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맨이 돌아왔다.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들은 늘 돌아오게 마련이다. 저녁 공기가 더이상 서늘하게 느껴지지 않을 무렵이면, 영화세상에는 공포도 돌아오고 영웅도 돌아온다. 영웅의 경우라면 꼭 이때만 오는 것은 아니지만, 이 계절의 영웅이 종류도 많고 훨씬 강력하다. 이 연례행사의 이상한 점은 공포는 국산이 외제와 함께 돌아오는 반면, 영웅은 늘 미제만 돌아온다는 것이다.
올 시즌에 우리를 방문한 미제 영웅만 해도 무적의 돌연변이 일당(<엑스맨: 최후의 전쟁>), 한심하고 덜 떨어진 그러나 미워할 수 없는 잭 스패로우(<캐리비안의 해적: 망자의 함>), 그리고 크립톤 행성 출신의 외계인 슈퍼맨에 이르기까지 유전자도 기질도 능력도 다양하다. 다 한번 이상씩 다녀간 인물들이며, 올해엔 우리의 유난히 큰 환대를 받았다.
그러니 순진하게 질문해볼 수 있다. 왜 우리는 우리의 공포를 상상하면서, 우리의 영웅은 상상하지 않을까. 엑스맨도 슈퍼맨도 서울과 대추리에 오지는 않는다. 올해의 슈퍼맨은 미국 이외의 지역에서도 활동하는 것으로 아주 잠깐 비치긴 하지만, 그의 칭송받는 성과는 미국 영토를 수장시키고 새 대륙을 창조하려는, 잔혹하지만 혁명적인 부동산 영웅/악당 렉스 루더를 물리쳤다는 것이다. 왜 우리는 그들의 영웅을 온전히 우리의 영웅으로 받아들일까.
자국 위기의 층위를 드러내는 미국 영웅담
이런 단순한 질문에 대한 하나의 명료한 답이 있지는 않을 것이다. 영화세상에서 영웅서사의 본토가 미국이라는 점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영웅담은 미국영화가 가장 잘하는 전공분야다. 미국영화 중에서도 서부극은 영웅담의 원형이다. 영화가 서사의 꼴을 갖춰나가기 시작한 영화사의 초창기에 태어났고(<대열차강도>(1903)) 가장 오래되고 다양한 레퍼토리를 자랑하는 서부극은, 실제로 미국에서도 존재하지 않았던 서부공동체를 지상의 모든 관객에게 자신의 공동체로 상상케 하면서, 고독하고 강한 서부사나이를 한반도의 어린아이에게까지 영웅의 원형으로 각인시켰다. 그리고 그 영웅은 매체 환경의 가공할 만한 변화를 견디며 끝없는 변주와 진화를 거듭해왔다.
신종 영웅담은 물론 원조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서부극이 실존했으나 현실에선 사라진 인디언과 무법자를 외부로 등장시키고 그를 축출함으로써 내부의 질서를 찬미하고 영웅의 영웅됨을 재확인하는 절차를 밟는 반면, 신종 영웅담은 끝내 사라지지 않는 가상의 외부의 적을 등장시켜 내부의 불안과 공포를 남겨둔다. 신종 영웅담이 종종 호러의 상상력과 결합하는 건 우연이 아니다. <엑스맨: 최후의 전쟁>에서 끝내 되살아나는 매그니토의 염력, <캐리비안의 해적: 망자의 함>에서의 초현실적인 괴물들, <수퍼맨 리턴즈>에서의 신대륙의 괴기스럽고 삭막한 형상. 오늘의 영웅은 대개 괴물과 함께 돌아온다. 그렇다 해도 최신 영웅들에게서 공동체의 갈등을 해결하고 홀로 떠나는 서부사나이의 잔영이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조카를 납치한 인디언을 응징하는 존 웨인을 우리의 영웅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북미 대륙을 침몰시키려는 악당의 음모를 분쇄하는 백인 미남의 영웅담에 환호하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뿐만 아니라 미국 외의 많은 나라의 관객도 여전히 서부극으로부터 진화한 미국의 영웅담을 환대한다. 그때 미국이라는 공간은, 서부극의 추상화된 공동체마을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지표가 등장하지만, 특정한 국가의 영토가 아니라 지구촌 일반을 환유한다.
