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디네극동영화제 이후 이탈리아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크고 작은 다른 아시아영화제들이 생겨나고 있고 우디네를 통해 성숙해진 젊은이들이 운영하는 아시아영화 웹사이트들이 최근 속속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프리울리 베네치아 줄리아주에서는 1년에 중요한 영화제가 두번 열린다. 세계 3대 영화제에 속하는 베니스영화제와 우디네극동영화제이다. 우디네극동영화제는 올해로 8회를 맞이했다. 98년 홍콩영화 초대전을 기획하기 전까지는 유럽 영화감독을 초대하는 영화제였다. 당시 홍콩영화제에서 보여주었던 아시아의 힘과 유럽인의 관심은 우디네극동영화제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디네극동영화제는 다른 영화제와 다르다. 우디네가 주목하고 있는 극동아시아 지역에는 영화제를 지원, 자문, 컨설팅하는 전문가들이 나라마다 배치되어 있다. 이들은 현지사정과 경향, 흐름을 조언하는 역할을 하고 영화제에 영화를 추천한다. 각 나라의 변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컨설팅 시스템은 이 영화제가 각국의 변화나 흐름에 민감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베니스영화제 집행위원장 마르코 뮐러는 최근 몇년 이 영화제를 다녀갔다. 각국 전문가 시스템에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올해부터 베니스영화제는 우디네극동영화제 전문가들의 도움을 빌릴 계획을 세우고 있다.
한국영화는 <여고괴담4: 목소리> 등 13편
올해는 지난해에 비해 150여명이 크레딧을 더 신청했고, 지난해보다 늘어난 1천여명의 고정 관객과 우디네시를 비롯해 주변 도시에서 온 사람들로 1200석을 보유하고 있는 테아트로 누오보는 연일 매진이었다. 우디네극동영화제 위원장인 사브리나 바라체티는 “우디네에 참가하고 있는 사람들 중 30%가 스페인, 프랑스, 독일 등에서 오는 유럽 기자와 학생들이며 30%는 로마와 밀라노, 토리노 등 큰 도시에서 오는 아시아 마니아들이고 나머지 30%만이 우디네와 주변 도시의 관객이다”라고 했다. 우디네는 결코 작은 도시의 작은 영화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디네극동영화제가 아시아 제작사들에 매력을 주는 것은 아시아영화의 유럽 진출에 다리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지난 4월21일부터 29일까지 9일 동안 열린 우디네극동영화제는 중국, 홍콩, 일본, 한국, 필리핀, 타이, 대만의 72편 영화들이 소개되었고 이중에는 유럽에 처음 소개되는 영화가 30여편이나 돼 의미가 더욱 깊었다. 올해 일본의 오스카상을 휩쓴 야마자키 다카시의 <올웨이즈 3초메의 석양>(Always Sunset on Third Street)와 오타니 겐타로의 <나나>, 야마시타 노부히로의 <린다 린다 린다>를 비롯해 일본영화 8편, 타이의 코믹영화 용유스 통큰턴의 <M.A.I.D.>를 비롯한 6편, 대만의 젊은 감독 레스테 첸의 <The Heirloom> 1편, 마리웬의 <You and Me>와 양야즈우의 <러치도 물고기다>(Loach is Fish Too)를 비롯한 중국영화 5편, 와이카파이의 신작 <The Shopaholics>와 매튜 탕 감독의 <B420>를 비롯한 홍콩영화 12편, 리코 마리아 일라르데 <Acquarium>을 비롯한 필리핀영화 3편이 선보였다. 한국영화는 폐막작으로 상영된 박광현 감독의 <웰컴 투 동막골>과 최익환 감독의 <여고괴담4: 목소리>, 이석훈 감독의 <방과후 옥상> 등 13편이 선보였다.
