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욕망을 배신하라, 스타일을 배신하라,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
2006-03-29
글 : 남다은 (영화평론가)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의 불협화음이 만든 은밀한 매력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이라는 제목은 이미 이 영화의 모든 걸 함축하고 있다. 제목 어디에 방점을 둘 것인지에 따라 영화에 도달하는 길은 세 갈래로 나뉜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느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은밀한 매력’에 초점을 두어 읽기 혹은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을 즐기는 자들에 대해 읽기 혹은 ‘여교수’에 중심을 두고 읽기.

우선, 가장 쉬운 접근은 제목에서도 암시되었듯,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을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으로 읽는 것이다. 여기서 은밀한 매력의 조건은 겉과 속의 다름, 그 이중성에 있다. 그리고 그 이중성은 주로 방향을 잘못 찾은 성적 욕망과 관련된다. 이를테면 여교수 은숙은 알고 보니 성적으로 방탕하고 또 방탕했고, 만화과 교수 박필은 알고 보니 양아치였다. 도덕군자 같은 유 선생은 알고 보니 스토커였고 은숙에게 사랑을 고백한 김 PD에게는 알고 보니 아내가 있었다. 그러니까 가장 도덕적이어야 한다고 믿어지는 그들이, 가장 도덕적이지 않은 모습을 행할 때, 그것은 조롱받아 마땅한 은밀한 매력이 되는 것이다. 그들의 매력이 은밀해지기 위해서는 그들의 욕망에 위선이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져야 한다.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의 공허한 식사장면들, 화려한 음식을 앞에 두고 오가는 텅 빈 말들의 향연처럼 이 영화에서도 인물들은 끊임없이 먹고 마시고 말하지만, 그럴수록 드러나는 건 그들의 비루한 영혼뿐이다. 은숙이 사무실 안의 공기를 정화하는 가습기에서 오히려 썩은 냄새가 난다고 지나칠 정도로 예민하게 굴 때, 우리는 그것이 가습기의 냄새가 아닌 걸 안다. 안정된 사회적 지위를 누리고 있는 그들의 영혼에서는 악취가 풍기고 그들은 그걸 모른다 혹은 모른 체하고 있다. 영화는 여기까지만 말한다.

하지만 사실, 지식인의 허위의식, 그들의 이중적 욕망은 더이상 흥미로운 주제는 아니다. 이 주제가 한발 나아가려면, ‘알고 보니’ 드러난 그들의 사생활과 과거가 무엇 때문에 그들의 사회적 위치와 위배된다고 믿어지는지에 대한 탐구가 있어야 한다. 예컨대 여교수가 여러 남자와 잤다고 해서, 그녀가 과거에 좀 놀았다고 해서 혹은 PD가 바람을 피웠다고 해서, 현직 남자교수가 과거에 양아치였다고 해서, 지금 그들의 모습을 위선적이라고 판단할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질문. 여교수가 남자들과 섹스를 한다는 사실이 그녀의 이중성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이중적인 욕망이라고 규정하기 위해, 그녀의 젠체하는 얌전한 말투와 그녀의 노골적인 알몸 혹은 과감한 섹스신을 끊임없이 대비시키는 영화의 방식이야말로 문제적이다. 그들의 욕망을 은밀한 ‘매력’으로 만들어 훔쳐보는 동시에, 그것을 조롱하는 도덕적 우위를 지닌 자는 정작, 누구인가. 그러므로 대부분의 평들이 이 영화를 지식인의 이중성에 대한 조롱으로 읽거나, 우리 모두의 이중적 욕망에 대한 폭로로 읽는 것은 그다지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여교수는 남성들의 욕망 비추는 거울

두 번째로 가능한 접근은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을 즐기며, 그 매력을 교환하고 공유할 수 있다고 믿는 수컷들의 욕망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 영화는 여교수의 은밀한 욕망이 아니라,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을 탐하는 남자들의 노골적인 욕망에 대한 이야기로 읽힌다. “꽃이여, 너의 향기는 너의 것이 아니고 벌과 나비의 것”이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내뱉는 영화 속 남자들의 저열한 욕망(정말, 시의 적절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 속 남성들의 세계는 한 여성을 교환하며 완성되는 체계이다. 실제로 영화 속 대부분의 장면들에서도 은숙은 줄곧 여러 남자들 속에 위치한다. 어린 시절, 은숙을 중심에 두고 박석규, 석규 형, 형 친구는 피터지게 싸웠고 결국 한명이 죽었다. 현재, 조은숙 교수를 두고 남선생들은 여전히 쟁탈전을 벌이고 또다시 한명이 죽는다. 남성들의 역사는 반복된다. 그들은 모두 한 여자를 욕망하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이 욕망하는 건, 경쟁자의 욕망이다. 그러니까 남자들의 은숙에 대한 욕망 혹은 은숙의 남자들에 대한 욕망을 통해 드러나는 건, 남자들의 관계, 수컷의 생존논리이다. 저 화려한 여교수는 사실, 남성들의 욕망을 반영하는 거울에 지나지 않는 셈이다. 벌과 나비가 관계를 맺기 위해 꽃의 향기는 존재한다. 이것이 이 영화가 보여주는 동성사회적(homosocial) 욕망으로 이루어진 남성 중심적 사회의 논리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좀더 솔직한 제목은 ‘부르주아(남성)의 은밀한 매력(욕망)’이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남성의 욕망을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으로 감춘 이야기다. 말하자면, 이중적인 건 여교수 조은숙이 아니라, 이 영화의 전략이다.

