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괴물>의 음악감독 이병우
2006-08-02
글 : 황혜림
정리 : 장미
사진 : 오계옥

<연애의 목적> <분홍신>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그리고 한국영화 사상 가장 많은 관객이 극장에서 보고 ‘들었을’ 영화가 된 <왕의 남자>. 2005년 한해 동안 음악감독에 이병우라는 이름을 올린 영화는 네편에 이른다. 연주자의 꿈을 못다 이룬 피아노 선생님과 어린 피아노 천재가 들려주는 교감과 성장의 앙상블 <호로비츠를 위하여>, 이제 막 뚜껑을 열어 보인 따끈한 화제작 <괴물> 등 올해 개봉작까지 2년 사이 여섯편의 영화에 꼭 어울리는 감성의 음계를 세심하게 조율해온 이병우. 1984년 데뷔 이후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이 피로한 일상의 한순간에 위안처럼 떠올리곤 하는 조동익과의 듀오 ‘어떤날’의 섬세하고 다감한 시정, 기타리스트로 발표한 5장의 솔로 음반들에서 기타의 현 사이를 절묘하게 오르내리는 연주로 펼쳐 보이는 풍부한 음률의 탐색, 하나하나 파고들자면 몇 시간을 들여도 모자랄 그의 음악 세상에는 이제 영화음악이 차지하는 공간도 부쩍 늘었다.

1996년 <세 친구>의 담백한 기타 선율을 필두로 모두 열세편의 영화에서 희로애락의 다채로운 기상도를 음악으로 그려내는 동안, 이병우의 영화음악이 스크린 안팎에서 우리의 귀를 사로잡는 시간 또한 길어졌음은 물론이다. 사랑하는 이를 잃고 황폐해진 소녀의 속내를 들려주듯 애잔하게 밀려드는 <장화, 홍련>의 피아노, 좀 뻔뻔하다 여겼을지도 모를 남녀간의 줄다리기를 푸근하고 낭만적인 남미풍 선율로 애교스럽게 껴안는 <연애의 목적>에서의 기타, 각각 하프시코드와 가야금이 이끄는 바로크풍 유희와 국악의 변주(<스캔들- 조선남녀상열지사>), 대금 등 전통 악기와 서양의 화성 또는 악기가 한국적 선율과 만나면서 빚어지는 흥미로운 크로스오버의 긴장(<왕의 남자>) 그리고 이 모든 악기들을 받치며 공감을 호소하는 서정적인 현악, 또 현악 오케스트레이션. 이처럼 영화가 품은 사연에 정서적인 깊이와 여운을 더하는 영화음악가 이병우씨를 만나기 위해, 7월21일 오후 그가 운영하는 레이블 무직도르프((주)음악이 있는 마을, www.musikdorf.com)를 찾았다. 몇대의 기타와 피아노 등 비좁도록 악기가 들어찬 ‘음악이 있는 마을’에서, 집에서 기다린다는 그의 세 견공의 밥시간을 훌쩍 넘겨 미안하도록 길어진 이병우씨와의 음악 이야기.

-2005년에 두편, <호로비츠를 위하여>와 <괴물> 등 올해만도 벌써 두편, 영화음악 창작으로 아주 바빠진 것 같은데.
=영화음악은 1년 전부터 많이 하고 있다. 거의 1년 정도 미뤄졌다가 하게 된 작업(<왕의 남자>)도 있었고, 갑자기 대타로 하게 된 것도 있었고. 올해는 좀더 많이 하게 될 것 같다. 현재 예정된 것은 최양일 감독의 <수>, 계약은 아직 안 했지만 박진표 감독의 <그놈 목소리> <번트> <1번가의 기적> 네편 정도다.

-우선 최근작인 <괴물>부터 짚어보자. 지금까지 작업했던 영화 중 가장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모양새에 가까웠는데, 음악적으로는 어떻게 다른 작업이었나.
=<괴물>은 처음부터 끝까지 음악이 들어가도 말이 되는 영화였다. 그래서 수위를 조절하는 게 힘들었고. 사실 봉준호 감독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치가 높고 전작의 음악에 대해 내가 알고 있어서 힘든 부분도 있었지만, 감독은 내가 자유롭게 작업할 수 있도록 배려해줬다. 봉 감독은 음악을 절제해서 쓰는 사람이지만, <괴물>은 음악을 안 쓰면 뻑뻑한 부분이 많을 것 같았다. 반면 할리우드에서 하는 식으로 하면 봉 감독 이미지랑 안 맞을 것 같았고. <괴물>의 음악은 사실 영화에 비해선 얇은 편성이다. 외국에 가서 풀 오케스트라를 쓸 수도 있겠지만, 영화 자체가 조금 모자라는 사람들이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내용인데 오케스트라를 풀 편성으로 가서 기름지게 하는 구상은 안 어울리더라.

