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스크린 속 나의 연인] 량차오웨이(양조위)
2006-03-16
깊은 눈빛, 세상에 슬픔을 전염시키다

영화를 업으로 삼은 이래로 영화 속의 누군가를 설렐 만큼이나 좋아했던 기억이 까마득해졌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스크린 속에서 대면하는 것 만으로도 나를 설레게 했던 사람이 있었다. 한 때 영화보기를 온전히 일로 받아들이기 전에 영화만으로도 충만감을 만끽했던 그 시절에 만났던 사람. 바로 량차오웨이(양조위)다.

돌이켜보면 한국에 왕자웨이(왕가위) 영화붐을 가져왔던 영화 <중경삼림>과 <동사서독>을 통해서 이미 그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도 나에게는 어쩐 일인지 1996년 영화 <씨클로>에서 본 그의 이미지만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 그 영화는 베트남계 프랑스 감독 트란 안 훙이 감독하고 라디오 헤드의 ‘크리프’라는 음악으로 더 유명해진 영화다.

<씨클로>는 베트남에서 씨클로를 운전하며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18살 소년과 그의 누나, 그리고 소년이 발을 들여놓는 갱조직에서 그를 범죄의 길로 이끄는 ‘시인’의 얘기를 그리고 있다. 량차오웨이는 소년의 누나를 사랑하면서도 그녀에게 매춘을 알선하고 돈을 받아 챙기는 갱조직원 ‘시인’으로 분했다. 영화 속에서 그는 연신 불안하고 슬픔이 가득한 시선으로 담배를 피워 대며 감상적인 시구를 읊조린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롭게 보이는 그는 사랑하는 여자를 낯선 남자의 방에 들여 보내곤 슬픔과 안타까움이 담긴 시선으로 지켜보기만 한다. 그리고 사랑하는 여자의 순결을 빼앗은 남자를 살인하는 순간에도, 분노와 질투로 어쩔 줄 몰라하는 남자의 모습이 아니라 슬픔을 주체할 수 없어 사라지기 전에 안간힘을 쓰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이 투영된다. 아마도 내가 기억하는 가장 슬프고 강렬한 살인장면이었던 것 같다.

아열대의 열기가 그대로 전해지는 원색의 색조로 가득한 화면에서 그는 유독 무채색의 이미지로 기억된다. 그는 마치 이 세상에 발을 잘못 들여놓은 다른 세상에서 온 유랑자처럼 고단하고 절망적인 세상을 부유한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불 속에서 사라져갈 때도 불 속에 서있는 그의 모습과 흩날리며 타들어가는 지폐들이 묘한 대조를 이루면서 가장 비극적인 그 순간이 그토록 위태롭게 보이던 그가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신성한 제례의식처럼 느껴지면서 비로소 안도하게 되는 것이다.

조옥경/영화사 숲 대표

장궈룽(장국영)의 연인으로 등장했던 왕자웨이 감독의 <해피 투게더>는 물론 <영웅> <화양연화> <무간도> <2046>에 이르기까지 보는 이에게 슬픔을 전염시키는 그의 깊고 애잔한 눈빛과 조용한 말투, 쓸쓸한 표정은 그가 출연하는 모든 영화들 속에서 하나의 일관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씨클로>에서 그를 좋아하게 된 이후로 난 그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길 손꼽아 기다리기도 했다. 그리고 칸 영화제에서 왕자웨이 감독의 영화 <해피투게더>의 시사회로 처음 먼 발치에서나마 그를 봤고, 마침내 그 해 부산영화제에서 왕자웨이 감독과 함께 부산을 찾은 그를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때의 심정이란…. 그 이후로 나는 아는 기자들이 그를 인터뷰하고 나면 그와 관련된 얘기들을 건네 듣곤 했다. 그들이 전하는 얘기들은 ‘그가 얼마나 사려깊은 사람인지’ ‘그가 얼마나 다정하고 인간성이 좋은 사람인지’ 등 그를 칭찬하는 얘기 일색이었다. 그와 5분만 얘기를 나누어도 그의 조용한 말투와 깊은 눈빛에 반해서 정신을 못 차리는 여기자들을 만나면서 배우로서 뿐 아니라, 사람 그 자체로서 량차오웨이의 매력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었다.

조옥경 /영화사 숲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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