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착은 막내 정유미였다. 화사하게 틀어올린 앞머리에 금색 핀을 꽂은 그가 미간을 약간 찡그리며 종달새처럼 조잘거린다. 어두웠던 스튜디오가 오월의 정원처럼 밝아진다. 순서대로 오기로 약속한 걸까. 두 번째로 늘씬한 공효진이 성큼성큼 들어선다. 얼굴이 CD만한 그는 소주잔을 호쾌하게 털어넣듯 툭툭 말을 건넨다. 드디어 문소리가 왔다. “컨셉이 이게 뭐야? 우리가 안 예쁘다는 거야”라고 볼멘소리로 농담하는 큰언니 앞에 사람들이 움찔한다. 그는 불만을 표시할 때도 솔직하지만, 진행도 시원시원하다. “소풍이니까 앉는 게 낫지 않을까?”라는 문소리의 제안에 <가족의 탄생> 버전 ‘풀밭 위의 점심’이 탄생한다.
“영화 찍기 전에는 언니가 진짜 무서운 줄 알았다.” 공효진의 한마디. “야, 그거 봉태규가 퍼트린 헛소문이야.” 문소리의 대답. 소품으로 쓰인 와인을 열면서 세 여자의 입담도 열렸다. “아, 맛있는 안주 가져올게.” 휑하고 사라진 문소리가 도시락통을 들고 돌아왔다. 깨가 곱게 입혀진 김 부각. 세 사람이 오물거리며 수다를 떤다. “태규씨가 문소리 언니가 제일 좋은 여배우래요.” 정유미의 한마디. “지금은 네가 제일 좋대, 나는 2번으로 밀렸다.” 문소리의 대답. “진짜 감격스러웠는데. <씨네21> 처음 표지할 때”라고 문소리가 말하자, “난 여러 명이 같이 찍어서 더 기억에 남는다”라고 공효진이 거든다. “촬영 뒤 사람들과 헤어지는 게 너무 서운했다”는 정유미의 말에 두 언니는 손사래를 치며 놀리듯 “너는 두편째라 그래”라며 키득거린다. <가족의 탄생>에서 그들은 단 한번 마주친다. 그나마 공효진은 그것도 텔레비전 화면으로. 하지만, “설악산으로 같이 놀러가요. 제주도에 무대인사하러 갈까요?”라는 정유미의 해맑은 응석이나 “얘도 친구가 좀 없나봐. 우리 과야”라는 문소리의 놀림을 보노라면 그들은 <오만과 편견>에 등장하는 딸들 같다. “옷가게 주인이기도 했던 공효진의 패션감각은 나와 하늘과 땅 차이지만, 밝고 씩씩한 외연에 어둡고 깊은 내면이 있을 듯한 점은 닮았다”는 문소리의 전언이나 “언니는 만족할 때까지 집요하게 연기하는 게 나와 다르다. 배우로서 추구하는 점이 비슷하고 궁극적으로는 언니 같은 유형의 여배우가 되고 싶다”는 공효진의 화답을 듣노라면 그런 심증은 굳어진다. “누가 됐어?”라며 서로의 출연에 촉각을 곤두세웠지만, 감독의 원래 구상대로 캐스팅된 배우들의 향연, <가족의 탄생>을 탄생시킨 세 여인이 오월의 풀밭 위를 거닐며 나눈 한때를 그림에 담았다.
즐거운 기다림을 위하여
문소리의 소풍
문소리는 “감독에게도 누차 말했던” 영화에 대한 “단 하나의 불만”부터 꺼냈다. “철없음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만은 맘에 들지 않는다. 철들도록 노력하고, 아니면 벌받든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닌가”라며. 하지만 영화를 봤다는 기자에게 “영화가 편하진 않죠? 반복적인 것 같으면서도 달라지는데, 예민하게 봐야 볼 수 있는데…”라고 되묻거나, “김태용 감독이 내가 말을 안 할 때 제일 섹시하다고 해서 미라를 실어증으로 할까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고백하는 모습에는 영화에 대한 사랑이 묻어났다. “남동생 엄태웅과 연인 같은 코드가 훨씬 많았는데 감독이 상업과 타협하는 바람에 빠졌다”고 후일담을 전하는 그가 <가족의 탄생>에 합류하게 된 것은 그의 “명확하면서도 거절 못하는 성격”의 영향이 컸다. 시나리오를 초고부터 봐온 그에게 김 감독은 이렇게 하소연했다고 한다. “미라가 관객과 함께 마음을 열고 정리하는 역할이라서 굉장히 좋은 배역 같은데, 써놓고 보니 개성도 없고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거절 못하는 문소리는 미라가 되겠노라 했다.
2006년 두편의 연극에 출연한 그는 “하도 밥을 챙겨먹고, 술을 챙겨먹어 살이 쪘”지만 “순발력과 뻔뻔함을 얻었다”고 전했다. 차기작으로 올 하반기 방송될 드라마 <태왕사신기>를 고른 문소리는 광개토대왕을 사랑하지만 운명적으로 대립하는 서기하가 돼 브라운관을 두드릴 예정이다.
