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관객에게 싱가포르 영화의 존재감을 선명하게 심어준 <내 곁에 있어줘>(4월27일 개봉)의 에릭 쿠(41) 감독은 한국과 각별한 인연을 지닌 인물이다. 첫 장편 연출작인 <면로>(1995)부터 <12층>(1997), <내 곁에 있어줘>(2005)까지 장편 전작이 모두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받았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의 <디지털 삼인삼색>에 참여하기도 했다. 또 한국인 아내를 둔 덕에 한국 영화와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과 지식이 여느 외국 감독보다 풍성하다. 조용히 관객몰이를 하고 있는 <내 곁에 있어줘>의 무대 인사를 하기 위해 서울에 온 에릭 쿠 감독을 만났다.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를 보면서 한국 문화에 관심을 가지게 됐어요. <서편제> 이후 영화산업과 도시가 엄청나게 빨리 변화하는 걸 보고 놀랐죠. 싱가포르도 압축성장이라는 점에서는 한국과 비슷하지만 한국과 한국 영화에서는 훨씬 더 큰 에너지가 느껴져서 흥미롭습니다.” 한해 제작 편수가 4~5편에 불과한 싱가포르 영화를 세계적으로 알린 첫번째 감독인 에릭 쿠는 영화광인 어머니를 통해 영화에 눈을 떴다. 여덟살 때 어머니가 사준 비디오카메라로 영화를 찍기 시작한 그는 오스트레일리아에 유학하면서 본격적인 영화수업을 받았다.
귀국 뒤 텔레비전 광고 등을 찍다가 영화로 전업한 그는 2000년대 초 <내 곁에 있어줘>의 주요 등장인물인 테레사 첸을 우연히 어느 결혼식장 피로연에서 만나면서 이 영화를 만들게 됐다.
“자신의 존재도 모르는 한 소녀에게 푹 빠진 열세살짜리 조카를 보면서 처음 이 영화를 구상했어요. 그렇게 10대와 청년, 노년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엮어가다가 난관에 빠졌을 때 테레사 첸을 만난 거죠. 그는 식사 테이블에서 제가 영화감독이라고 소개하자 대뜸 희망에 관한 영화를 만들어달라고 주문했어요.” 테레사 첸의 개인사와 역경을 딛고 삶에 대한 긍정을 체득한 첸의 태도에 감동받은 그는 영화의 방향을 180도 바꾸게 됐다. “테레사는 이중의 장애를 안고 살지만 그의 삶은 더할 수 없이 풍요롭습니다. 관객에게 테레사가 주는 삶의 영감을 고스란히 전하기 위해서 그가 직접 쓴 자서전을 영화에 자막으로 넣은 것이죠.”
그는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도 그가 알던 비전문 배우들을 기용했다. 노년의 아버지는 어린 시절 그에게 영어를 가르쳤던 전직 공무원이고, 외로운 경비원 역은 부동산 중개업자가 연기했다. 그는 비전문 배우인 주변의 지인들을 배우로 쓰는 이유가 “그들로부터 창작의 영감을 얻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영화는 출연배우들의 삶도 바꾸어놓아 소극적 영화광이었던 아버지 역의 치우 성 칭은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고 경비원역의 싯 켕 유는 전업배우로 나섰다. 앞으로도 이처럼 계속 비전문 배우들과 영화를 만들 예정이라는 그는 인도에서 찍게 되는 차기작의 다음 작품으로 한국에서 한국인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사랑이야기를 만들고 싶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