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스크린속의 나의 연인] <아비정전> 장국영
2006-04-06
남자가 남자를 사랑할 수 있음을 알게 해준 장국영

무도회장에서 춤추는 젊은 군인들을 보며 검은 상복을 입은 엉덩이를 흔드는 스칼렛을 보고 어떻게 반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어렸을 때 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아직도 내게 그의 엉덩이를 먼저 떠올리게 하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신밧드와 함께 사막을 가로지르는 파라 공주를 보는 순간 난 새로운 연인을 만났다. 사막의 뜨거운 햇살과 모래 바람을 가득 담은 화사한 노란 톤의 풍경, 그 속에서 아라비아 풍의 의상 위로 살짝 드러나는 도톰한 젖무덤을 가진 그는 현실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환상의 여인이었다. 러시아에서 온 파란 눈의 매력적인 스파이를 본 순간 이번에는 그가 나의 연인이 되었다. <007 나를 사랑한 스파이>의 트리플 엑스는 그 나이의 내가 가질 수 있는 모든 판타지의 총합이었다. 이집트의 이국적인 풍경 속에서, 오리엔트 특급 열차의 한 객실에서, 그림 같이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는 바다 속에서 나는 줄곧 그를 따라다녔고, 그와 함께 하는 모험은 짜릿했고 행복했다.

그랬었다. 스크린을 보며 반해 나의 연인으로 삼은 이는 하나가 아니었다. 한 여인에게 순정을 바치지 않았고 지조도 없이 더욱 매력적인 여인을 만나기 위해 스크린을 찾아 나섰다. 불이 꺼지고 극장 안이 어두컴컴해지면 가슴을 두근거리며 이번엔 누구를 만나게 될까 하고 기다렸다. 그렇다고 해서 누가 뭐라 할 것인가. 아무도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이라고 손가락질하거나 돌을 던지지 않았다. 그것이야말로 스크린이 주는 크나큰 매력 중의 하나였다. 물론 극장에 드나들 돈을 마련하느라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단속반에게 걸리기라도 하면 학교에서 엄청난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었다.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나는 연인을 만나기 위해 끊임없이 극장으로 향했다. 대학 졸업 이후에도 내 불타는 연정은 <나인 하프 위크>의 엘리자베스에게서 <천녀유혼>의 섭소천에게로 옮겨가며 즐거운 청춘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정말 내 길지 않은 생애에 충격적으로 등장한 연인을 만났다. 내가 사랑했던 수많은 여인들을 모두 물리치고 단번에 나를 사로잡았던 새로운 연인, 그는 남자였다. 남자도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 그는 바로 아비였다. <아비정전>의 매력적인 두 여인 수리진이나 루루보다도 나는 남자인 장국영의 아비에게 꽂혔다. 아니, 아비를 연기하는 장국영에게 꽂혔다. 둘은 하나였다. 망치를 휘둘러 세면대를 부수고도 귀걸이로 루루를 유혹하는 그, 권태와 반항의 공기 속에서 흐느적거리고,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사랑으로부터 도망치려 몸부림치는 그, 나른하고 권태로운 그의 표정과 속옷 차림으로 맘보를 추는 그의 몸짓…. 그의 사소한 동작 하나 표정 하나도 삽시간에 나의 마음을 빨아들였고, 나는 그의 생각, 감정,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이 알고 싶어졌다. 그는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떠도는 나의 모습이기도 했고,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매혹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야말로 그는 나의 연인이었다.

머릿속으로 수도 없이 아비의 장국영을 떠올리던 시절, 그런 연인을 가질 수 있다는 것에 스스로 한없이 행복해 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내 젊음의 한 시기가 지나갔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그의 빈자리가 더욱 크게 느껴진다. 문득 4월1일 장국영이 세상을 떠난 지 3년이 막 넘었음을 깨달았다. 마음이 아프다.

남선호/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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