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교동의 어느 권투연습장에서 이준기를 만났다. 연습 중이던 사람들이 체육관 한쪽에 얌전히 앉았다. 기자와 스탭들 곁에 여자 한명이 바짝 서 있다. 이준기와 동갑이며 이준기 팬이라고 한다. 사인 받아도 되겠느냐고 묻는 얼굴이 너무 간절하다. 사진촬영이 끝나면 사인을 받게 해주겠다고 매니저가 말했다. “웬일이야. 너무 감사합니다.”
자리를 커피숍으로 옮겨 인터뷰를 했다. 시작한 지 10분도 안 돼서, 이준기가 등지고 앉은 쪽의 문이 딸랑거리며 열린다. 여자 두명이 지나가는 척하면서 소곤거린다. “이준기야, 이준기야.” 커피숍 내부에 있던 어떤 손님이 근처 친구에게 전화라도 건 모양이다. 야, 여기 이준기 와 있다. 빨랑 와서 봐. 4월17일, 이준기의 생일날 네이버 검색어 순위 2위에 ‘happy birthday to junki’가 올랐다.
전지현, 이효리, 문근영의 인기가 하늘을 찔렀을 때(물론 이들은 지금도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건 그저 인기가 아니라 신드롬이었다. 어느 날 눈을 떠보니 어떤 스타가 하늘 위로 휙 솟아서 내려올 줄 모르는 풍경 말이다. 지금 이준기가 그렇다. 영화 <왕의 남자>, 드라마 <마이걸>, 석류음료 CF로 인생 최고의 인기를 구가 중인 이준기와 대화한 기록을 정리했다. 그를 만난 이유를 또 하나만 들라고 하면, 서른아홉살의 소심한 가장이 싸움 잘하는 고등학생에게 수련받아 영웅이 된다는 내용의 영화 <플라이 대디> 촬영 중이라고 하겠다. 일본 소설 <플라이, 대디, 플라이>가 원작이며, 이문식이 가장 역을 맡았다. 이준기는 감색 교복을 입고 멋지게 싸움하는 고등학생 고승석으로 출연한다.
선배_ 그의 선생님
-<플라이 대디>에서 이문식씨와 함께 작업해보니까 어떠세요.
=워낙 훌륭한 선배님이고, 배울 점이 많아요. 현장에서 모니터 꼼꼼히 하시면서, 잘하시는데도 꼭 한번씩 더하세요. 본인이 만족할 때까지 리테이크를 가세요. 저런 모습이 꾸준히 연기하는 데 밑바탕이 되는구나 싶고 존경심이 들어요. 배우로서의 자세를 많이 배운 것 같아요.
-<플라이 대디>는 어떻게 출연을 결정하게 됐나요.
=이문식 선배님이랑 하고 싶어서 했어요. 원래는 선배님이 다른 작품 하신다고 해서 그거 하려고 했다가, 나중에 알아보니 선배님이 안 하기로 하셨다더라고요. 그래서 그럼 저도 안 하겠습니다 하고 <플라이 대디>로 쫓아온 거죠. <왕의 남자> 끝내고 나서 선배님들과의 작업이 정말 소중한 시간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이문식 선배님이 어떤 분인지 궁금하기도 했고. 그래서 그냥 무턱대고 한 거예요. 시쳇말로 꽂혔다 그러잖아요. <왕의 남자> 찍으면서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이준익 감독님이 이문식 선배님이랑 작품을 많이 하셔서 잘 알고 또 친하시더라고요. 배울 거 많을 거야, 하셨어요.
-이문식씨는 뭐라세요.
