관한 영화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뛰어난 중국인 작가를 고용했고, 중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연걸에게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나는 정말 숙제가 많았다. 매 장면 조심스러웠기 때문에 영화를 찍으면서 흰머리가 많아진 것 같다. (웃음)

-당신이 만든 영화들은 장르와 성격이 매우 다르다. 정말 만들고 싶은 영화는 어떤 영화였는가.
=아직 찾고 있다. 나는 영화학교에서 수업을 받거나 현장 밑바닥부터 올라오는 경험을 거치지 않았다. 나는 처음부터 감독이었다. 그래서 아직도 “내가 좋은 영화를 만들고 있는 건가?”, “이 정도면 충분한가?”라는 두려움과 의문이 있다. 나는 아직 장르마다 어떤 차이가 있는지도 이해를 못하기 때문에 호러와 코미디, 러브스토리, 무술영화를 두루 찍고 있다. 언젠가는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겠지. 그때가 되면 어떤 장르든 자유롭게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당신은 미국에서 마케팅을 전공하고 홍콩에 돌아온 다음 감독이 되었다. 언제부터 그런 꿈을 가지게 되었나.
=내 어린 시절은 행복하지 않았다. 8개월이 되었을 때 소아마비에 걸렸고, 그 때문에 친구도 없었다. 아버지는 같이 놀아줄 친구가 없는 나를 극장에 데리고 갔고, 점심을 먹인 다음 다른 극장으로 데려다주었다. 나는 그곳에서 탈출구를 찾았다. 커다란 스크린에 나오는 영웅들을 보며 내 다리와 고통과 근심을 모두 잊을 수 있었다. 멋지구나, 영화감독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문제를 잊도록 만들 수 있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영화감독은 몸을 많이 써야 하는 직업이기 때문에 영화학교에 보내줄 수 없다고 말했다. 신체적인 장애 때문에 꿈을 접지는 않겠다고 생각했지만 학비가 없어서 아버지가 시키는대로 비즈니스 스쿨에 진학해야만 했다. 아버지가 은퇴한 뒤에야 나는 자유를 얻었다. 홍콩에 돌아와 영화하는 사람들을 만나다가 배우가 되고 싶어하는 경찰을 만나서 함께 시나리오를 썼다. 그런데 누구도 그 시나리오를 연출하려고 하지 않는 거다. 투자자도 구했는데 말이다. 어쩔 수 없이 내가 감독을 했고 책과 만화를 보며 장면을 연구했다. 진짜 악몽이었지만 그게 내 운명이었나보다. 영화는 그해 여름 홍콩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렇게 우연히 영화를 시작했는데도 이전 무협영화와는 전혀 달랐던 <백발마녀전>을 연출했다. 스스로 재능을 발견한 건가.
=내가 재능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열심히 했다는 건 안다. <백발마녀전>을 만든 93년 무렵, 홍콩에서 판타지에 가까운 검술영화, 그러니까 검객이 검을 휘두르며 공중을 날아다니는 영화는 거의 끝물이었다. 하지만 나는 원작소설에서 러브스토리를 발견했고, 남들과 다르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의상디자이너도 구로사와 아키라의 <꿈>을 작업했던 일본인 에미 와다를 고용했다. 사람들은 홍콩 시대극에 일본 디자이너를 고용하다니 정신이 나갔다고 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촬영과 미술감독에게도 전통과 관습에서 벗어나 모든 걸 다르게 생각하라고 주문했다.

-<백발마녀전> <야반가성>도 그렇지만 <처키의 신부>를 만들면서도 러브스토리를 삽입했다. 멜로에 특별한 재능이 있는 것 같다.
=고맙다. (웃음) 하지만 그건 아내 덕분이다. <백발마녀전>을 만들었을 때 나는 신혼이었는데, 아내는 매우 강하고 영리하고 주관이 뚜렷한 여자였다. 아내는 내 선택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앞서 말한 영화뿐만 아니라 <제이슨 vs 프레디>를 보아도 여성 캐릭터가 매우 강하다는 사실을 눈치챌 것이다. <무인 곽원갑>에서도 눈먼 소녀 문은 인생에 대해 매우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있고 곽원갑을 변화시킨다. 시나리오를 쓰다보면 그렇게 되곤 한다. 영감을 주는 아내를 얻었으니 나는 행운아다. (웃음)

-할리우드에 진출한 홍콩 감독들과는 다른 장르의 영화를 만들어왔다. 당신이 서구 세계에 익숙했기 때문일까.
=할리우드 사람들이 <백발마녀전>을 뛰어난 공포영화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웃음) 나는 영화를 선택할 때 감독이 아니라 관객이 되어 생각한다. 내가 이 시나리오를 영화로 보고 싶은가. 그렇다면 감독을 맡는다. 내게 왕가위나 우디 앨런 같은 영화를 만들라고 하면 만들 수가 없다. 하지만 <처키의 신부>나 이연걸의 영화들은 내가 보고 싶어하는 영화들이다.

-무협영화를 좋아한다고 들었다. 아버지를 따라 영화를 보던 시절부터 그랬는지.
=나는 이소룡과 쇼브러더스 영화의 팬이다. 이연걸의 영화는 <소림사>를 비롯해 일부만 좋아하고. (웃음) <무인 곽원갑>을 만들면서 내 기억 속에 있는 무협영화, 50년대에서 90년대에 이르는 모든 영화를 가져왔다. 50년대 무협영화는 옳은 일을 행하고 선인이 승리해야 한다는 긍정적인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60년대와 70년대 영화들은 매우 폭력적이고 영웅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곤 했다. 80년대에는 와이어 액션이 있었고, 90년대에는 컴퓨터그래픽이 있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무인 곽원갑>은 내 기억의 결정체와도 같다. 이건 누구에게도 말해본 적이 없는데, 나는 창조력이란 모두 기억에서 나오는 거라고 믿는다. 세상에 완전히 새로운 건 없다. 누군가 “이건 완전히 새로운 아이디어군”이라고 믿는다 해도, 그건 직접 겪고 책에서 읽고 영화에서 보았던 모든 것들이 뇌 안에서 뒤섞여 나온 것이다. 영화감독으로서 내가 원하는 건 관객이 내 영화를 보지 않고 느끼는 것이다. 보이는 건 전부가 아니니까.

-다음 영화는 준비하고 있는지.
=협상에 난항을 겪어 오랫동안 미뤄왔지만 일본 애니메이션 <블러드: 더 라스트 뱀파이어>를 실사영화로 만들게 됐다. 뱀파이어의 피가 섞인 소녀가 세일러복을 입고 일본도를 들고 있는 이미지에 매혹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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