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과 피로 뒤범벅된 군복을 벗고, 잿빛 인사동의 좁은 골목을 빠져나와 여기 이병헌과 이은주가 있다. 기억의 회랑을 따라 뒷걸음쳐간 이들이 다다른 곳은 17년 전 따사로운 대학 캠퍼스.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첫사랑의 신열에 달뜬 연인의 모습으로 만난 이들은 때론 석양 아래 왈츠를 추던 인우와 태희처럼 다정했고, 짓궂게 서로 농담을 건네는 모습은 숟가락 장난을 쳐보이던 어린 연인들처럼 귀여웠다. “원래 없던 버릇인데 영화 끝내고 나니 정말 마법처럼 이러네요”라며 음료수를 마시는 이은주의 새끼손가락은 줄곧 곧게 펴져 있었고, “이렇게 눈을 덮는 앞머리를 해본 건 처음이라 자꾸 신경이 쓰이네요”라며 이병헌은 이따금 손가락을 펴서 흘러내린 머리칼을 가르마타듯 쓸어올리고 있었다.
#1 그, 그녀를 만나다
우리 언제 처음 만났지?” “<백야 3.98>할 때 아니었어요?” “맞아! 은주가 어린 심은하 역 할 때였구나. 은주는 뭐랄까, 보기도 전에 김종학 감독님이 칭찬을 너무 많이 해서, 대단한 재목이 나왔구나, 그랬지. 처음 봤을 때 느낌? 꾸미지 않았지만 그대로 예쁜 야생화 같았어. 거칠면서도 매력적인 야생화 같은 소녀.” “저는 우즈베키스탄 촬영장에서 오빠를 처음 봤어요. 병헌 오빠랑 숙소가 같았거든요. 하루는 숙소 앞 마당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멀리서 걸어오더라구요. 첫인상요? 입도 반듯, 코도 반듯, 눈도 반듯, 너무 반듯하게 생겨서 바른생활 사나이 같았어.” “이런…, 칭찬이지?”
이병헌
“흥행배우 이병헌입니다.” 지난해 청룡영화제 시상식장에서 이병헌이 던진 인사말은 충분히 오해를 살 만한 것이었다. 이후 쇼프로그램에서는 그를 “흥행배우”라고 소개하거나 그 말을 두고 놀리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그날의 문제 발언에 대해 그는 “솔직히 반항어린 말투”였다고 고백한다. “‘흥행배우’ ‘비흥행배우’가 따로 있는 건 아니잖아요? 물론 몇몇 배우는 나오는 것만으로 흥행에 많은 영향을 미치지만 영화라는 공동작업이 배우의 유명세에 흔들린다는 건 우습지 않아요?” 2000년 최고의 ‘흥행’작 <공동경비구역 JSA>를 끝내고 이병헌은 유독 ‘기분이 어떤가’하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그들의 질문 속에 ‘그간의 흥행실패에 비해…’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스크린 데뷔 6년차, <런어웨이> <누가 나를 미치게 하는가> <그들만의 세상> <지상만가> <내 마음의 풍금>까지 작품 편수나 노력에 비해 이렇다할 흥행작을 내놓지 못한 그에게 <…JSA>에 내린 찬사는 그저 기쁠 뿐 ‘우쭐’할 것이 아니었다. “매번 작품마다 최선을 다해서 임해요. 그게 돈이 되는 영화든 아니든. 단 10만명이라도 2시간 동안 내 연기를 집중해서 봐준다는 게 중요한 것 아닌가요?”. 이병헌은 <…JSA>를 함께했던 박찬욱 감독이 “<삼인조> 마니아들이 <…JSA>를 보고 기획영화 같은 거 한다고 실망하더라, 하지만 나도 돈되는 영화 못 찍어서 안 찍는 게 아니란 걸 보여주고 싶었다.”란 말이 가슴에 와닿았다고 했다. “얼마나 행복하게 작업했나, 만족스럽게 연기했느냐가 중요한 거죠. 매번 흥행결과에 너무 연연하면 평생 연기하겠어요?”
#2 사랑은 유치한 거예요
“혹시 인우와 태희가 사랑하는 모습이 좀 유치해 보인다거나, ‘닭살’스럽지는 않았어요? 난 그런 게 걱정되기도 하더라구.” “오빠, 사랑은 유치한 거예요. 저별은 나의 별 저별은 너의 별…, 그런 게 사랑 아니예요?” “음! 그런 게 사랑이구나. (웃음) 은주, 그냥 보기에 되게 어른스럽죠? 그런데 얼마나 애기 같은지 몰라요. 한번은 촬영중 쉬는 시간에 정말 심각하게 전화를 하는데, 나는 무슨 큰일난 줄 알았어. 근데, 그게 다 강아지 이야기였더라고.” “(눈흘기며) 아니예요, 정말 심각했단 말이에요. ‘콜라’라는 강아지를 사왔는데 한달도 안 돼서 죽었어요. 내가 하도 속상해 하니까 엄마가 똑같은 걸루 사다주셨거든요. 그애 이름은 까맣다고 ‘까미’였어요. 그런데 얘가 하는 짓이 콜라랑 너무 똑같은 거 있죠? 생긴 거며 내 배 위에서 자는 모양까지…. 현빈이 태희의 소울메이트였던 것처럼 어쩜 까미도 죽은 콜라의 소울메이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까미도 그만 죽어버렸어요. 봐요, 너무 심각하고 슬픈 이야기잖아요?”