-블록버스터라고 하면 기대할 법한 음악과 서민의 이야기인 만큼 “서민적인 음악”을 하고 싶다던 의도 사이에서 어떻게 방향을 잡았는지.
=<괴물> 자체가 우리 주변의 서민을 주인공으로 잡고 있지 않나. 그래서 변희봉 선생님을 비롯한 <괴물>의 가족에게 가장 잘 맞는 음악은 일상생활에서 흔히 듣던 것일 것 같았다. 트로트를 많이 쓰고 싶었고, 쿵작 쿵작 쿵자작 쿵작 따다다다단다, 이런 식의 모티브를 화려하게 변주해보고 싶었지만, 위험할 수도 있고 너무 튀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어 많이 쓰진 못했다. 어느 정도 보편성도 있어야 할 것 같고, 괴물이 나올 때는 스펙터클한 게 필요했기에 어떤 음악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서 들을 법한 것도 있을 것이다.

-가족들이 병원을 탈출할 때 흐르던 음악은 블록버스터에 많이 쓰이는 클래식 스코어의 전형과는 사뭇 다른 파격이었다. 블랙코미디 같은 상황에 어울리는 서커스단, 혹은 유랑 악단의 음악 같은 느낌이어서 기억에 남던데.
=사실 병원 탈출은 논란이 많았던 부분이다. 대사도 많고 인물들만 봐도 재밌는데 음악까지 그렇게 가면 너무 꽉 차지 않겠냐는 얘기들이 있어서 고민스러웠다. 하지만 음악을 하는 입장에선 그 음악이 들어가야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봉준호 감독이 그 음악을 넣기로 하면서 자기도 다른 사람이 되는, 다른 사람으로 태어나는 느낌이었다고, 그전까지는 음악을 그렇게 드러내놓고 쓰는 게 힘들었다고 그러더라.

-<쓰리> 연작 중 <메모리즈>를 할 때만 해도 공포영화에 음악적으로 어울릴지 모르겠다고 했는데, <장화, 홍련> <분홍신>이 공포영화고 <괴물>에도 공포의 요소가 들어 있으니 장르로 보자면 공포영화의 음악을 제일 많이 한 셈이다.
=공포영화를 많이 하긴 했다. <괴물>에도 공포의 요소가 있지만, 난 봉준호 감독의 영화가 되게 따뜻하게 느껴진다. 예전에는 어떤 영화를 좋아하냐고 물으면 대답을 잘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봉준호 감독 영화를 좋아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내 자신이 멋있어지는 게 불편해서 그럴 때면 머쓱해져서 빨리 상황을 바꾸려곤 했는데, 봉 감독 영화가 뭔가 멋있어지려고 하면 흐트러뜨리고 하는 게 있다. 그런 데 공감이 간다. 어떤 사람은 <괴물>의 결말 부분을 문제 삼기도 하는데, 나는 그 부분이 굉장히 좋았다. 어쨌거나 우리는 원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삶 속에서 살아야 하니까. 세상의 아이러니에 대해 말하는 것도 좋았고. 요즘 들어 뭐든지 진솔한 게 좋다. 봉 감독 영화가 진솔하고 가식이 없는 것 같아 끌리고. 어깨의 힘을 빼고도 얼마든지 얘기할 수 있는 것 같으니까.

-<장화, 홍련> <분홍신> 등 긴장이 도는 공포영화의 영상을 감정에 호소하는 듯한 서정적 선율로 감싸는 대조 혹은 배치의 효과가 인상적이었는데.
=<장화, 홍련>은 김지운 감독이 그런 분위기를 먼저 주문했다. 사실 공포영화는, 만드는 사람은 안 무섭다. 어떤 사람들은 내 음악이 위로가 된다고도 하던데, 내가 음악적으로 제일 표현하기 쉽고 좋아하는 것은 불안하거나 멍한 상태의 음이다. 이게 뭔지 와닿지 않는 상태, 기승전결도 없는 그런 것들. <분홍신>은 여주인공이 불쌍하다는 생각을 전하기 위해 과거의 발레음악을 서정적으로 넣었는데, 그로 인해 공포가 반감되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가장 무서운 것은 오히려 음악이 나와야 할 때 없거나 공포영화에서 아주 아름다운, 서정적 음악이 흘러나오는 것이라 생각한다.

