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4월29일(토) 밤 11시
1954년, 비토리오 & 파올로 타비아니 형제는 어린 시절에 겪었던 독일군 학살에 대한 다큐멘터리 <1944년 7월, 산 미니아토>를 만든다. 1982년, 동일한 사건을 바탕으로 장편영화 <로렌조의 밤>을 만든다. 그리고 오시마 나기사는 이렇게 말했다. “<로렌조의 밤>은 현실에 밀착해 있는 그들이 픽션에 대한 작은 양보도 하지 않으면서 스타일을 확장시키는 작품이었다. 이들은 판타지와 시적 감흥을 동시에 유지하는 어려운 작업을 해내고 있다. (중략) 스토리텔링에 대한 특별한 능력으로 그들은 시적 감수성을 지닌 리얼리즘 감독들 중 가장 뛰어난 감독으로 자리매김했다.”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은 판타지와 리얼리즘, 그리고 시적 감수성의 결합이다. 서로 배치되는 것처럼 보이는 재현 방식들이 역사와 만나 미학적이면서도 윤리적인 성취를 이뤄낼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네오리얼리즘에 대한 사랑으로 영화에 발을 들인 타비아니 형제는 점차 그 정신을 잃어가는 네오리얼리즘에서 나아가 이탈리안 뉴시네마의 정수를 선보이며 그러한 가능성에 다가간다.
<로렌조의 밤>은 형제의 영화세계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2차대전을 무대로, 이탈리아의 어느 마을에서 벌어졌던 독일군 학살이 그 당시 어린 소녀였던 여성의 회상 속에서 진행된다. 영화는 교회가 폭파되고 마을이 사라지고, 사람들이 떠나고 싸우고 죽는 잔인한 현실을 어린아이의 순진무구한 눈을 통해 제시한다. 타비아니 형제는 살육의 잔혹함을 사실적으로 재현하기보다는 신화적이고 시적인 상상력이 현실과 만나는 지점을 포착한다. 현실과 환상, 이미지와 사운드의 모순된 만남 속에서 비극적 현실과 동심, 살육과 로맨스 등의 이질적인 이야기들이 뒤섞인다. 밀밭의 전투장면이나,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의 행렬, 어두운 밤 빛의 형상으로 폭파되는 마을의 모습 등 각 장면의 이미지들은 그 자체로 살아 움직이는 회화의 이미지처럼 느껴진다. 뿐만 아니라 가장 절박한 분위기에서 흘러나오는 성가풍의 아름다운 음악 선율이나 죽은 듯이 고요한 침묵과 거대한 폭발음의 공존은 영상 이미지를 넘어서 한편의 시가 되는 소리의 힘을 들려준다.
네오리얼리즘이 사회적 물적 관계를 전면에 내세운 것과 달리 이들의 리얼리즘에는 앞서도 말했듯, 풍요로운 시적 상상력이 가득하다. 파시스트와 농민간의 대립이라는 전쟁의 참혹함 아래에서 사랑, 상실감, 슬픔 등의 개인의 감정들이 물결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