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배급업 포기하며 <괴물> 제작에 매달린 청어람 대표 최용배
2006-08-14
글 : 문석
사진 : 오계옥

연일 흥행 기록을 세우고 있는 <괴물>은 잘 알려졌다시피 봉준호 감독이 고등학교 시절부터 간직하던 꿈의 결정체다. <괴물>에 또 다른 사람의 꿈이 서려 있다면 그 주인공은 이 영화의 제작사인 청어람의 최용배 대표다. 오로지 <괴물>의 완성이라는 목표를 위해 그동안 단단한 기반을 다졌던 배급업까지 포기했을 정도로 그는 이 프로젝트에 사활을 걸었다. 그런 그의 베팅은 일단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폭발적인 흥행 성과는 그 성공에 대한 증명 중 일부일 뿐이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완성도 있는 영화를 제작했다는 칭찬이나 그의 뚝심에 대한 재평가도 그에게는 성공이라면 성공일 터. 하지만 무엇보다 최용배 대표 개인에게 <괴물>은 가깝게는 10여년 전, 멀게는 20여년 전, 막연하게 세워놓았던 ‘한국영화로 할리우드영화를 대체한다’는 목표를 어느 정도 달성케 했다는 의미를 가진다. 연출, 투자, 배급이라는 우회로를 통해 결국 제작자의 세계로 들어와 오래된 꿈을 이룬 최용배 대표의 행보를 돌아본다.

최용배 청어람 대표의 표정은 예상과 달랐다. 자신이 제작한 <괴물>이 개봉 첫 주말 흥행 신기록을 세웠다는 소식이 나온 7월31일에도 그의 표정은 평소처럼 무뚝뚝한 선비 같은 인상을 내비치고 있었다. 분명 그것은 표정관리였다. <괴물>은 바로 그날로 손익분기점을 가뿐하게 넘기고 있는 상황이었다. 일본에서의 320만달러를 포함해 해외에서 500만달러 가까운 사전 판매를 기록한 덕에, 부가 판권이 어느 정도 팔린다는 것을 전제로 국내에서는 300만명만 넘어서면 순익이 나기 때문이다(아니나 다를까 <괴물>은 7월31일까지 전국 관객 317만명을 동원했다). 여기에 9월 초 250개 스크린을 통해 개봉하는 일본에서도 어느 정도 수익이 예상되고 있으며, 소설이나 어린이용 만화, 인터넷 만화, 모바일 게임 등 머천다이징 판권도 속속 판매돼 부가 수익 또한 상당할 분위기다. 또 현재 논의 중인 해외의 리메이크 판권 협상이 성사된다면 <괴물>이 벌어들일 수익은 역대 어떤 한국영화가 이룬 것에 뒤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그 어떤 제작자의 마음속 얼굴이 환하게 웃고 있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관리’되고 있는 그의 표정은 무언가 다른 뉘앙스를 담고 있었다. 거기에는 경망스러움을 피하고 싶은 마음과 다른 한국영화 제작자들에 대한 미안함, 향후 벌어질지 모를 돌발변수에 대한 경계심 등과 함께 어슴푸레한 그림자 또한 드리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 그림자의 정체는 아마도 <괴물>의 영광을 이룩하기 위해 그가 희생하고 포기한 ‘제물’들이었을 것이다. 5년 동안 꾸렸던 알토란 같은 배급사업과 공들여 꾸려온 <작업의 정석> <흡혈형사 나도열> 같은 프로젝트를 그야말로 괴물 같은 <괴물>의 제단에 바쳐야 했던 그였기에 거대한 성공을 바라보면서도 동시에 쓸개를 씹는 듯한 비장한 기억을 되새김질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한때 배급 순위 3위에 올랐던 청어람의 배급 기능을 포기하는 고난까지 겪으면서 <괴물>을 밀어붙였던 이유는 지금과 같은 대성공을 예견한 탓일 수도 있다. “봉준호 감독이 한강의 네시 모습을 합성한 사진을 보여주며 ‘한강에서 괴물이 나오는 영화를 만들겠다’고 제안했을 때 잠시 당황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이야기만 하는 사람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걱정하지는 않았다”고 그는 이야기하지만 이성적으로 판단했을 때 그것은 분명 무모한 베팅이었다. 한국에서 100억원이 넘는 예산을 들이는데, 그것도 CG로 만든 괴물이 등장하는 영화라니. 그것을 위해 자신이 그동안 공들여온 탑을 무너뜨리는 사람을 정상이라 말할 수 있을까. 결국 최용배 대표의 <괴물>을 위한 결단에는 합리적인 목적, 그러니까 돈과 명예 외에 다른 무엇이 존재한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어린 시절 미국영화를 보면서 미지의 세계에 대한 아련한 감동을 느꼈는데 어른이 되면서 그것으로 채워지지 않는 게 있음을 알게 됐다. 영화를 하면서 우리도 미국영화가 해왔던 다양한 분야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고, 그중 하나가 테크놀로지에 대한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가 <괴물>에 올인한 것이 모두 이런 순수하고 거창한 뜻에서 비롯됐다는 얘기는 아닐 터. 하지만 그에게 ‘한국영화’란 개념은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절절하게 자리잡혀 있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82년부터 2000년대 초까지 개봉한 한국영화의 95%를 본 흔치 않은 관객