=그냥 웃으시던데요? (웃음) 선택은 잘한 거 같아요. <왕의 남자>가 앞으로 제게 족쇄가 되느냐 안 되느냐는 제가 다음 작품에서 얼마나 순수하게 그 시간을 보내느냐에 달린 거 같아요. 잡념들 다 버리고 내가 처음에 가졌던 생각대로만 가자, 했어요. <왕의 남자>에 도전했던 이유가 정말 좋은 연기파 선배님들과 좋은 시나리오로 영화한다, 그거 하나였거든요. 사실 <왕의 남자>가 너무 잘돼서 이번 작품도 흥행이 잘됐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었어요. 만약 이번 작품으로 쫄딱 망하고 나면 다음엔 진짜, 자신이 없어질 것 같아요. 연기자로서 나는 공길이 이상이 안 되는구나. 모멸감, 좌절감 이런 것도 느낄 것 같고. 그런 것이 솔직히 겁나요. 제 자신이 무너질까봐.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앞으로도 제 선택이 순수해야 할 거 같더라고요. 동료배우들하고도 하고 싶은데 욕심은 별로 안 나요. (웃음) 먼저 다가가서 제 연기가 얼마나 모자랍니까, 하고 물어볼 수 있는 대상은 선배님밖에 없잖아요. 동료배우들한테 가긴 좀 껄끄럽잖아요. 자존심도 있는데. 선배님들하고 작업을 하면, 뺏기는 게 없어요. 선배님들은 자기 캐릭터에 대해서도 확고하지만 작품 전체를 흐뜨리지 말자는 마인드가 분명하세요. 그분들이 중심을 먼저 잡고 저도 끌어주시는 거죠. 그런 작업이 좋아요. 앞으로도 꾸준히 그러고 싶어요.
-그런 배움이 현재 본인한테 가장 필요한 건가봐요.
=제가 처음 연기 시작했을 때 이런 얘길 들었어요. 남자배우가 20대 나이에 자기 입으로 ‘연기한다’고 하는 건 정말로 어리석은 거라고. 살아온 게 없는데. 자신있는 건 있죠. 제 또래 연기만 하면 돼요. 고등학생 역할하고, 만날 그거 우려먹고, 젊은 팬들한테, 어우, 저 이준기예요, 어우, 이러면 전 스물여덟살까지 계속 해먹을 수 있어요. 근데 그러기는 싫으니까. 제가 지금 가진 게 그것밖에 없으니까요. 다른 연기를 하면 100% 어색할 게 뻔하잖아요. 그런 걸 보완해주실 분은 선배님들밖에 없다는 거죠.
-드라마 <마이걸>은 어떠셨어요. 연기자로서 본인에게 어떤 경험이었고 뭐가 남았나요.
=제가 드라마를 한 원래 취지는, 같은 시기에 공길의 매력과 또 다른 매력을 동시에 보여주자는 거였어요. 물론 그게 적중했어요. 제가 몰랐던 건 드라마가 상업적이고 트렌디하다는 거였죠. 아예 몰랐어요. 영화는 내가 몰입이 됐을 때 촬영을 하고, 몰입이 안 되면 회차를 넘겨서 다시 찍을 수 있잖아요. 그런 시스템에 길들여져 있다가 드라마 현장에 가니까 정말 정신이 없는 거죠. 빨리빨리 뽑아내야 해요. 표정이나 연기 전부. 그런 점에서는 제가 정말 역부족이었던 것 같아요. 그 맛을 알고 인지해야 연기도 나올 수 있는 건데. 제일 많이 배운 건 스킬이고, 드라마의 대중성을 다시 한번 느꼈어요. 저는 솔직히, 드라마는 오락성이 강한 연기를 보여주는 것 정도로만 생각했거든요. 영화와는 좀 다르지만 드라마도 그 자체로 하나의 대중성을 가진 매체라는 인식을 갖게 된 것 같아요.
독립심_ 그의 본성
-<왕의 남자>를 계기로 단번에 스타가 됐잖아요. 저건 운이야, 하는 시선 때문에 힘들지 않았나요.
=저는 별로 안 힘들었어요. 제 나름대로 도전해서 얻은 기회였고 정신없이 공길을 만들어서 영화를 찍었으니까요. 확신하는데, 운으로 뜬다는 건 2% 정도인 것 같아요. 나머지는 자기가 가꾼 매력으로 사랑받고 인정받는 거라고 생각해요. 물론 빨리 뜨는 경우도 있죠. 그것도 그만큼 매력이 있기 때문이에요. 문제는 그걸 앞으로 얼마나 유지하고 창의적으로 바꿔가느냐죠. 그리고 그런 말 들을 여유가 없기도 했어요. <왕의 남자> 끝나고 바로 드라마를 했고 또 바로 새 영화 하고 있고. 촬영 없는 날엔 CF에, 각종 행사에…. 너무 바빴어요. 요즘은 좀 들리는데, 얘기가 다양해요. 한 작품 갖고 잘됐네, 라든지 열심히 하더니 잘됐네, 라든지 좀더 잘했으면 좋았을 텐데, 라든지 자만하지 마라, 라든지. 그나마 객관적으로 말해주는 건 제 친구들이나 매니저들, 몇몇 친한 기자들이에요. 그 말들을 제가 정리하려면 아직은 더 있어야 할 것 같아요.