이은주
누가 이은주를 차갑다고 했던가. 첫눈에 반한 남자에게 ‘어쩌면 의도’로 귀여운 ‘우연’을 만들어낼 만큼 적극적인 영화 속 인태희 그대로…. 이은주는 열정적이고 사랑스런 여자였고 ‘무절제’가 아닌 ‘최선’을 알고 있는 배우였다. 물론 우리가 얼핏 알고 있는 그는, 스물두살의 나이답지 않은 성숙함에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같이 차가운 느낌이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고등학교 때는 복도 뛰어다니며 반마다 불끄고 다닐 정도로 활달했고, 바이킹 타면 안전벨트 풀고도 서서 소리지를 정도로 겁없는 얘”였단다. 이런 명랑소녀를 얼음공주로 바꾸어 놓았던 건 <카이스트>의 구지원이었다. “처음엔 얄미우리만큼 냉정한 구지원이 너무 미워서 대본을 찢고 싶었던 적도 있어요. 그런데 1년 반 드라마를 찍다보니 조금씩 닮아가더라구요. 적어도 일할 땐 꼭 할 필요가 없는 말이면 안 하게 되고, 냉정하고 어른스럽게 행동하게 되고…. 저, 친한 사람들하고 있을 땐 안 그렇거든요.” 아직 안 보여준 것이 보여준 것보다 훨씬 많다는 이은주는 맹하고 털털한, 이른바 망가지는 역에 대해서도 두려움보다는 기대가 있다고 했다.
#3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것
“나야, 83년의 연기하면 되었지만 오빠는 대학생에서 고등학교 선생님까지,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글쎄…, 세월따라 말투나 성격, 외모 같은 건 변해도 사람의 기본은 변하지 않으니까. 기본적으로 서인우란 사람의 느낌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 사실, <번지점프를 하다> 촬영 들어가기 전에 고3 때 담임선생님을 만나러 갔어. 인우처럼 국어선생님이셨거든. 물론 만나서 그냥 사는 이야기만 하다가 돌아왔지만 그냥 보고 싶었어. 요즘 고등학생을 가르치는 그 선생님의 눈빛을, 그리고 10여년 동안 그 눈빛이 어떻게 달라져 있는지도…. 오히려 은주가 더 힘들지 않았을까?” “조신하고 수줍은 전형적인 80년대 여대생을 연기하라고 했다면 더 힘들었겠죠. 하지만 태희는 그 시절 여대생답지 않게 솔직하고 당돌하고 당당하고…, 분명한 캐릭터가 있잖아요. 캐릭터 잡는 데 있어서 <오! 수정> 때와 다른 점이라면 홍상수 감독님은 촬영장 밖에서 많이 만났고 김대승 감독님은 현장에서 주로 대화를 했죠.” (웃음)
<번지점프…>에서 인우가 17년 뒤 만난 남자 고등학생에게서 첫사랑의 체취를 맡는다는 설정은 동성애의 의심을 살 만하다. “시나리오를 읽고 이게 동성애영화냐 아니냐, 그런 부분 때문에 고심했으면 아예 한다고도 안 했을 거예요. 배우로서는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해피 투게더> 같은 영화라면 아마 못한다고 했을 걸요.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100% 스스로를 동화시키지 못할 역이라면 시작하지 않는 편이 나아요.” 갑작스런 변화에 혼란스러워하는 30대 중반의 가장이 첫사랑의 떨리는 마음으로 현빈의 어깨에 손을 올릴 때, 그것이 단지 두 남자의 ‘접촉’ 이상으로 비쳐졌다면, 혹 현빈의 어깨에 태희가 겹쳐졌다면, 그것은 모두 이병헌 덕이다.
#4 끝은 없다
“난 이번 작품만큼 롱테이크 많은 영화는 첨 봤어, 짧은 건 2∼3분, 긴 건 아마 5∼6분 넘는 것도 있었지. 키스신 때문에 마지막 열차 기다릴 때 분위기 정말 살벌했었던 거 기억나지?” “난 길게 찍는 게 편하던데. <오! 수정> 때문인가? 그거 찍을 때는 전부 다 원신 원컷이었거든요. 그래선지 컷을 잘라서 가면 감정이 끊어져서 싫어요. 긴장이 되면서도 한번에 몰입하는 게 좋아요.” “필름걱정은 안 하고? (웃음) 그런 신은 에너지 소모가 엄청 많잖아. 몇번 NG가 나고나면 나도 모르게 목소리톤이 자꾸 낮아지고, 의도적으로 목소리를 높이게 되지. 결과적으로는 좋지 않을 때도 있어. 초긴장상태로 찍게 되면 다음 촬영에 쓸 에너지를 너무 뺏기거든.”
이제 갓 스무살 고개를 넘은 여자는 모든 걸 다 태워버릴 태세였다. 낮고 흔들림 없는 마른 음성이 그녀 안의 끼를 지금껏 속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반면 이제 서른의 대열에 들어선 남자는 아직 갈길이 먼, 삶의 호흡을 이야기했다. 17년 전, 지리산 꼭대기에서 여자는 알고 남자는 몰랐던 것, 뉴질랜드 번지점프대에서 비로소 남자도 알게 된 것. 태워버리거나 뛰어내리거나, 그것이 끝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