최용배 대표가 영화와 특별한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시절부터다. 그 관계가 특별했던 건 그가 본 영화의 대부분이 한국영화였기 때문이다. 70년대 말과 80년대 초 한국영화는 외화 쿼터를 따내기 위한 요식행위로 전락했지만, 그는 꾸준히 한국영화를 보며 영화감독의 꿈을 키워나갔다. 1982년 서울대학교에 들어갔을 때 그는 “충무로의 조감독이 되겠다”고 공공연히 이야기하고 다니는 흔치 않은 대학생이었고, “82년부터 2000년대 초까지 개봉한 한국영화 중 95%쯤을 본” 정말 흔치 않은 관객이었다. “막연히 자막 없는 영화의 미덕을 느꼈던 것 같기도 하고, 한국영화가 가진 나름의 즐길 만한 요소를 찾으려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대학 졸업 뒤 대우학술재단에 입사한 그는 신촌 ‘우리마당’의 8mm 영화 워크숍을 통해 영화의 맛을 제대로 알게 된다. 곧바로 그는 회사를 때려치우고 서울예대(당시 서울예전) 영화과에 87학번으로 들어간다. 서울예대를 졸업할 무렵, 그는 당시 조교였던 심승보 감독(<남자이야기>)의 소개로 신승수 감독의 <빨간 여배우> 현장에 스크립터로 합류한다. 정지영 감독의 <남부군>과 신승수 감독의 <스물일곱송이 장미>에서 연출부를 하면서 그는 독립영화협의회와 영화공동체에서 독립영화 제작을 꾀하기도 했고, 이무영 감독이 DJ를 맡은 라디오 프로그램의 작가를 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감독 최용배’의 꿈은 조금씩 사그라지고 있었다. 그가 처했던 환경도 안 좋았지만, “감독으로서 어떤 영화를 만들 것인가 정체성을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그에게 매력적인 제안이 들어온다. 당시 비디오 판권 사업을 펼치다가 케이블TV 영화채널 DCN을 만들면서 영화에 본격적으로 투자하기 시작한 대우영상사업단에서 신승수 감독을 통해 입사 권유를 한 것이다. 마침 결혼도 해 어려운 형편인데다 ‘영화를 하는 월급쟁이’도 의미가 있다는 생각에 그는 감독의 꿈을 접고 대우에 들어간다. “생각해보면 내게 프로듀서의 소질이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프로듀서의 중요한 판단 중 하나가 이 사람이 감독을 잘할지 못할지를 판단하는 것인데, 나 자신을 그런 틀로 판단했으니 말이다.” (웃음)

시네마서비스서 한 첫번째 일은 한국영화에 대한 편견을 깨뜨리는 것

1994년 4월 대우에 들어간 그의 일은 투자와 제작관리였다. 당시 대우, 삼성 등 대기업들은 비디오 판권 투자에서 영화 투자로 방향을 선회하고 있었다. 그는 제작자와 감독을 만나서 투자와 캐스팅 등을 결정하고 제작비 집행 내역 등을 챙기는 일을 처리하며 빠르게 적응했다. “내가 연출부를 했다는 게 유리한 조건이 된 것 같다”고 그는 설명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그는 중요한 인연 하나를 맺는다. 그는 <투캅스>를 막 성공시킨 강우석 프로덕션(시네마서비스로 개편)을 담당하면서 <마누라 죽이기> <엄마에게 애인이 생겼어요> <손톱> 등을 책임졌고, 이 과정에서 강우석 감독을 알게 된다. 차츰 영화 규모가 커지면서 실패작이 많아지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IMF까지 닥치면서 대기업들이 영화사업을 정리할 채비를 할 무렵인 97년, 강우석 감독은 사세를 넓히고 있던 시네마서비스로 최용배를 스카우트한다.