-객관적인 얘기라는 게 어떤 건가요. 본인이 느끼기에 정말 객관적인 얘기구나 싶은 것.
=내가 원했던 배우의 길을 가고 있느냐는 말. 제가 봐도 확실히, 휩쓸린 게 좀 있었어요. 그나마도 제가 정말 고집불통으로 굴고 사무실과 타협해서 줄인 건데 그랬어요. 이준기란 녀석이 하나의 이슈가 되면서 생긴 문제죠. 다 안 할 수도 있지만 다 안 하면 저란 사람을 또 다르게 볼 수 있는 시각이 존재하거든요. 그런 부분은 저한테도 정말 애매하고 어려워요. 받아들이기도 힘들고. 제가 연륜이 좀 있었다면 잘 헤쳐나가겠는데, 저도 모르고 우리 사무실도 모르고 부모님도 모르고 친구들도 모르고, 전부 다 몰라요. 다들 새내기예요.
-내가 지금 범상치 않은 상황에 있구나, 하는 것이 언제 처음 와닿았나요.
=제일 처음 와닿았을 땐 <왕의 남자> 무대인사 때. 개봉하고 다음날이었어요. 대한극장이었나. 800석이 꽉 차고 주위 교통이 마비될 정도였어요. 개봉한 지 이틀 됐는데 뭐 이런 상황이 다 있나. (웃음) 배우들, 스탭들 다 놀랐어요. 영화 촬영 중에 스틸사진이 퍼지면서 마니아들이 있기는 했는데 그 정도일 줄은 몰랐던 거죠. 다음 무대인사는 더 심했어요. 개봉 보름째쯤 되니까 차가 극장엘 못 들어갈 정도였어요. 정말 실감했죠. 야, 이거…, 뭐야? (웃음) 다른 말이 안 나왔어요, 사실.
-팬들이 이준기씨의 어떤 점을 제일 좋아해주나요.
=솔직한 거요. 제가 팬카페에 글을 자주 쓰거든요. 제 연기의 모니터에 대한 각인을 많이 시켜요. 배우로서 이준기에 대해 질타를 날려달라. 제 자신도 제 잘못에 대해 많이 쓰고. 그런 진솔함을 좋아해주는 거 같아요. 배우와 팬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건 정말 어려운 일 같아요. 별 방법 다 써봤어요. 싸이월드에 홈페이지를 만들어서 팬들과 내가 같이 꾸며가는 걸 해볼까. 근데 그건 실패. 배우는 어느 정도 신비감이 있어야 하는데, 제 영화 보면서 싸이월드에서 본 사진 떠오르고 그러면 곤란하잖아요. (웃음)
-그렇게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팬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을 때 본인에게 얻어지는 건 어떤 건가요. 팬의 모니터가 실제로 본인에게 도움이 되나요.
=팬들이 올려논 글 보면 이건 누가 봐도 야, 이거 읽는 사람은 진짜 가슴 아프겠다 그럴 정도예요. 진짜 냉철하게 비판해주세요. 제가 누나라고 부르는 연상 팬들 중에 그런 팬이 많이 있어요. 솔직히, 읽으면 가슴 찢어지죠. (웃음) 그래도 제가 정말 힘들 때는 자기 전에 그런 거 읽고 마음을 정리하기도 해요. 마인드컨트롤에 많이 도움이 되죠.
-긴장을 늦추지 않으려고 백방으로 방법을 찾으시는 것 같아요. ‘내 길은 내가 알아서 간다!’ 하는 독립심도 강해 보이고요.
