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비운의 무사들, 모래바람 위에 무협의 서사시를 쓰다
2001-09-04

■ Story

1375년 원말 명초의 중국대륙, 고려는 명에 수차례 사신단을 파견한다. 용호군의 젊은 장군 최정(주진모)이 호위하는 사신단도 난징 근처에 이르지만 그들을 맞은 것은 고려를 적성국으로 취급하는 명의 군대였다. 간첩혐의를 받은 사신단 일행은 명의 포로가 되어 귀양길에 오르는데 사막을 가로지르던 행렬 앞에 원의 기병들이 나타난다. 그들은 사신단을 호송하던 명의 군대를 몰살시킨 뒤 고려인들을 놓아준다. 사막에 버려진 일행은 굶주림에 지쳐 도착한 객잔에서 또다른 원의 기병들과 마주친다. 그들은 명의 황제가 된 주원장의 딸 부용 공주(장쯔이)를 납치해 북쪽으로 가던 중이었다. 최정은 공주를 구해 난징으로 돌아가면 명이 고려에 품었던 오해를 불식시킬 수 있다고 판단, 그녀를 구하기로 결심한다. 그날 밤 사신단에 끼어 있던 노비 여솔(정우성)도 죽은 주인의 시신을 끌고 객잔에 도착하지만 시신에 침을 뱉는 아랍인을 베어버린 뒤 원의 포로가 된다. 최정은 충직한 부관 가남(박정학)과 경험 많은 하급무사 진립(안성기)의 도움을 받아 공주를 구출하는 전투에 나선다. 완벽한 승리를 거둔 고려인 일행은 공주를 구하는 데 성공하지만 그들에게 닥칠 위험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 Review 무협영화는 대륙인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장르다. 그것은 멀리 <삼국지연의>나 <수호지>처럼 공식적인 역사에 기초해 기의 운용에 기반한 한의학과 도교적 세계관으로 살과 뼈를 보탠 중국 역사소설에 기원을 두고 있지만 근자에 들어서는 홍콩의 와이어액션과 서구의 첨단 컴퓨터그래픽이 융화된 스펙터클로 자리잡았다. 기이하게도 <무사>를 보면 무협장르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삼국지연의>의 몇몇 대목이 떠오른다. 조조가 관우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아군의 희생을 감수한 얘기, 유비가 뒤따르는 민초를 뿌리치지 못해 조조의 군사들에게 위협받던 얘기, 조자룡이 유비의 아들을 갑옷 속에 숨기고 죽을 힘을 다해 싸웠던 얘기 등. <무사>는 20세기에 쓰여진 무협소설에 뿌리를 둔 <동방불패>나 <와호장룡>과 달리 수백년 넘게 구전되고 각색됐던 전쟁 무용담을 들려준다. 그것은 이 영화가 택한 사실적 액션과 연관된다. <무사>에는 벽을 바닥처럼 밟고 뛰어넘는 놀라운 경공술도, 칼과 손바닥으로 바람을 일으키는 삼갑자 내공의 고수도 등장하지 않는다. 화살이 목줄기를 꿰뚫을 때 피가 폭발하듯 품어져 나오고 칼과 창이 상대의 목과 손을 단숨에 베어버린다. <브레이브하트>나 <글래디에이터>에서 목격했던 잔인하고 생생한 폭력의 이미지가 <무사>의 분위기를 기존 무협영화와 다른 어떤 것으로 만들어놓는다.

