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하 감독의 네 번째 영화 <비열한 거리>는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나 결국 비참한 죽음을 맞고 마는 한 인간의 삶을 따라가고 있다. 그 중심에 선 삼류 조폭이 조인성에게 떨어졌다. 사랑에 빠져 허우적대는 부잣집 도련님이 건달 역이라니. 하지만 조인성은 <비열한 거리>를 통해 부잣집 도련님의 전형에서 벗어나 조폭을 매력적으로 소화해냈고, 이전 영화들과 굵은 선을 그어버렸다. 여기서 잠깐, 조인성의 행보와 겹쳐지는 인물이 떠오르지 않는가? 바로 유하 감독의 세 번째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의 주인공인 권상우다. 권상우 역시 폭력이 판치는 1970년대 학교를 다룬 <말죽거리 잔혹사>에 출연, 철딱서니 없는 동갑내기의 모습에서 벗어나 사회에 대한 분노를 폭발시키는 고등학생 역으로 좋은 평을 받았다.
물론, 그들이 똑같지는 않다. 권상우는 76년생인 반면, 조인성은 81년생. 비슷해 보이는 이 배우들의 나이는 5년이나 차이가 난다. 또 하나. 권상우는 <말죽거리 잔혹사> 이후 <신부수업> <야수> <청춘만화>까지 지그재그로 걸어가는 듯 어지러운 변신을 보여주고 있지만, 조인성은 지금 막 <비열한 거리>에서 벗어난 상태. 그리고 더 있다면? 그들을 비교한 다음 글에서 찾을 수 있다.
<비열한 거리>의 조인성
<비열한 거리>의 병두(조인성)는 돌아서려는 여자를 불러 세워 기습적으로 입술을 훔칠 만큼 열정적이다.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그의 두 어깨는 더없이 높고 든든해 보인다. 하지만 그는 가족이라는 아킬레스건 앞에서 무방비 상태가 될 만큼 약한 남자이기도 하다. 그는 여자에게는 달콤한 연인, 어머니에게는 둘도 없는 효자, 동생들에게는 든든한 오빠 혹은 형인 반면, 앞길을 가로막는 상대에게는 잔인한 적일 뿐이다. 병두가 살고 있는 ‘비열한 거리’에는 지켜야 할 대상과 없애야 할 대상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위로 올라가려던 그는 점차 헤어나올 수 없는 함정 속으로 빠져든다. 그것은 병두가 사는 곳이 ‘비열한 거리’이기 때문이며, 동시에 그의 눈이 이미 사랑과 가족으로 어두워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말죽거리 잔혹사>의 권상우
<말죽거리 잔혹사>의 현수(권상우)는 숫기 없는 고등학생이다. 그는 자신을 노리는 상대의 시선을 피하려고만 든다. 어떤 이들은 그를 겁쟁이라고 부르겠지만, 사실 그가 겁이 나서 싸우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그를 무시하는 다른 아이들을 때려눕히고도 남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다. 현수가 싸우지 않는 건 섣부른 싸움이 얼마나 괴로운 결과를 불러일으킬지 알기 때문이다. 어느 날 버스에서 만난 여고생을 좋아하게 되고, 그녀로 인해 실연의 상처를 겪으면서 그의 일상에 변화가 생긴다. 그리고 선도부장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친구가 학교를 떠나자 그는 한순간에 참고 있는 모든 것을 터뜨린다. 수줍은 소년이 격렬한 감정의 변화를 표출하는 순간 그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매력/ 가녀린 순수함 vs 대립적 이미지의 공존
조인성은 초식동물의 눈을 가졌다. 그는 <비열한 거리>에서 욕설을 내뱉고 싸움을 하고 칼로 사람을 찌르지만, 예의 선한 눈망울은 그러한 행동들이 생의 비애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처럼 보이도록 만든다. 관객은 조인성의 눈에 몰입한다. 그가 눈썹을 일그러뜨린 채 상대를 위협할 때(<발리에서 생긴 일>), 혹은 눈가를 환하게 밝히며 웃거나(<별을 쏘다> <마들렌>) 눈물을 글썽이며 사랑을 구걸할 때(<봄날>) 그의 눈에서 엿보이는 진실한 표정들은 가장 먼저 관객을 압도한다. 소년 같은 여린 신체는 눈 다음으로 매력적인 부분이다. 늘씬한 몸매의 소유자인 조인성은 유난히 긴 팔다리로 지녔고, 때문에 실연의 상처나 싸움의 패배로 어깨를 늘어뜨린 가녀린 소년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영원히 소년으로 남을 아도니스처럼 그의 신체에는 쉽게 훼손할 수 없는 순수함이 있다.