<가족의 탄생> 모든 것에 긍정적인 영화. 사람을 받아들이고 마음을 여는 법을 아는 착한 여자들의 이야기.
첫 번째 에피소드에 제목을 붙인다면? <즐거운 기다림> <허밍>. 떡볶이집에선 아이들이 수업 끝나고 오길 기다리고, 집에선 동생이 돌아오길 기다리니. 또 고두심씨가 불렀던 노래를 잘 따라부르기도 하고, 혼자서 잘 중얼거리기도 하니까.
인간관계 혹은 사랑의 본질은 무엇일까? 포기하지 않는 것. 상대의 장점과 단점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 것 같다.
이별로 시작된 성장을 위하여
공효진의 소풍
김태용 감독은 “선경은 처음부터 너를 생각하고 만든 캐릭터야”라고 했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무슨 섭외를 이렇게 하는 거야”라고 답한 공효진. 속으로는 선경이 “모나고 뾰족하면서 고민스러운 캐릭터라 좋다”고 생각했다.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로 자신을 데뷔시킨 김태용 감독과의 재회도 무척 반가웠다. 매번 “언제 집에 가요?”라고 물으며 잠들기 일쑤였던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시절과는 달리 고통 속에 성장하는 <가족의 탄생>의 선경처럼 공효진도 7년차의 성숙한 배우로 변모했다. “다른 감독님이면 못할 이야기도 깊이있게 할 수 있었다”는 <가족의 탄생>에서 공효진은 “시추에이션 코미디 성격이 가미된” 1, 3부에 비해 내면적인 감정이 강조되는 모노드라마 2부를 거의 혼자서 이끌어간다. “사랑도 전쟁이다. 대적할 만한 인간을 만나서 싸워나가는 것. 그래서 오랫동안 결론을 내릴 수 없는 적수를 만나야 한다”는 도전적인 가치관을 가진 공효진이 보여주는 차분하고 성숙한 내면 연기를 보고 싶은 관객이라면 <가족의 탄생>은 근사한 대답이다.
<가족의 탄생> 남녀에 국한되지 않은 다양한 사랑 이야기를 영화적으로 유화하지 않고 날것으로 보여주는 영화. 사랑하기 때문에 상처주고 피흘리며 싸우는 이야기.
두 번째 에피소드에 제목을 붙인다면? <이별>, 엄마를 보내기 위해 이별을 준비하는 딸의 내면과 일상을 그렸으니까.
인간관계 혹은 사랑의 본질은 무엇일까? 믿음. 인간관계는 믿음을 방패삼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진심을 알 것이라고 가정하고 행동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큰 내일이 될 작은 오늘을 위하여
정유미의 소풍
<사랑니>로 주목받은 정유미는 영화 찍는 일이 마냥 즐겁다. 촬영을 마치면 한순간 삶이 무료해지고, 재미없어진단다. 그래서 촬영이 끝난 뒤에도 후반작업에 한창인 작업실을 거의 매일 찾았다. “작업실에 가면 뒤에 앉아만 있지만 그래도 재미있다. 인터뷰하는 오늘도 계속 기다렸다.” 그가 영화 촬영이 계속됐으면 좋겠다고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리는 것은 몇달을 함께 보낸 “순수하고 열정적인 ‘동료’들” 때문이다. “처음에는 떨려서 인사도 못”했던 고두심·문소리와 친해지고, 상대역 봉태규와 실제로도 서먹서먹 멀어졌다 화해하는 과정을 겪는 사이 그는 자신이 “조금 변했다”고 전했다. “다른 분들에게 어떤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콕 집어 말할 순 없지만 배우는 게 정말 많았다.”
<가족의 탄생>에서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외면하지 못해 애인을 외롭게 놔두는 채현을 연기한 정유미는 이미 차기작을 결정한 상태지만 “(작업이 끝난 게) 실감이 안 난다”며 눈을 깜박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이미 출발 신호가 떨어졌음을 잘 안다. 또 자신의 “도착지가 아직 멀리 있음”도 안다. 이것이 그가 지금 하고 있는 작품에 모든 것을 거는 이유다. 그는 작은 오늘들이 모여 큰 내일이 된다는 세상의 작은 진리를 믿는 쪽이니까.
<가족의 탄생>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 아주 특별한 무언가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서 더 특별한 영화.
세 번째 에피소드에 제목을 붙인다면? <나는 너 창피해 많이많이, 나는 너 사랑해 많이많이>, 시나리오에는 그냥 ‘채현·경석의 이야기’라고 돼 있는데 굳이 제목을 붙이자면 이 대사도 어울릴 것 같다. 3편은 사랑 이야기니까.
인간관계 혹은 사랑의 본질은 무엇일까? 모르겠다. 처음엔 사랑에 변하지 않는 본질이 있는 줄 알았다. 한데 <사랑니>와 이번 영화를 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세상에 영원한 사랑도 없고, 변치 않는 마음도 없다는 것을 깨달으니 사는 게 무의미해지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