-<스캔들…>에서 한국의 사극과 클래식 음악의 매력적인 충돌을 실험한 데 이어 <왕의 남자>에서도 유사한 시도를 보여줬는데, 두편의 사극에서 들려준 음악적 크로스오버는 각각 어떤 고민을 거쳐 나왔는지.
=<스캔들…>에서는 한국적인 것에 대한 생각을 안 했고, 같은 시대, 다른 공간의 음악인 바로크 음악을 주로 썼다. 유희적인 면도 있었고. <왕의 남자>는 출발은 한국적인 것이었지만, 표현이 좀 가요적이랄까. 기본적으로 풍물이랑 대비를 해야 했고 감정선을 따라가야 했으니까. 소금, 대금 등을 쓰되 서양의 피리처럼 연주하기도 했고, 왕의 고급스러움이나 품격을 드러내기 위해 현악 앙상블을 쓰기도 했다.

-<그들만의 세상> <세 친구>로 영화음악을 시작할 때는 “감독이 원하는 대로 해야겠다는 충성심이 강했”다고 했는데, 지금은 어떤가.
=지금도 마찬가지다. 근데 나도 고집을 부리긴 하나보다. (웃음) <괴물> 믹싱할 때 라이브톤의 최태영 실장이 이병우 감독님은 꼭 힘들게 왜 이러냐고 하더라. (웃음) 나는 요것만 이러는 거라고 우기는데, 최 실장은 <장화, 홍련> 때도 그렇고 안 그런 게 없다고 그러고. 나는 전체적인 것을 보는 게 아니니까 사실 대부분 감독들 말이 맞다. <괴물> 같은 경우는 병원 탈출 장면 같은 데서 고집을 좀 부리긴 했는데 잘 넘어갔고.

-음악의 전개 방식이라든지 악기의 사용법이라든지, ‘이병우의 영화음악’이라고 여길 만한 느낌 혹은 특징이 있다면.
=특별히 없는 것 같은데….

-<연애의 목적>에서처럼 기타의 음색을 매력적으로 사용한다거나, 전체적으로 관악보다는 현악 오케스트레이션을 쓰는 경우가 많은데.
=현악을 제일 많이 쓰는 이유는 현악기가 저음부터 고음까지 인간의 감정을 가장 잘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현악이 더 민감하고, 그 질감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잘 맞아서 편하게 들을 수 있는 것 같다. 요즘에는 관악기도 많이 쓰려고 한다. <괴물> 같은 경우도 그랬다.

-<연애의 목적>에서 쓴 기타는 <장화, 홍련> 프로모션차 도쿄에 갔을 때 10만원 주고 샀다고 들었는데.
=60년대 기타다. 누가 쓰다 버린 건가 보더라. (웃음)

-영화를 위해 산 건 아닌가.
=그런 건 아니다. 꼭 좋은 기타들이 좋은 소리를 내는 건 아니다. 어떻게 쓰는지가,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하겠다는 게 중요하다. 고물 악기가 영화에 더 잘 들어맞는 경우도 있다. <분홍신>은 고장난 피아노로 녹음했으니까. <연애의 목적>에서는 아바나풍, 남미 음악을 염두에 뒀기에 뻑뻑한 기타를 사용했다. (웃음)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에서 보면 악기들이 뻑뻑하지 않나. 그런 느낌들이 좋다.

-기타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11살 때 받았다는 첫 번째 기타, 아직 갖고 있는지.
=첫 번째 기타는 없다. 20대 때 많이 썼던 펜더 기타는 있다. 80년대 초에 산 것.

-아주 오랫동안 함께해온 친구, 기타가 아직도 좋은 이유는.
=아무래도 출발이 기타니까 기타를 잡고 있으면 편하다. 호기심을 갖고 처음 만진 악기고, 내 관심사들을 기타로 풀었다. 지금도 그걸로 먹고살고, 즐기고 있다. 기타 때문에, 마음만큼 연주가 되지 않아서 힘들어한 적도 있지만, 한마디로 기타와 동고동락해왔으니까. 사는 방법이자 생계수단이다.