미이케 다카시 <임프린트> 들고 방문
4월21일 있은 오프닝데이에는 미이케 다카시가 그의 영화 <임프린트>를 소개해 의의가 컸다. 미국의 <쇼타임>은 세계 호러영화의 대가들에게 13편의 호러영화를 제작케 하고 시리즈로 방영한 바 있다. 미이케 다카시의 <임프린트>도 그중 한편이다. 그러나 <쇼타임>은 잔인하다는 이유로 영화 상영을 거부했다. 이런 이유로 세간의 관심을 끌었던 <임프린트>의 미이케 다카시 감독은 영화상영 다음날 가진 기자회견에서 “몇 장면이 잔인하다는 이유로 상영을 거부했다고 알려졌는데 사실은 미국 검열제도의 문제이다”라고 말했다. “이 영화는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자기만의 성벽에 숨겨진 자신만의 비밀과 무서움, 어두움에 대항해 싸워 부수는 마력을 가졌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미이케 다카시 영화를 비롯해 호러영화 섹션을 일부러 유치한 우디네는 필리핀영화인 <Acquarium>과 대만영화인 <The Heirloom>, 한국영화인 <여고괴담4: 목소리>에 주목했다.
필리핀은 3달러면 영화 한편을 볼 수 있고 같은 돈으로 맥주 반 박스를 살 수 있다. 90년대 200편을 제작하던 영화산업이 지난해에 25편의 영화제작으로 위기 상황을 맞고 있는데, 그나마 독립영화 감독들의 활동이 활발한 가운데 우디네를 찾은 <Acquarium>을 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 영화제에 참석한 이들은 반가운 일이었다.
30년부터 70년까지 아시아 뮤지컬 총망라
우디네극동영화제는 올해 ‘아시아 싱’이라는 테마로 30년부터 70년까지의 아시아 뮤지컬을 총망라해 보여줌으로써 더욱 흥미진진해졌다. 왕톈린의 <The Wild, Wild Rose>(1960), 이원의 <Mambo Girl>(1957) 등의 홍콩 뮤지컬 5편과 마키노 마사히로의 <Singing Love Birls>(1939), 사이토 도라지로의 <Tokyo Kid> 등 일본 뮤지컬 5편, 중국, 대만, 필리핀, 타이 뮤지컬도 한편씩 선보였고 한국 뮤지컬인 한형모 감독의 <청춘 쌍곡선>(1956)도 소개됐다. 우디네는 극동아시아 뮤지컬 자료와 정보를 한데 모아 <아시아 싱>이라는 책도 발간했다.
대체적으로 아시아 뮤지컬은 할리우드 뮤지컬과 유럽의 뮤지컬을 모방하며 성장했는데 60년대에 이르러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국가산업이 성장하고 국가간의 상업, 기술 교환이 활발해지는 시기와 때를 같이하고 있다. 내부적으로는 국가의 본성을 깨닫기 시작하며 식민국가가 아닌 독립국가로서 서구 현대사회를 모방하고픈 욕망이 물밀듯 치고 올라오는 시기이기도 하다. 순진한 시골 청년이 시골에서 도시로 이주하면서 큰 도시에서 성공을 찾는 스토리가 이 시기 아시아 뮤지컬 주제로 자주 등장하는 것도 아시아 국가들의 국내외적인 상황과 맥을 같이한다.