시네마서비스에서 그가 맡은 일은 배급이었다. 당시만 해도 배급이라는 분야는 저변이 형성되지 않았던 탓에 그의 고난은 만만치 않았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배급을 필름 배송이나 입회 같은 것으로 생각했다. 심지어 주변 사람들은 ‘배급 아무개’ 하는 식으로 크레딧을 적지 말라고 했다. 나중에 프로듀서 하는 데 지장이 있다면서.” 그에게 배급 일을 하면서 정말 고통스러웠던 점은 한국영화에 대한 푸대접이었다. 한국영화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던 극장들은 비슷한 성적이 나올 때는 물론이고 한국영화가 20% 정도 관객이 더 드는데도 직배사 영화를 내걸었다. 직배영화가 스크린 50개를 잡으면 한국영화는 20개 정도를 잡는 수준이었다. 결국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전쟁’밖에 없었다. “2~3년 동안을 매일같이 극장에 가서 한국영화에 대한 개념을 새로 가지라면서 욕설을 써가며 싸웠다. 내 성격도 바뀌었다. 내가 원래 소리지를 줄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목청이 트였다. 아주 득음을 한 거다.” (웃음) 이런 배급팀의 노력과 한국영화의 성장에 따라 극장들은 스크린을 열어주기 시작했다. 한국영화를 만들려 했고, 투자해왔고, 욕을 해가며 배급해오던 그였기에 99년 시네마서비스가 외화 배급에 나설 때 반대했던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당시 투자·배급이사였던 그는 이 방침이 못마땅했고 그동안의 꿈이었던 제작사를 차리기로 마음을 먹고 2000년 초 시네마서비스를 나온다.

한국영화 전문 배급사 청어람 설립, <장화, 홍련> <바람난 가족> 등 배급

<괴물> 프로젝트는 이때부터 움트기 시작한다. 사실, 최용배 대표와 봉 감독의 인연은 그가 대우에 있던 시절 처음 맺어졌다. 당시 대우는 박기용 감독의 <모텔 선인장>에 투자를 하고 있었는데, 시나리오 작업은 박기용 감독과 봉 감독, 장준환 감독이 공동으로 진행했다. 퀵서비스나 이메일이 없던 시절이라 봉 감독은 대우 사무실로 직접 시나리오를 ‘배달’하곤 했고, 그때마다 대면한 것. 두 번째 인연이 바로 그가 시네마서비스를 나온 직후다. 그가 머리를 식히려고 여행을 갔다오니 극장에는 <플란다스의 개>가 개봉해 있었다. 관객은 비록 다섯명뿐이었지만, 아주 유쾌하고 즐겁게 봤던 그는 곧바로 봉 감독을 불러서 함께 영화를 하자고 제의했다. 봉 감독도 동의했다. 그런데 얼마 뒤 싸이더스에서도 봉 감독에게 제안을 했다. “결국 봉 감독은 <살인의 추억>을 위해 싸이더스로 돌아갔고, 나 또한 사세를 늘리던 시네마서비스로부터 요청을 받아 돌아가게 됐다. 그때 봉 감독과 ‘다음 영화는 함께 한다’라는 약속을 했고, 그게 <괴물>이 된 것이다.”

