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한겹 벗길 때마다 반짝인다, <비열한 거리> 진구
2006-06-26
글 : 이종도
사진 : 서지형 (스틸기사)

자고 일어났더니 선물이 도착했다. <비열한 거리>가 관객에게 준 깜짝선물은 무엇보다 진구였다. 포털사이트에서 진구의 이병헌 흉내가 검색어 1위로 오른 건 사소한 덤이었다. <올인>에서 이병헌의 아역을 연기한 뒤로 줄기차게 오디션에서 떨어졌던 그였다. ‘해병대 머리로 자르고 오라’던 TV PD가 ‘자른 머리가 마음에 안 든다’며 캐스팅에서 빼는 일화는 그의 일상이었다. 어제의 오디션 낙방 전문 배우가 무수한 스타들의 별자리에 자신의 이름을 올린 것이다. 의리의 화신처럼 ‘형님이 가면 가것습니다’ 하고 병두(조인성)를 따라가는 종수(진구)의 굳은 눈매와 신의를 지킬 것 같은 앙다문 입술은, 비열하고 비루한 조폭들의 거리에서 그나마 별처럼 반짝거릴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실 그건 겉모습일 뿐이다. 영화 속 주인공인 병두와 민호(남궁민) 못지않게 종수는 몇겹으로 둘러싸인 캐릭터다. 그리고 진구는 그 몇겹의 알 수 없는 속내로 관객의 뒤통수를 친다. 병두가 민호에게 “이놈이 웃으면서 칼침 보는 놈이야, 이놈이”라고 소개할 때도, 종수 후배 하마가 “종수 형님 어저께 연속극 봄서 엄청 울든디요”라고 고자질할 때도 그저 그런 줄로만 알았다. 우리가 알고는 있으나, 미처 몰랐던, 또는 알기를 두려워했던 진실을 진구는 전달한다. 인간은 이중적인 존재라는 것을. 그것도 매우 충격적으로.

“병두와 하마 얘기 모두 다 맞는 얘기예요. 나도 그렇게 이중적이에요. 그러니 배우 안 했으면 아주 이상한 사람이었겠죠.” 진구는 ‘발견’되기 전에도 이런 몇겹의 층을 지닌 끼와 내공의 소유자였다. 다만 우리가 뒤늦게 알아차렸을 뿐이다. 차분한 표정으로 독기를 품는다는 점에서도 종수와 진구는 닮았다. 진구가 꼽은 가장 어려웠던 장면은 민호를 땅에 묻고 담배를 피우며 협박하는 장면이다. 촬영 일주일 전부터 밥을 못 먹고 얼굴이 팅팅 부어올랐다고 했다. 그런 고생담을 과장할 법도 한데 남 얘기하듯 한다. 화면에서 숱하게 오디션에 떨어지면서도 ‘나보다 앞서나간 후배들을 따라잡겠다’는 자신감으로 버텼다고 하는데, 자신의 고통을 주위에 별 내색을 안 하는 과인 것 같다.

씩씩하게 할 말은 다 하는 모습이 갓 임관한 장교처럼 보인다. 여자친구보다 남자친구가 더 많을 것 같다고 하자, “형들이 더 좋아한다”고 한다. “여자들은 제가 정을 안 준다고 실망해요. 전 이기적이라 좁고 깊게 사귀어요.” 얼마 전까지 이병헌이 자신의 롤 모델이라고 말하고 다녔는데 이제는 이병헌을 따라잡는 게 목표라고 한다. 이런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고등학교 때 연극반 활동을 했지만 유명무실해서 연극을 실제로 접하지는 않았다. 대학에서도 광고를 전공했다. 그는 헌병으로 근무하면서 배우의 길을 걷겠노라고 다짐했다. 제대 뒤 무작정 연기학원에 들어갔다. 듣고 보면 생각없는 연기지망생의 한줄짜리 이력서 같지만, 그 뒤 그의 이력서는 생채기와 피와 땀으로 얼룩져 있다. 혹시 배우의 끼는 촬영감독인 아버지(진영호)에게 무심결에 건네받은 것일까. 무섭고 엄한 아버지는 VIP 시사회에서 “조연이 그렇게 튀면 안 된다”는 ‘독한 칭찬’을 전했다.

오랫동안 뇌리에 남을 악역 연기가 차후 그에게 고정된 이미지로 남지는 않을까. 진구는 ‘하기 나름’이라며 <논스톱5>에서 코믹하고 멍청한 바보로 찍혔는데 이렇게 선이 굵게 바뀌지 않았느냐며 반문한다. 자고 일어나 벌어진 야단스러운 상황들에 대해서 이제 그는 적응이 된 듯하다. 주위의 환호에 대해서는 “처음에 멍했다”고 떠올린다. 이제는 자신에게 ‘왜 그랬느냐’며 따지는 중년 여성 관객을 “현실과 영화를 혼동할 정도로 몰입해서 본 최고의 관객”으로 꼽는 여유를 보인다. 사실 그 환호를 좀더 일찍 받을 수도 있었다. 만약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에서 유하 감독과 함께했던 아버지의 인연으로 <말죽거리 잔혹사>에 들어갔다면 어떻게 됐을까. 우리는 진구를 조금 늦게 선물로 받았지만, 그 선물은 오랫동안 기다리던 터라 기쁨이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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