100년이라는 찬란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중국은 다른 나라보다 더욱 활발했다. 중국 정부는 뮤지컬을 제작해 지치고 희망없는 국민들을 계몽하는 데 썼다. 59년부터 65년까지 중국 정부는 12편의 뮤지컬을 제작했다. 당시 중국은 경제적으로 불안했고 국제관계도 그리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이 시기 소비에트 연합과도 단절된 상태였다. 그래서 배고픈 국민에게 에너지를 제공하기 위해 뮤지컬을 만들었다. 당시 중국의 뮤지컬은 정부가 그들의 목적을 선전하고 경제적으로 불안한 상황을 개혁함으로써 국민을 위로, 격려하여 일터로 끌어들이기 위한 의도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반면에 일본은 전쟁 선전과 당위성을 목적으로 뮤지컬을 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상하이에서 홍콩으로 이주해온 중국민들에 의해 만들어진 홍콩 뮤지컬도 활발히 제작되었고, 필리핀은 당시 4편의 뮤지컬을 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지만 ‘아시아 싱’ 총지휘를 맡은 로저 가르시아는 “아시아 뮤지컬은 시작은 했지만 끝나지 않은 상태”라고 말했다. 올해 영화제에서 관객이 꼽은 최고 영예는 박광현 감독의 <웰컴 투 동막골>이 차지했다. 폐막작이기도 했던 <웰컴 투 동막골>의 상영 전에 박 감독은 무대인사가 끝난 뒤 동영상 휴대폰을 꺼내 ‘이 분위기를 기록하고 싶다’며 관객과 함께 촬영을 하기도 했다. 영화가 끝나고 멈출 줄 모르는 관객의 열광과 환호 속에 박 감독은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이외에도 야마자키 다카시의 <올웨이즈…>, 야마시타 노부히로의 <린다 린다 린다>가 각각 2, 3위를 차지했다. 오타니 겐타로의 <나나>와 후카라와 요시히로의 <When the Show Tent Came to My Town>, 마리웬의 <You and Me>, 이석훈 감독의 <방과후 옥상>, 박진표 감독의 <너는 내 운명>에도 우디네 관객은 박수를 보냈다. 9일 동안의 만남은 유럽 젊은이들의 아시아영화의 새로움에 대한 희망과 열정을 느끼고도 남는 시간이었다.
한국영화 초청작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2005) 민규동
<싸움의 기술>(2006) 신한솔
<6월의 일기>(2005) 임경수
<연애>(2005) 오석근
<박수칠 때 떠나라>(2005) 장진
<연애의 목적>(2005) 한재림
<사과>(2005) 강이관
<방과후 옥상>(2006) 이석훈
<흡혈형사 나도열>(2006) 이시명
<여고괴담4: 목소리>(2005) 최익환
<웰컴 투 동막골>(2005) 박광현
<광식이 동생 광태>(2005) 김현석
<너는 내 운명>(2005) 박진표
“배두나는 차갑지도, 활달하지도 않고, 안성맞춤이다”
<린다 린다 린다>의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
작은 키에 조용하고 외모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소탈한 감독이라는 인상이었다. 올해 서른인 야마시타는 ‘당신이 원하는 그것이 있다면 해라!’라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다는 영화 <린다 린다 린다>로 우디네를 찾았다. <린다 린다 린다>는 우디네 관객이 세 번째로 좋아한 영화에 꼽혔다.
-사춘기 시절 감독은 어떤 역할에 가까웠나.
=나는 영화 시작 부분에 나오는 축제를 촬영하는 사람과 비슷했다. 축제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거리를 두고 그냥 바라보는 사람이었다.-영화는 인물이나 인물이 속한 환경을 그냥 바라보기만 한다.
=감독에 의한 시각적 변형이나 강조를 전혀 추구하지 않는 편이다.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일어나는 사건, 인물을 거리를 갖고 보여주고 싶었는데, 이것은 전작에서도 그렇고 더 많은 제작비가 있다고 해도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개를 끄덕끄덕) 인물로부터 거리를 둔 것은 인물을 자연스럽게 만들고 그들을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영화 속 인물들은 차갑지도 않고 따뜻해 보이지도 않는다. 행복하지도 않고 불행하지도 않고 화가 나지도 않고 슬프게 울지도 않는다.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감독의 선택인가.
=그렇다. 나는 드라마틱한 상황을 만들지 않는다. 그것은 내 일반적 성격에서 비롯된다. 그 시절을 기억하면 화도 많이 났고 울기도 많이 했고 웃기도 많이 했다. 지금보다 훨씬 격정적이었다. 감정의 기복이 심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그 시절을 과장하고 싶지 않았다. 공연을 위해 모인 그들의 관계 변화나 그들의 생각, 있는 그대로를 보고, 보여주고 싶었다.-이제 서른인데 영화작업 동안 사춘기에 대해 새로운 것을 발견했나.