이 환유의 과정에 담긴 정치적 함의가 항상 미심쩍긴 하다. 대부분의 신종 영웅담이 영웅의 미국 국적을 명기할 만큼 멍청하지는 않지만, 그 영웅이 해결해야 할 위기는 어쩔 수 없이 현재 미국의 위기를 어느 층위에서건 반영한다. 미국의 위기가 지구촌의 위기일까. 이슬람 근본주의자에게라면 렉스 루더야말로 진정한 영웅 아닐까. 그러나 돈 많고 기술 좋은 미국영화가 자신의 전공 분야에서 만들어내는 영웅담의 강인한 진화 능력과 찬탄할 만한 시각적 매혹은 그 의구심을 늘 앞선다.
영웅서사 대신 공포를 택해온 한국 대중영화
미국영화의 영웅담의 위력이 압도적이라도 해도, 그것이 미국 밖의 영화세상에서의 지역 영웅을 무효화시키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촉구한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스테릭스와 오벨릭스> <모노노케 히메> <옹박> 등은 내부와 외부를 재설정하고, 갈등의 성격에 지역 정치학의 차원을 도입해, 종종 미국적 이미지로 단일화된 영웅담에 맞서는 일종의 대항 영웅담을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한국 대중영화에는 왜 영웅담이 드물까. 대중적 요구가 없는 것 같지는 않다. 황우석 사건이나 월드컵 때의 열광을 보면 오히려 넘쳐나는 것 같다. 이런 요구에 응답해온 건 오히려 TV드라마다. <야인시대> <대장금> <이순신> <장보고> <주몽> <연개소문> 등에서 알 수 있듯이 대개 실존 인물을 모델로 삼고 그들에게 종종 민족국가적 가치관을 과도하게 주입한다는 한계가 있지만, TV는 한국적 영웅담을 끈질기게 만들어왔다.
원인이 무엇이든 한국의 대중영화는 영웅서사에 대한 관객의 잠재적 요구에 답해오지 않았다. 대신 내부를 개인이나 가족 혹은 유사가족으로 설정하고, 세계 자체나 역사 자체를 불가항력의 악이 지배하는 외부로 설정하는 공포영화의 (상상력이 아닌) 구도를 끌어들여 주인공의 부당한 죽음 혹은 자살을 슬퍼하는 영화들이 거의 매년 흥행순위의 최상위에 올랐다. 죽음은 은연중에 찬미되고 주인공은 자학의 열정에 사로잡혔다.
물론 영웅담이 전혀 없진 않았다. <쉬리>는 드문 사례다. 하지만 이 영화를 지역 영웅담으로 말하기는 망설여진다. <쉬리>는 분단이라는 지역적 소재를 택했으면서도 내/외부의 설정 방식에서 미국 영웅담의 방식을 고스란히 따른다. 내부는 안정되고 문명화돼 있으며, 외부는 불안정하고 원시적이다. 외부의 적에게 인간적 매력이 있다 해도, 그들은 내부를 위협한 대가로 결국 응징된다. 문명화되고 폭력적인 거대한 외부를 비문명화되고 풍요로운 작은 내부와 대비시킴으로써 미국 영웅담의 전형적 대립항들을 교란하는 <옹박>과 비교하면 <쉬리>의 탈지역성이 드러난다.
그런데 올해 풍경은 좀 다르다. <괴물>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괴물>의 대립항은 흥미롭다. 한국의 젊은 주인공들을 죽음으로 몰고갔던 불가항력의 절대악이 미군의 오염물질로 태어난 괴수의 형상으로 돌아오고, 그에 맞서는 왜소하지만 긍정적 힘이 마침내 등장한다. 그들은 초인도 아니고, 재난영화의 단골주인공인 전문가도 아닌 대도시의 흔해빠진 루저들이다. 그들은 비장하게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초라하게라도 살아내려고 괴물과 맞선다. 그러다 불현듯 영웅이 된다.
<괴물>은 지역 영웅담의 민족국가적 알레고리로서도 흥미롭지만, 비로소 삶의 의지가 가득한 그리고 누구와도 닮지 않은 공동체 영웅이 등장했다는 점에서 잊혀지기 힘든 영화가 될 것 같다. 2006년 여름, 괴물과 함께 우리의 영웅이 마침내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