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느긋하지만 단단한 발걸음, <스승의 은혜>의 여현수
2006-08-10
글 : 장미
사진 : 이혜정

여현수는 키가 컸다. 사실 장난스러운 고등학생 임현빈이었을 때(<번지점프를 하다>)도 그는 교실 맨 뒷줄의 책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실제로는 큰 그가 작고 가녀리게 느껴졌던 것은, 임현빈이 한 여인의 환생이었다는 충격적인 결말이 너무 강렬하게 각인됐기 때문이다. 이후 그의 필모그래피에는 <남자 태어나다>와 <홀리데이>가 추가됐고, 그는 이른 시간 안에 <번지점프…> 속 이미지에서 점프해야 했다. 그렇다면 그 영화가 앞을 가로막는 높은 벽처럼 그의 마음을 억눌렀던 적은 없었을까. 여현수는 단호하게 “없다”고 대답했다. “그 작품이 아니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 있지도 못할 거다. 그걸로 생애 꼭 한번 탈 수 있다는 백상예술대상 신인상을 받기도 했고.” 그러곤 몇 마디 덧붙였다. “<번지점프…>를 생각하면 너무 행복할 뿐이다. 웃음이 나올 정도로. 지금껏 서른번도 넘게 봤는데, 우울하거나 힘들 땐 꼭 다시 본다.” 데뷔작을 토양 삼아 25살 청년으로 훌쩍 자라난 그가 네 번째 출연작 <스승의 은혜>를 들고 스크린을 찾아왔다. 술잔을 기울이며, 혹은 원망이 서린 눈을 번뜩이며 신랄하게 악담을 내뱉는 것이 예전과 사뭇 다른 모습이다.

“겉표지에서 일단 느낌이 오는 시나리오가 있다”며 웃던 여현수는 세호라는 캐릭터가 마음에 들어 <스승의 은혜>에 출연하게 됐다고 한다. “누가 세호가 괜찮더라는 말을 한 것도 아닌데, 그냥 눈에 띄었다. 시니컬한 면이 좋아 무척 하고 싶었다.” <스승의 은혜>는 초등학교 동창생들과 담임 선생님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살육극이 벌어진다는 내용의 공포물. 고만고만한 나이대의 배우들이 많았기 때문에 충남 태안에 위치한 촬영현장은 유난히 생기 발랄했고, 그곳에선 실명 대신 별명으로 서로를 부르는 일도 잦았다. 그럼 여현수는 뭐라고 불렸을까. 엉뚱하게도 ‘상주 배우’였다고 한다. “서울에 안 가고 계속 현장에 있었으니까. (웃음) 제작부가 할 일을 대신 해놓기도 했다. 숙소 주인에게 부탁해 중고 세탁기도 얻었고, 근처 맛집도 다 찾아놨을 정도다.” 그토록 몰두했던 것은 <남자 태어나다> 때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의 기대 속에서 차기작을 골랐다. 당시 의욕이 커서 힘들었다. 내가 맡은 김해삼이란 역할이 우격다짐하는 인물이라 우둔하게 보여보자는 생각에 20kg이나 살을 찌우기도 했다.” 그런 노력에도 <남자 태어나다>는 제작사와 배급사 사이의 갈등, 낮은 점유율 등의 문제로 개봉 하루 만에 간판을 내리는 악재에 휩싸였고, 지강헌 사건을 다룬 <홀리데이> 역시 흥행에 실패했다. 무엇보다 여장을 할 정도로 곱상한 외모를 갖춘 최민석을 연기한 여현수는 최민수, 이성재 등 거친 남자 배우들 속에서 수컷들의 기싸움에 밀리는 듯 보였다. 하지만 얻지 못할 것을 포기하는 대신 얻을 것은 반드시 쟁취하고 마는 그는 “인질극 장면에서 관객을 꼭 울리고 싶고 그 신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는 뜻을 양윤호 감독에게 전달했다. 어린 소녀의 목에 칼을 들이민 채 눈물을 흘리는 모습으로 유난히 콧잔등을 시큰거리게 할 수 있었던 건, 선택과 집중에 능한 그의 결단력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MBC 28기 탤런트 공채에 합격한 뒤 나병 환자 집안에서 태어난 상화라는 인물로 드라마 <허준>에 캐스팅되는 등 데뷔 초기 여현수에겐 많은 행운이 뒤따랐다. 벌써 7년차 배우인 그는 다음 작품들은 운이 아닌 노력으로 밟아가야 함을 알고 있고, 그건 어쩌면 당연한 교훈일 것이다. 그보다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느긋하지만 결코 멈추지 않는 단단한 걸음걸이다. “처음에는 TV에 나와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싶은 생각이 컸다. 그 뒤 한 작품 한 작품 거쳐가며 연기의 맛을 알게 됐고, 거기에 중독되기 시작했다. 특히 다른 인물의 생활이나 습관, 성격, 이런 걸 표현하는 게 재밌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할 수 있으니까.” 아무것도 모른 채 캐릭터를 체화했던 <번지점프…>부터, 하고 싶은 연기를 모두 시도해봤던 <남자 태어나다>, 쟁쟁한 선배들에게서 많은 배움을 얻었던 <홀리데이>, 최근작 <스승의 은혜>까지 그는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걸어왔다. 쉬는 날이면 영화를 5편 넘게 본다는 그는 자신이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썩 나쁜 느낌은 아닐 것이다. “지금 당장이 아니라, 서른까지 바라보고 있다.” 많은 배우들이 물결처럼 밀려왔다 사라져가는 스크린 위에 여현수의 자리를 비워놓은 채 조금 더 기다리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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