<무사>가 택한 서사방식은 그런 면에서 흥미롭다. <글래디에이터> 스타일의 액션이 무협영화의 전형성을 배반하는 한편 이야기는 <글래디에이터>처럼 한 사람의 영웅을 신화화하길 완강히 거부한다. <무사>에서 가장 매력적인 인물은 정우성이 맡은 창술의 달인 여솔도, 주진모가 맡은 젊은 장군 최정도, 장쯔이가 맡은 부용 공주도 아니다. 영화에서 진정 ‘무사의 길’을 제시하는 인물은 안성기가 맡은 노련한 하급무사 진립, 박정학이 맡은 충성스런 부관 가남, 중국배우 우영광이 맡은 원의 장수 람불화이다. 그들은 정말 <삼국지연의>에서 튀어나온 인물들처럼 지략에 능하면서 무예도 뛰어난 인물들이지만 무엇보다 돋보이는 건 이들의 얼굴에 드리워진 삶의 주름과 그늘이다. 진립이 유연함으로 젊은 장군의 오만함을 제압할 때, 가남이 위기에 처한 상관을 구하러 달려나갈 때, 람불화가 몽고제국의 몰락을 예견할 때 카메라는 그들의 당당함과 의연함에 경의를 표한다. “전 결과를 알고 행동할 만큼 똑똑한 사람이 못 됩니다”라고 말하며 굳게 입술을 다무는 진립과 “전쟁을 끝낸다”는 한마디 말을 내뱉고 마지막 전투에 임하는 람불화의 무표정에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원과 고려의 비운이 깃들어 있다. 그에 비하면 여솔, 부용 공주, 최정의 삼각관계는 뻣뻣하다. 최정이 공주를 바라보는 순간의 고속촬영, 공주가 여솔을 흘끗 보는 시선, 여솔이 그녀의 버릇없음에 화내는 장면 등으로 표현된 <무사>의 멜로드라마는 충분히 무르익은 감정을 드러내지 못한 채 일행의 마지막 기착지인 토성까지 도달해버린다. 영화의 중요한 한축이 부실한 탓에 비극의 정조가 아프게 다가오기 힘든 것이다. 때부터 김성수 영화는 컷 수가 많고 속도감이 넘치는 걸로 유명한데 <무사>는 <비트>보다 훨씬 빠르게 전개된다. 숨고를 틈도 없이 전개되다보니 신중히 지켜봐야 할 멜로적 감정이나 고향에 대한 그리움처럼 연약하고 섬세한 부분들이 컷과 컷 사이에서 증발해버려 문제일 정도다. <무사>는 액션과 스펙터클을 다루는 솜씨에서 몇몇 대목, 경탄할 만한 수준을 보여준다. 고무줄을 탱탱히 잡아당겼다 놓은 듯 긴장감이 일시에 폭발하는 액션의 파노라마는 효과적인 사운드 디자인과 사기스 시로의 음악이 어우러져 전장의 살벌함을 입체적으로 드러낸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무사>의 액션연출이 할리우드산 블럭버스터처럼 롤러코스터를 타는 쾌감을 만들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감독 자신이 영향받았다고 말한 <와일드번치>의 폭력장면처럼 <무사>의 액션은 아름답지만 유쾌하게 보기에 불편하다. 공주를 구하는 전투 도중 진립이 잔인한 살육의 현장을 보며 누구에게 활을 겨눠야 할지 당황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건 이 영화를 찍는 감독의 태도이기도 하다. 피로 그림을 그리면서 <무사>는 관객이 야만적 폭력에 몸서리치게 만든다. ‘폭력의 피카소’라 불렸던 샘 페킨파가 그랬던 것처럼.

<무사>는 <와호장룡>처럼 우아하고 흠잡을 데 없는 영화가 아니다. 주요 등장인물인 11명 가운데 절반쯤은 매력적이고 나머지는 실망스럽다. 하지만 단순한 영웅담이 아니라 웅장한 시대극을 연출하려 했던 감독의 야심은 화면 곳곳에 진일보한 기술적 성취를 새겨넣은 제작진의 수고에 힘입어 한마디로 규정하기 힘든 에너지를 발생시킨다. 그것이 단지 스펙터클의 힘일까? <무사>는 결점이 분명하지만 뿌리칠 수 없는 매혹이 있는 영화다.

남동철 기자 namdong@hani.co.kr

▶ 무사

▶ <무사>의 액션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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