메트로섹슈얼, 위버섹슈얼…. 현대사회에 생겨난 새로운 남성상을 지칭하는 명사들. 권상우는 그러한 단어에 딱 들어맞는 독특한 신체를 지녔다. 그의 몸은 더없이 마초적인 움직임(<야수> <말죽거리 잔혹사>) 속에 신성이 부여하는 순결함(<신부수업>)이나 자연스레 우러나오는 동갑내기의 장난기(<동갑내기 과외하기> <청춘만화>)를 담고 있다. 폭넓은 변주가 가능한 그의 신체는 동시에 섹슈얼한 매력도 풍긴다. 수줍은 미소가 잘 어울리는 하얀 얼굴에서 어느 순간 어른 남자의 섹시함이 드러나는 것은 그 때문. <천국의 계단>의 샤워신은, 그래서 유명하다. 울 것 같은 표정, 촉촉하게 젖은 속눈썹과 붉은 입술은 보는 이의 심장을 얼얼하게 만드는 매력을 발휘했다. 권상우는 한번에 파악할 수 없는 대립적인 이미지로 관객을 유혹한다.
사랑/ 거부당하는 슬픈 사랑 vs 솔직하고 굳건한 사랑
“다른 건 다 참겠는데… 네가 화내는 것도 참겠는데… 네가 날 외면하는 건 못 참겠어. 그러니까 아무 데도 가지 말고 기다려. 다 버리고 데리러 올게.”(<발리에서 생긴 일>)
조인성은 줄곧 여성에게 버림당하는 것을 두려워하며 눈물을 떨어뜨렸다. 그의 눈물은 마녀의 미약처럼 위험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로 인해 그를 거부했던 상대 여성은 결국 마법처럼 그를 사랑하게 되거나(<봄날>) 저주처럼 그와 함께 죽음에 이르렀다(<발리에서 생긴 일>). <비열한 거리>에서 조인성은 사랑하는 여인을 벽쪽으로 밀어붙인 채 입맞춤을 한다. 하지만 관객의 기억 속에 남는 것은, 입맞춤의 황홀함보다 “네가 싫다면 건달 짓을 하지 않을 테니 떠나지 말아”달라는 애절한 대사다. 전형적인 미남형 배우인 조인성이 주로 사랑을 거부당하는 역할을 맡았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그것이 조인성이 나오는 멜로물이 인기를 끄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관객은 그가 눈물을 흘릴 때 몸이 달아오를 정도의 강렬한 슬픔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같은 슬픔의 쾌감은 때로 그의 미소에서 얻을 수 있는 행복감을 능가한다.
“옛날에 한 미친 화가가 있었는데 여자 집안에서 서로 못 만나게 하니까 그 화가가 이렇게 말했대. 그 여자를 만나게 해주세요. 내가 양초에 손을 얹고 버틸 수 있는 시간만큼.”(<말죽거리 잔혹사>)
권상우는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사랑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굳은 믿음으로 상대와의 결혼을 감행하는가 하면(<천국의 계단>), 비극적인 사랑의 주인공이 돼 총에 맞은 채 죽어갔다(<슬픈 연가>). 줄곧 껄렁대며 폼 잡다가 불쑥 수줍은 선물을 내밀 정도로 솔직했던 반면(<동갑내기 과외하기>) 갑자기 다가온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허둥대거나(<청춘만화>), 말괄량이 소녀를 만나 신을 향한 것과는 다른 종류의 사랑으로 힘들어하기도 했다(<신부수업>). 친구를 선택한 소녀를 끝까지 지켜보던 소년의 시선처럼(<말죽거리 잔혹사>) 권상우의 사랑은 항상 다정하고 따뜻하며 굳건했다. 그가 터프한 인물을 주로 연기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상한 조합이라고 생각할 만도 하다. 하지만 그의 거친 캐릭터들은 사랑 앞에서 더없이 온순해졌고, 그의 적이 사랑을 무기 삼아 협박할 때 그는 항상 목숨을 던질 준비가 돼 있었다. 권상우식 사랑은 솔직했기에 항상 눈길을 끌었다.
싸움/ 살아남기위한 싸움 vs 분노와 슬픔의 싸움
<비열한 거리>의 병두(조인성)는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 싸워야 하고, 그러한 개싸움 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화려하고 멋들어진 액션이 아니라 리얼리티를 지향하는 액션이다. 동작이 감정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하고, 감정에 맞춰서 합을 짰다.” 조인성의 말처럼 <비열한 거리>는 서로 뒤엉켜 물고 때리고 베는 난장판에서 벌어지는, 그야말로 ‘날액션’을 보여준다. 개싸움보다 더한 날것도 있다. 병두가 상철(윤제문)을 작업하는 장면이 바로 그것. 황 회장(천호장)을 스폰서로 잡기 위해, 아니 그보다 죽지 않기 위해 병두는 칼을 잡는다. 상철이 칼에 찔리는 장면은, <친구>에서 동수(장동건)가 “마이 뭇따 아이가”를 내뱉으며 죽어갔던 것만큼 슬프지는 않다. 하지만 그보다 더 비장하다. 죽음의 공포로 크게 벌어진 상철의 눈이 어느 순간 병두의 눈과 마주치기 때문이다.