-<호로비츠를 위하여>는 음악영화라서 더 끌렸을 것도 같다.
=보통 마지막에 음악 작업을 하는데, 이 영화는 처음부터 작업에 들어가야 해서 굉장히 재미있었다. 월드컵이 맞물려서 흥행이 좀 덜 된 게 아쉬워도, 많이 남을 영화일 것 같다. 특히 음악 하는 사람들한테는.

-특별히 좋아하는 영화음악가가 있나.
=엔니오 모리코네를 굉장히 좋아했다. 그 사람 음악에는 세련되지 않은, 진부하고 촌스러운 면이 있다. 낭만성이라고 할까, 과거에 대상 회상 같은 것도 있고. 좀 진부한 듯하지만 사람들에게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스타일이다. 재미있고 웃음이 나는,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음악 같은, 옛날 옛날에 뭐가 있었는데 하는 식이랄까. 한스 짐머 같은 사람도 나름대로 특기가 있다고 본다.

-영화음악에서 앞으로 특별히 해보고 싶은 게 있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한 가지 주제를 변주하는 것. 할리우드영화를 보면 음악들이 상황에는 다 맞는데 막판에 남는 건 없다. 그렇다면 각각 다른 악기로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은 음악을 들려주면 어떨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러면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도 있으니 변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주제는 하나, 많아봤자 둘 정도. 음악 많이 안 만든다, 하나로 다 하려고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람들이 영화를 보는 두 시간여 동안 한두곡 정도를 듣고 거기에 익숙해지는 것을 통해 극적인 효과를 낳는 게 최고라고 본다. 기본적으로 영화관에 가서 큰 화면에 큰 스피커로 크게 듣는 게 영화다. CD나 DVD로 듣는 경우와 달리, 극장에서는 하나로 정리된 음악을 전달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좋은 생선 하나로, 이 부분은 회로 내놓고 저 부분은 튀김을 하고 그런 컨셉 말이다.

-영화음악의 위치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영화음악은 정말 중요하다. 영화의 겉옷과 같은 거니까. 영화음악은 추상적이면서도 외형적이다. 영화를 포장하듯이 마지막에 분위기를 확 만들어주는 거라서 정말 잘 써야 할 것 같다. 마지막에 어떤 부족함을 메워줄 수도 있는 키, 마지막 히든카드, 조커 같은 것.

-2000년 10월 무직도르프를 설립한 이후 7년째다. 언어와 장르를 떠난 연주음악의 터전으로서의 레이블을 운영해간다는 게 쉽지 않을 텐데.
=무직도르프는 동시대의 음악을 공간적 제약없이 만들고자 설립한 음악 프로덕션이다. 어디서 들어도 공감할 수 있는, 이른바 말하는 크로스오버에 가장 가까운 음악을 주로 하는데, 연주음악이 활성화되지 않아서 어려움이 많다. 음반시장 상황도 최악이고. 대중적이진 않지만, 그래도 좋아해주는 분들이 많이 늘었다. 가끔 유럽, 일본에서도 이메일이 와서 기분은 좋다. 아직까진 안 닫고 있으니까 그걸로 위안을 삼아야지. (웃음)

-새 개인 음반, 혹은 공연 계획은 없는지.
=새 음반은 준비해야 하는데, 올해는 영화 일이 많아 적극적으로 못하고 있다. 공연은 영국 런던의 로열페스티벌홀에서 올해 할 계획이 있었는데 내년으로 연기했다. 기타 공연이 될 것 같다.

-어느새 열세편의 영화음악을 했는데, 자꾸 하게 만드는 영화음악의 매력이 있다면.
=주로 혼자서만 작업해와선지, 영화음악은 어떤 틀 속에서 해야 한다는 게 오히려 힘이 덜 들었다. 상황에 맞는 것만 하다보면 답답할 때도 있지만 여러 사람들과 다양한 생각을 하면서 할 수 있으니까.

-이제 영화음악가란 직함이 개인적으로는 입고 싶은, 익숙하고 좋은 옷인가.
=하고 있으니까 재미는 있는데, 모르겠다. 기타리스트라는 말을 많이 들어와서 다른 사람들이 감독님이라고 하면 재밌게 들린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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