히스테리아, 여성 존재의 언어

마지막으로 이 영화에 대한 가장 흥미로운 접근은 은숙의 언어와 행동을 히스테리아로 읽는 것이다. 영화 속, 현재의 은숙은 다리를 절뚝거린다. 1986년의 은숙은 그렇지 않았다. 우리는 영화가 보여주지 않는 그 세월 동안, 은숙에게 어떤 일이 있었을 거라고 막연히 예상한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어린 시절의 성적 방탕함에 대해 영화가 그녀에게 부여한 일종의 처벌처럼 느껴진다(그러나 처벌받아야 할 사람은 엄밀히 말해, 석규와 그의 형이지, 그녀는 아니다. 친구를 죽인 것은 그녀가 아니라 남자들의 치졸한 경쟁심이었다. 그런데도 은숙과 석규가 재회했을 때, 석규는 묻는다. “뭐, (우리가) 죄진 거 있어요?” 은숙의 대답, “그럼, 없어요?”). 그 처벌은 그녀의 육체 일부분을 남자들의 완벽한 성적 대상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영화가 의도하는 바와는 별개로, 불구가 된 그녀의 다리를 왜곡된 형태로 드러난 여성 히스테리의 증상으로 읽어내고 싶다. 그것은 남성 중심적 사회에서 자신만의 언어를 가질 수 없는 여성이 몸으로 말하는 최후의 방식이다. 은숙의 절뚝거림은 지나친 성적 욕망에 사로잡힌 여성에게 내려진 벌이 아니다. 그 비틀거림은 여성이 자신의 욕망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의 폭력성을 몸으로 체현해냄으로써 그 사회의 편견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히스테리는 거의 유일한 여성의 언어이다. 그것은 마치 여성 히스테리 환자의 거식증이 먹기를 중단하여 자신을 비존재로 만듦으로써 여성의 몸을 대상화, 도구화하는 현실에 거부를 표명하는 것과 유사하다.

여기서 잠시 떠올려보는 인용. “히스테리는 로고스와 ‘벌거벗은 임금님’이라는 연극을 한다-반대 조건으로. 로고스는 히스테리에게 무(無)가 될 것을 요구한다. 그러자 히스테리는 ‘나는 무의 옷, 무의미의 옷을 입겠소’라고 말한다. 히스테리는 무의 베일을 걸친다. 그리고 로고스는 그 안을 들여다보고 싶어한다. 그리고 로고스는 실제로 무를 본다(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하지만 그 안에는 변장한 여인이 있다. 무를 연기하는 병을 병자가 무라는 증거로 끌어들일 수 있는가(중략).” - 크리스티나 폰 브라운, <논리 거짓말 리비도: 히스테리> 중에서

여교수 조은숙의 거짓말은 그런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그녀는 거짓말을 한다기보다 진실을 말하지 않을 뿐이다. 그녀에게 감춰진 진실은 없으므로 그녀의 언어와 행동에서 그녀의 진심을 찾아내려는 시도는 무용하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저 연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정색을 하고 사랑을 고백할 때나, 자작시를 읊을 때나, 눈물을 흘릴 때나 그녀는 과장되고 희화화된 모습으로 스스로를 가장하고 있다. 그녀는 스스로를 염색한다(영화 속, 그녀의 직업은 염색과 교수이다). 그녀는 자신의 욕망을 끊임없이 치환할 뿐이므로, 우리가 보는 것은 다만, 그녀가 지나간 뒤 남은 욕망의 흔적뿐이다. 영화 속 대부분의 남자들은 그 빈껍데기 흔적을 붙들고 진짜라고 착각한다. 은숙은 기꺼이 이런 남자들의 완벽한 환상이 되어줌으로써 그 환상의 결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환상으로 변하고 있음을 연기해 보임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역으로 증명하는 것, 이것이 히스테리의 전략이다. 여교수의 은밀한 욕망이 있다면, 그것은 성적으로 방종한 ‘교수답지 않은’ 교수의 욕망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여교수의 은밀한 욕망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가장하는 여성 자신의 히스테리적 활동 안에서 추동되고 지연되는 것이다.

대중 영화의 화법을 배반하는 스타일

스타일 면에서 볼 때,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은 한숏에서 다음 숏으로 넘어가기 직전의 어색한 침묵과 긴장, 화면 밖 관객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인물들의 눈빛과 말투, 신기한 몸의 리듬을 통해 ‘낯설게 하기’를 의도하는 영화다. 말과 행동, 내용과 형식, 원인과 결과의 어긋남을 통해 생소함을 유발하려는 이 영화는 끊임없이 화면 안의 세계를 화면 밖으로 흘려보낸다. 만약, 이 영화가 하고자 하는 말을 ‘당신도 이렇게 살지 않아?’라는 비웃음으로 읽는다면, 그 비웃음은 아프지 않다. 형식적인 실험을 통해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고작 ‘우리는 모두 이중적인 욕망을 안고 사는 위선자입니다’라는 평면적인 단체 고백에서 멈출 때, 그건 조롱도 비판도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만약, 이 영화가 여교수 조은숙의 히스테리를 영화 자신의 거울로 삼았다면, 영화는 자못 흥미로워진다. 은숙이 끊임없이 남자들의 기대를 배반하며 낯선 연기를 펼쳐나가듯, 영화는 기이한 스타일과 이야기의 불협화음으로 대중영화의 화법을 배반하며 나아가는 것이다. 둘 모두에게 그러한 배반은 자기 존재에 대한 증명이며, 언어이다. 히스테리의 언어는 광기의 언어지만, 거기에는 적어도 버림받음에 죽지 않고 다시 시작하는 강한 생존본능이 있다. 그래서 나는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에 만족하지는 못해도, 이 영화가 위의 두 가지 결론 중, 후자에 조금 더 가까이 서 있다고 애써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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