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성 <씨네21> 표지 촬영 현장 스케치 및 인터뷰 동영상 보기
낯설었다. 조인성이 조폭, 그것도 삼류 조직의 2인자란다. 애써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건 아닐까 하는 근심이 생긴 것은 조인성이라는 이름에 흔히 덧씌우곤 하는 ‘꽃미남’이라는 얄팍한 수사 때문도, 몇몇 드라마에서 맡았던 ‘부잣집 아들’ 역할의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에게는 언제나 순수함이 뇌관처럼 존재했다. 비뚤어진 척 잔뜩 날을 세우다가도 한순간 폭발하듯 울음을 터뜨리며 가슴속 가장 여린 부분까지 무방비로 내보이고 마는 순수함. <발리에서 생긴 일>의 재민이 그랬고, <봄날>의 은섭이 그랬다. 사람들은 그 정제되지 않은 ‘선함’을 사랑했다. 떼인 돈을 받아내기 위해 노련하게 파렴치한 수단을 동원하는 <비열한 거리>의 삼류 건달 병두는 그 대척점에 놓여 있었고, 단번에 건너뛰기엔 그 거리가 멀게만 느껴졌다. 티저 예고편을 보았을 때, 의아함은 단호한 충격에 자리를 내주었다. 프레임 밖의 상대를 격렬하게 칼로 쑤시고, “잘 가십쇼, 형님”이라 나직하게 읊조리는 그의 눈빛에는 섬뜩할 정도의 ‘비열함’이 서려 있었다.
“단순한 조폭영화였다면, 절대 이 영화를 선택하지 않았을 거다. <비열한 거리>는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뒤돌아보지 않고 질주하는 청춘의 이야기다.” <발리…>에서 재민이 수정(하지원)에게 전화를 할까 말까 망설이는 장면 하나를 보고 조인성을 차승재 대표에게 추천했다는 유하 감독은 조인성을 직접 만난 자리에서 그의 눈빛에 “선함과 비열함이 공존하는 것”을 읽어냈다. 그렇게 “인생 승부를 위해 비열한 길을 걷는 조폭” 병두는 그에게로 왔다. <봄날>을 마치고 나서, 드라마의 이미지를 지워낼 수 있는 ‘쎈’ 영화를 하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를 사로잡은 것은 단순히 땀냄새로 가득한 남성적 세계가 아니었다. 인간의 욕망을 날것 그대로 그려내는 시선에서 자신의 삶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연예인이다 보니 자신의 필요에 의해 접근하는 사람이 많다. 그냥 인간 조인성으로 봐주었으면 좋겠는데, 그걸 통해 뭔가를 얻어내려 하고, 이용하려 하고. 결국 연예계도 비열한 거리다. 하지만 사실 따지고보면 누구나 다 비열한 거리에 살고 있는 것 아닌가.”
<마들렌> <클래식> <남남북녀> 세편의 영화에 출연했지만, 한번도 촬영 50회차를 넘겨본 적 없던 조인성은 <비열한 거리>로 100회를 찍었고, 사실상 거의 모든 장면에 등장했다. 전신을 감싸는 용문신은 해당 신을 촬영할 때마다 8시간에 걸쳐 그려넣은 것이다. 동작 하나하나에 사실성을 불어넣기 위해 조폭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양팔을 굽힌 채 어깨를 들어올리며) 조폭들이 이런 동작을 하는 이유는 정말 양복이 껴서 그런 거라고 하더라. 머리가 짧은 이유는 싸울 때 머리카락을 잡히면 안 되기 때문이고. 굳이 뭔가를 얻어내려 하기보다는 그들의 생활방식 자체를 느껴보려고 했다.” 전라도 사투리를 입에 붙이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막싸움’에 가까운 액션을 소화해내는 것은 더욱 녹록지 않았다. “화려하고 멋들어진 액션이 아니라 리얼리티를 지향하는 액션이다. 동작이 감정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하고, 감정에 맞춰서 합을 짰다. 요령을 모르는 게 문제였다. 어떤 각도와 어떤 스피드로 때려야 하는지에 대한 감각이 없어서, 정말 냅다 때리고 냅다 맞았다.”
<비열한 거리>가 전파를 타기 시작했을 때부터 매체들은 앞다투어 조인성의 ‘변신’에 목청을 높여왔다. 정작 영화 시사는 한번도 열리지 않았는데 ‘호연’이라는 단어가 인터넷을 떠도는가 하면, “꽃미남을 벗고 남자로 태어나다”, “스타에서 진정한 배우로 거듭나다” 식의 호들갑이 난무했다. 하지만 조인성 자신은 단순히 ‘변신’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에도 인색하다. “그럼 내가 언제는 남자 아니었나. (웃음) 건방진 얘기일 수도 있지만, 나는 항상 내가 배우라고 생각하고 연기해왔고 이 작품을 해서 배우로서 다시 도약을 하겠다는 식으로 생각하진 않았다. 작품이 좋았고, 하고 싶었던 역할이기 때문에 선택한 것뿐이다.” 날이 선 듯한 그의 대답 이면에는 너무나 쉽게 배우의 미래를 점치는 언론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이 자리하고 있다. 불과 3년 전, 영화 <남남북녀>로 조인성은 한 월간지가 뽑은 그해 ‘최악의 배우’로 선정됐다. “다시는 연기하지 말라”는 가시 돋친 말들이 쏟아졌다. 그때 그의 나이 불과 스물세살이었다. “그 직후에 너무 아이러니하게도 <발리…>가 터졌다. 최우수 연기자상을 주더라. 바로 얼마 전까지 그렇게 연기하지 말라고 하더니. 나는 아직 젊다. 배울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데, 섣부른 판단을 내리지 말아달라. 내가 바라는 건 그거 하나다.”
<아스팔트 사나이>의 정우성을 보며 “나도 한번 저렇게 멋지게 TV에 나와보고 싶다”며 막연한 꿈을 꾸던 그는 동경하던 자리에 올라섰지만, 스스로를 “평범하다”고 말한다. 10년 넘게 살아온 동네에서 벗어나길 싫어해 아직도 강남 가는 것이 어색하고, 일을 하지 않는 날이면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아침 겸 점심으로 ‘짱개’를 시켜먹는 그의 일상은 배우가 되기 전과 별반 다름이 없다. 하지만 학창 시절 아련한 동경이 채우고 있던 공간에는 이제 연기에 대한 진한 애정이 자리를 잡았다. 마음에 드는 작품을 하나만 꼽아보라는 말에 데뷔작 <학교Ⅲ>부터 <비열한 거리>까지 모든 작품을 하나하나 언급하며 “전부 다 놓칠 수 없는 경험이었음”을 또박또박 설명하는 그의 목소리는 연기 자체와 사랑에 빠진 자의 뜨거운 애정 고백 같다. “10타수 10안타라는 건 원래 불가능한 거다. 이승엽 선수의 타율이 4할이다. 모든 작품을 다 성공하진 못했지만, 조인성이란 배우, 지금까지 잘해오지 않았나. 지켜봐달라. 점차 완성을 향해갈 테니.”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홈런을 뽑아내는 타력은 아직 갖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선구안은 점점 더 날카로워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