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가루 집안이라는 표현이 있다. 뭉쳐지지 않는 콩가루의 성질에 빗대 엉망진창인 가족을 일컫는 말이다. 콩가루가 무슨 죄가 있겠냐마는 콩가루 집안이라는 말은 썩 듣기 좋은 소리가 아니다. 언뜻 콩가루의 위력을 실감하는 순간을 떠올려보면 대체로 가족이나 친척의 장례식장이다. 술기운에 힘입어 누군가 목소리를 높이면 분위기가 격앙되어 주먹다짐까지 한달음이다. 지켜보던 사람들 사이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표현. “쯧쯧, 콩가루구먼, 콩가루.” 그런데 문제는 알고 보면 다 콩가루, 라는 사실이다. 나만 그런지 모르지만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화목한 가족은 아파트 CF에서나 만날 뿐 실제로 접하긴 무척 힘들다. 있다 해도 가족사를 조금 깊이 파고들면 어딘가 말썽거리를 안고 있다. 그래서 과거 콩가루 집안이 비정상적 가족이라는 의미였다면 이젠 오히려 정상적인 가족을 뜻하는 말처럼 들린다. 하긴 핵가족이란 말 자체가 콩가루하고 비슷하게 들리지 않는가.
문제는 콩가루가 현실인데도 우리의 관념은 그걸 비정상으로 여긴다는 점이다. 가족은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이상적 틀로 현실을 멋대로 끼워맞추다보니 애꿎은 콩가루들만 계속 피해를 본다. 그렇게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차별과 배제의 규칙은 흔히 가족멜로드라마의 주축을 이룬다. 임성한 작가의 <인어아가씨>나 <하늘이시여>는 그런 점에서 유명세를 얻었다. 이 드라마들은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받으려는 콩가루의 처절한 투쟁을 그리고 있다. 콩가루에 대한 차별을 고발한다고 볼 수도 있으나 결국 드라마가 강조하는 것은 정반대다. 어떻게 해서든 정상적 가족이라는 틀에 들어가야만 행복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반면 김태용 감독의 <가족의 탄생>은 이상적 가족이라는 신화에 반기를 드는 영화다. 콩가루를 억지로 밀가루로 만드는 대신 콩가루로서 행복해지는 법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여성주의에 입각한 정치적인 선언은 아니다. <가족의 탄생>은 무언가를 주장하는 영화가 아니라 무언가를 묘사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김태용의 묘사에서 핵심은 상실감에 있다. <가족의 탄생>은 떠나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과 뒤늦은 깨달음의 정서로 만들어진 영화다. 영화 속 인물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경험을 통해 현실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찾게 된다. 어쩐지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상실의 정서를 통해 차별과 배제의 규칙을 뒤엎는 것은 두 영화에 공통된 김태용의 화법이다. 그것은 참으로 우아하고 부드러운 설득이고, 요즘 영화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매력이다. 그 점에서 <가족의 탄생>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P.S. 몇주 전 정성일 선배가 “김기덕의 <시간> 시사회를 추진해보면 어때요”라는 제안을 했다. <시간>을 보지 못해 궁금하던 터라 귀가 솔깃해졌다. <활>을 만들 때부터 언론과의 접촉을 거의 끊은 상태라 김기덕 감독이 흔쾌히 제안에 응할지 자신이 없었지만 일단 전화를 걸었다. 그는 <시간>을 개봉하는 것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있었다. 개봉해봤자 개봉에 드는 프린트 비용이나 홍보 비용 이상을 건질 수 없으리라 예상한 탓이다. 그는 극장 개봉은 안 할 생각이고 곧바로 방송사에 방영권을 팔기 위해 접촉 중이라고 했다. 시사회는 스탭과 배우들도 아직 영화를 못 본 상태라, 할 생각이었는데 마땅한 장소를 구하지 못하고 있었다고도 했다. 김기덕 감독은 개봉 전에 하는 언론 대상 시사회와 달리 <씨네21> 독자시사회라는 말에 마음을 움직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시간>의 첫 시사회를 독자시사회로 유치하게 됐다(참가 희망자는 독자면을 참조하시길). 이번 시사회는 국제영화제를 제외하고 <시간>을 극장에서 볼 유일한 기회일 가능성이 크다.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 더불어 이번 시사회를 공동주최하기로 결정한 KT&G에도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