=신경 되게 많이 써요. 누가 내 뒤에서 험담하면 못 참아요. 내가 사람들 앞에서 다 벌거벗고 있다는 느낌이 들면, 어떻게든 잘해야지, 어떻게든 나를 막아야지 하고 파고들게 되는 것 같아요. 독립심은, 너무 심해요. (확고한 말투로) 너무 심해요.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많이 힘들어 하죠. (웃음) 저는 비판론자예요. 남한테 지는 것도 정말 싫어하고. 어려서부터 그래왔는데 본성이 어디 가겠어요? 이젠 저의 확실한 영역이 생겨버렸으니까 더더욱 누구의 터치도 원하지 않는 거죠.
열정_ 그의 과제
-최근에 한 석류음료 CF 있잖아요. 패러디도 나올 만큼 화제가 됐는데, 처음에 콘티 받았을 때 무슨 생각 들었나요.
=솔직히, 그것 때문에 사무실하고도 이견 충돌이 있었어요. 저는 남성적인 걸 찍고 싶었거든요. 석류음료 CF래요. 예쁘장하게 나와서 노래 부르면서 미녀는 어쩌고 한대요. 저는 정말…. 사무실에서는 한 번 해보자고 하더라고요. 어차피 저의 매력 중 하나 아니겠냐고. (웃음) 첨엔 반응이 싸~했어요. (웃음) 팬들도 전부, 이준기 저런 거 왜 찍었냐. 이준기 노래 정말 못한다. 그 노래, 한번 망가져보자 해서 만든 노랜대. (웃음) 근데 중독성이 생긴 거죠. 일단 제가 봐도, 화면은 정말 예쁘게 나오잖아요. 얼굴이라도 보려고 돌려보는 분도 있고, 이 광고 뭐야? 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노래 흥얼거리게 되고. (웃음) 후회는 안 해요, 그래서. 반응도 좋았고. 얼마 전에 우리나라 소매 판매 사상 최단기간 100억원 매출 올렸다 그러더라고요.
-본인은 가장 먼저 어떻게 반응했어요? 와, 정말 기분 좋다, 아니면 대중에게 고맙다, 아니면 이게 언제까지 갈까.
=셋 다인 거 같아요. 사실 자만심이 들 때도 있어요. 인간이니까 툭 터놓고 얘기하면, <왕의 남자> 잘되고 나서 드라마도 시청률 30% 나오면서 잘됐고, 광고도 터졌잖아요. 그외에도 이것저것 많이 들어오고 다들 잘됐고. 그러니까 자만심이 안 생길 수가 없어요. 어, 이거 왜 이래. 왜 내가 나오면 다 잘돼? (웃음) 그런데 그때, 다른 사람들은 다 좋아해주고 있는데, 팬들이 갑자기 일어섰어요. 이준기가 헛돌고 있다. 제일 좋아해줄 줄 알았던 사람들의 반발이 장난이 아닌 거예요. 뒤통수를 딱 맞았죠. 멍하더라고요.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나는 배우를 하려고 했고 <왕의 남자>도 잘 끝나서 정말 기뻤는데, 내가 왜 이런 자아도취에 빠져 있나. 확 무너져내리더라고요. 사실 그렇게 자만심을 가졌던 기간은 되게 짧아요. CF 터지고 나서 열흘 정도 그랬던 것 같아요. 검색어 순위는 내려가지도 않지, 세상이 다 내 것 같고. (웃음) 다행히 누구한테 욕먹기 전에 빨리 깨달은 것 같아요. 잠깐 정신이 나갔다가 다시 돌아온 거죠. (웃음) 지금 생각해도 그때 열흘 동안의 제 모습은 정말 추해 보였어요.
-배우로 죽 살아가기 위해 본인에게 가장 큰 과제는 뭘까요. 또 그 과제를 어떻게 풀어갈 건가요.
=음, 다 고민인데. 어려운 문제는 앞으로도 계속 있을 게 뻔하고, 언젠가 진짜 좌절도 있을 거예요. 지금 갖고 있는 열정, 그걸 꾸준히 가져가는 게 과제일 것 같아요. 지금도 가끔씩 그 열정을 잊을 때가 있어요. 누가 뭐래도 열정이 있어야 사람이 노력도 할 수 있는 거라고 봐요. 최근에 팬카페에 이런 글을 썼어요. 제가 언젠가 돈을 바라고, 인기를 바라고, 그런 것들에 연연해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때는 저를 과감하게 버려주시고 사랑해주지 마세요. 그때는 이준기란 녀석이 더이상 이준기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