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정성일 추천작 <서부의 사나이> 상영
2006-06-08
글 : 문석

시네마테크 부산은 6월의 ‘수요시네클럽’으로 영화평론가 정성일씨가 추천한 <서부의 사나이>를 6월21일 세차례 상영한다. 안소니 만 감독의 1958년작인 <서부의 사나이>는 게리 쿠퍼의 어둡고 음울한 액션이 두드러지는 작품으로 안소니 만의 마지막 서부극이기도 하다. 정성일씨는 이 영화가 “서부극의 끝”이라고 일컬으며 추천하고 있다. 장 뤽 고다르 감독 또한 <서부의 사나이>를 그해의 영화로 꼽으며 “서부극의 재발명”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상영은 오전 11시30분, 오후 2시, 오후 4시30분, 오후 7시, 모두 네차례이며 오후 7시에는 특별강연이 열릴 예정이다. 예매는 6월13일부터 시작된다.

정성일씨의 추천사 전문

“짐 키츠는 단언하고 있다. 미국이 문화예술에서 발명한 것은 재즈와 서부극뿐이라고. 나도 동의한다. 문제는 그 예술적 발명이 20세기의 신화가 되었다는 것이다. 서부극은 다른 장르와 달리 그 자체가 영화적이라는 표현과 동일하다. 게다가 서부극은 오직 미국에서만 성립 가능한 장르이다. 그건 마치 재즈가 미국에서만 성립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걸 유럽에서 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스파게티 웨스턴. 혹은 ECM 재즈. 하지만 그건 일종의 유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서부극을 이데올로기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서부극의 위대함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영화적 순수함이라는 말을 끝내 이해하지 못할 수밖에 없다. 서부극의 역사는 고전 영화문법이 세워지는 과정이었으며, 영화에서의 가장 순수한 스펙터클의 순간을 만들어냈다. 그러므로 영화의 순수한 기쁨을 잊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든 한 달에 한 번 이상은 서부극을 보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영화를 보는 과정은 자꾸만 그 기쁨을 망각하는 반복 학습의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본다는 그 자체의 기쁨을 잊으면 안 된다. 거기에 자꾸만 다른 이유를 대서 즐거워지는 것은 자기 최면의 기만이다.

그렇다면 질문할 수밖에 없다. 그 수많은 서부극 중에서 무슨 영화를 볼 것인가? 물론 그 중 최고의 영화는 존 포드의 <역마차>이다. 나는 차라리 서부극은 결국 <역마차>라고 단언하고 싶다. 모순된 말이긴 하지만 존 포드의 최고걸작은 <수색자>이지만, 서부극의 최고걸작은 존 포드의 <역마차>이다. 그렇다면 서부극의 끝은 어디인가? 나는 그걸 안소니 만의 <서부의 사나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이후에 수많은 서부극이 나왔다. 심지어 존 포드의 <리버티 발란스를 쏜 사나이>도 있다. 셀지오 레오네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도 있다. 샘 페킨파의 <와일드 번치>도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용서받지 못한 자>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 그건 모두 후일담이다. 안소니 만은 여기서 모든 영웅 신화를 끝낸다. 도적떼들의 친족관계. 그 안에서 부활의 신화를 다시 쓰려는 노력은 황량한 서부를 보여주는 시네마스코프의 풍경 속에서 절망적인 시적 몸짓을 보여준다. 특히 이제는 노쇠한 57세의 게리 쿠퍼의 저 느릿느릿 움직이는 육신의 고단함. 그 게리 쿠퍼가 걸어가는 모습을 따라가는 안소니 만이 그저 아무렇지도 않게 붙잡은 풍경들은 타르코프스키의 장면들보다, 앙겔로풀로스보다, 키아로스타미보다 훨씬 영화적이다. 이를테면 마지막에 2.35대 1의 화면에 담긴 텅 빈 마을 풍경들을 보라. 거기서 그저 크레인으로 슬쩍 한번 움직였을 뿐인데도 그 공간은 거의 완전한 하나의 우주적 질서를 획득한다. 그런 다음 이 서부극의 신화적 공간은 어느 새 마치 다른 혹성의 다른 공간, 그러나 결국은 어느 별에서 시작해도 같은 결론의 신화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는 듯한 체념의 제스처를 보여주는 카메라의 운동을 한껏 펼쳐 보인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순간 자살하는 것처럼 보이는 마지막 대결의 순간 총에 맞아 쓰러지는 아버지의 그 황홀한 몸짓은 내가 알고 있는 그 모든 악당 중에서 가장 우아한 몸짓으로 마치 승천이라도 하듯, 우리에게 미처 하지 못한 그 어떤 말을 그 자신의 몸으로 보여주듯, 그 망설이는 듯한 자세로, 언덕에서 굴러 떨어진다. 이런 멋진 장면은 존 포드도, 하워드 혹스도, 윌리엄 A 웰만도, 라울 월쉬도, 니콜라스 레이도, 킹 비더도, 델마 데이비스도, 버드 버티쳐도 만들어낸 적이 없다. 그 영원과도 같은 순간. 나는 바로 그 순간을 당신들과 함께 다시 맛보면서 영화가 주는 그 순수한 즐거움을 되살리기 위해서 이 영화를 선택했다. 나는 이런 순간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 순간, 우리 함께 그 자리에서 숨을 멈추고 그 장면의 우주적 행복의 기적을 축복하자. 이런 순간, 나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쇼트는 항상 영회보다 위대하다. 왜냐하면 영화는 세상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담으려고 하지만 쇼트는 언제나 그 자체로 하나의 완결된 우주이기 때문이다. 세상과 우주의 대결, 혹은 그 사이의 중재의 주름.”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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