=내가 그 시기였을 때 나는 소녀들처럼 한 가지에 열중해보지 못했다. 무엇인가를 다른 사람과 함께해보지 못했다. 가장자리가 나의 자리였다. 함께 무엇을 하는 것이 아름답다. 나중에 느낀 거다. 그때 느꼈더라면 이 영화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배두나와의 경험을 들려달라.
=특별했다. 배두나는 일어를 할 줄 몰랐고 일어로 연기를 해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 연기와 연기 준비 과정이 마치 두개의 철로를 걷는 것 같아 보였다. 스탭과의 연기 준비 과정에서 오는 선과 영화 안에서 송의 역할로 나타나는 선. 처음에는 일본 배우를 쓸 생각이었는데 일본 소녀들은 뭐라고 할까, 조금 차갑다. 영화가 차가워지면 재미없을 것 같았고 그러면 활달한 배우를 찾아야 했는데 너무 활달하면 코믹영화가 돼버려서 역할 선정에 애를 먹었다. 배두나는 안성맞춤이었다.
“현장의 삶을 보여주는 것이 영화의 목적이다”
<러치도 물고기다>의 양야즈우 감독
<러치도 물고기다>(Loach is Fish Too)로 우디네를 찾은 양야즈우 감독은 TV드라마 감독으로 중국에서는 더 유명하다. “드라마로 번 돈으로 영화를 찍는다”는 그는 수다스러웠지만 듬직한 이야기꾼이었다. “영화감독으로 사회·정치문제에 책임을 느낀다”는 그는 감독으로 보이는 것, 있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때부터 영화에 뛰어들었다고 했다. <러치도 물고기다>에서 러치는 생선 이름으로, 비싼 생선을 마음놓고 먹을 수 있는 이들로부터 멸시당하는 생선이다. 중국에서는 신분이 낮은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중국 정부는 생각을 많이 하게끔 하는 영화는 좋아하지 않는다.” 이번 영화로 검열을 당하거나 삭제되지는 않았지만 양야즈우 감독은 중국 정부가 좋아하는지 좋아하지 않는지 감독들이 눈치를 보아야 한다고 했다. 중국영화의 가장 큰 문제로 그는 “영화평단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이는 스타가 없으면 성공하지 못하는 영화 시스템을 낳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 관객은 중국영화를 좋아할까? “80년대에는 다른 유흥거리가 없었다. 유일한 즐거움이 영화관 가는 것이었다. 중국영화라기보다 어떤 영화라도 마케팅이 좋으면 영화는 잘 팔린다. 영화가 좋든 안 좋든 상관없이 마케팅에 돈을 많이 들이면 가능하다는 말이다. 중국산 영화는 돈이 없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불가능했다.”
양야즈우 감독은 일하는 사람이 있는 현장에서 그들과 만나고 그들의 삶을 보여주는 것을 낙으로 삼는다. 판타지나 소설이 아닌 손으로 만져서 느껴지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찍는 것이 그의 영화인생의 목적이라고 말하는 감독은 영화 마지막에서 여주인공이 다른 노동자들에게 돈을 나누어주는 장면을 설명해달라고 하자 “중국은 얼굴을 위해 무엇이든 한다. 중국에서 얼굴은 자존심을 상징하고 얼굴을 잃는 것은 자존심을 잃는 것이다”라고 했다.
2000년 <행복을 찾아서>라는 영화로 부산영화제를 다녀간 그는 ‘영화는 관객과 만나야 한다’라는 교훈 아닌 교훈을 얻었다며 그 당시 중국 정부가 프린트를 주지 않아 한국 배급사에 팔 수 없었음을 아쉬워했다. <러치도 물고기다>는 프린트가 얼마든지 준비되어 있으니 한국에 꼭 소개하고 싶다고 전해달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