조인성은 이전까지 브라운관이나 스크린 속에서 함부로 주먹을 휘두르지 않았기에, <비열한 거리>에서 각목을 휘두르는 그의 몸놀림이 낯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동작에 사실성을 불어넣기 위해 조폭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는 조인성의 노력이 통했기 때문인지, 어느 순간 병두에게서 상대의 숨통을 끊기 위해 목을 잡고 늘어지는 육식동물의 눈빛이 엿보인다.
현수(권상우)의 우상은 이소룡이다. 작은 키와 다부진 몸매의 소유자인 이소룡은 스크린 속에서 쌍절곤을 휘두르며 가차없이 적을 처단했다. <말죽거리 잔혹사>의 전반부, 카메라는 이소룡을 스승으로 둔 현수의 절제된 몸 사위를 몇번 훑어내린다. 하지만 현실 속 싸움은 대련과 다르다. 죽을힘을 다해 덤벼드는 상대를 가볍게 처치하기란 불가능한 일. 그런 탓에 옥상에서 벌어지는 싸움은 멋지기보다 비루하고 처절하다. “대한민국 학교 좆까라 그래!” 현수는 영화 속 절제된 이소룡의 액션을 따라하려 애씀에도, 정작 그의 싸움은 <비열한 거리>에서 병두를 쓰러뜨리는 조폭들의 그것만큼 날것이다.
권상우는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동갑내기 과외하기>의 불량학생을 벗어던졌다. 식판으로 적의 얼굴을 가격하고 지포라이터 하나로 상대를 압도하던 싸움 짱은 어느새 풀 죽은 고등학생으로 변해 있다. 현수는 그를 노려보는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이지만, 매일 단련했던 교복 속의 근육은 언젠가 폭발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순간 뇌관을 제거한 지뢰처럼 억눌렀던 분노와 슬픔이 남김없이 드러난다.
Before & After/ 큰 보폭의 한걸음 vs. 힘껏이어온 내달림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눈물을 쏟거나 행패를 부리는 부잣집 아들(<봄날> <발리에서 생긴 일>) 혹은 매너 좋고 잘생긴 전형적인 킹카(<논스톱2>). 드라마 속에서 조인성이 맡았던 인물들은 대부분 두 가지 역할의 변형이었다. 반면, 진지하고 어른스러운 연극반 선배 상민(<클래식>), 바람둥이 남한 대학생 철수(<남남북녀>), 계약연애를 하는 파릇파릇한 청년 지석(<마들렌>)처럼 영화 속 조인성은 조금씩 다른 가능성을 보여왔다. 하지만 그의 보폭은 여전히 느렸고 제자리걸음을 하는 그에게 야유를 보내는 사람도 생겼다. “나는 아직 젊다. 배울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데, 섣부른 판단을 내리지 말라. 내가 바라는 건 그거 하나다.” 천천히 걸어가던 조인성은 <비열한 거리>로 한 걸음 크게 내디뎠다. 그는 빠르지는 않지만 결국 멀리까지 도달할 것임을, 스스로 알고 있다.
권상우의 행적을 죽 읊어가자면 당황스럽기 그지없다. 소꿉친구를 놀려먹는 철없는 동네 총각 지환(<청춘만화>)과 밥 먹듯 과외선생 바꿔치우는 불량학생 지훈(<동갑내기 과외하기>)은 그나마 닮은꼴이다. 외모도, 심성도 번듯한 재벌집 외아들 차송주(<천국의 계단>)에서부터, 불우한 음악가 서준영(<슬픈 연가>), 소심한 고등학생 현수(<말죽거리 잔혹사>), 깔끔쟁이 신학생 규식(<신부수업>), 다혈질 형사 장도영(<야수>)까지. 권상우는 때론 코믹하다가 또 때론 비장하기도 했다. “연기 변신을 잘하는 배우들이 부럽고, 아무리 스타여도 한 이미지로 10년 넘게 먹고사는 사람들 짜증나요. 개인적으로 연기든 뭐든 똑같은 일 반복하는 거 싫증 잘 내기도 하고요.” 누군가는 권상우가 <말죽거리 잔혹사>를 통해 도약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틀린 말이다. 권상우는 처음부터 힘껏 내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