청어람은 2001년 11월 만들어진다. 그해 하반기 2002년 라인업을 짜보니 시네마서비스는 18편을 배급해야 했다. 당시 한 배급사는 한국영화를 1년에 12편 이상 배급하면 안 된다는 불문율이 있던 데다 2001년 말 배급 물량이 넘쳐 <고양이를 부탁해>와 <와니와 준하> 배급을 직배사인 워너에 맡겼던 상황을 경험한 터라 시네마서비스는 고민에 빠졌다. 이때 최용배 대표는 “무한투자조합의 투자작과 싸이더스 영화를 배급하겠다”며 시네마서비스의 제2 배급사를 만들어 독립하겠다는 뜻을 밝힌다. 그렇게 만들어진 청어람은 ‘한국영화 전문 배급사’를 모토로 내걸었다. 청어람은 <마리 이야기>를 시작으로, <정글쥬스> <결혼은 미친 짓이다> <로드무비> 등을 개봉하며 서서히 세를 확장한다. 2003년에는 <장화, 홍련> <싱글즈> <바람난 가족>을 연이어 흥행에 성공시켜 직배사 등을 제치고 그해 배급 순위 3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청어람은 작은 영화들의 가능성에도 주목했다. <죽어도 좋아> <동승> <선택> <여섯개의 시선> <용서받지 못한 자> 등이 청어람의 배급망을 탔다. 그 와중에 박광현 감독 등이 참여한 옴니버스영화 <묻지마 패밀리>는 청어람에만 5억원이라는 수익을 안겨주기도 한다.

하지만 한국영화만 배급한다는 그의 포부는 현실의 벽에 부딪히기 시작한다. 특히 한때 파트너였던 아이픽처스와 분쟁에 휘말려 직접 제작한 첫 작품인 <효자동 이발사>의 배급권을 다른 곳으로 넘기면서 청어람의 위상은 흔들린다. 또 <꽃피는 봄이 오면> <엄마> <극장전> 등 의미는 있지만 흥행에서는 실패한 작품들이 이어지면서 위기를 겪는다. “잘 아는 수입사로부터 외화를 함께 배급하자는 제의를 받았다. 어려웠던 지난해와 지지난해에는 그 외화 라인업만 있었으면 회사를 잘 유지하면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겠구나 하는 후회도 몇번 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어차피 외화는 안 했을 텐데 후회가 무슨 소용이 있나 하는 생각도 든다.”

<괴물>은 이러한 위기 속에서 시작된 프로젝트였다. 봉 감독과 그가 애초 뽑아봤던 이 영화의 예산은 대략 60억원이었다. CG 예산 20억원에 나머지 예산 40억원 정도를 생각했다. 그러다가 CG 작업의 구상을 구체화하면서 예산안은 80억원으로 뛰었다. 하지만 투자자들은 냉담했다. 그들은 이 프로젝트가 B급영화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고, CG의 완성도를 의심했다. 확실한 투자자를 구하지 못한 채 일본쪽의 투자금과 자체 자본을 바탕으로 프리 프로덕션을 시작했지만, 2005년 5월에는 당장 10억원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촬영도 시작하지 못한 채 프로젝트가 무너질 수도 있는 상황에까지 몰렸다. 결국 그는 <괴물>을 살리기 위해 그동안 공들였던 배급업을 포기한다는 어려운 결단을 내렸다. 결국 그는 <괴물>을 비롯해 <작업의 정석> <흡혈형사 나도열> 등 6편의 배급권을 쇼박스에 넘기는 조건으로 투자를 받았고 촬영에 들어갈 수 있었다.

<괴물> 살리기 위해 배급업은 포기…다양한 한국영화 제작의 기회로

사실, 청어람은 일종의 아이러니다. 애초 청어람을 차릴 당시, 최용배 대표는 제작 역량을 키워서 1년에 자체 제작 영화 2~3편과 외부 물량 3~4편을 배급한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청어람은 스스로 제작한 영화는 한편도 배급하지 못했다. <효자동 이발사> <작업의 정석> <흡혈형사 나도열> <괴물> 모두 쇼박스가 배급을 했다. 그는 이 아이러니를 받아들이면서 ‘자체적으로 투자를 해서 영화를 열심히 만들자’는 쪽으로 방침을 세웠다. 최근 SK텔레콤의 계열사인 IHQ에 주식의 30%를 양도한 것도 제작을 강화하기 위한 한 수단이다. “더 안정적인 자본으로 규모있게 제작을 하려고 한다. 큰 규모의 영화도 하고, 다양한 영화도 여러 편 하려는 것이다. IHQ의 투자는 그런 기회라고 본다.”

이제 네편을 제작한 ‘초보 제작자 최용배’의 첫 번째 꿈은 가능성 있는 젊은 감독들을 끄집어올리는 일이다. <용서받지 못한 자>의 윤종빈 감독, <소년, 천국에 가다>의 손태웅 감독, <효자동 이발사>의 임찬상 감독 등의 새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다. 그의 이런 시도는 마치 <플란다스의 개>를 만든 봉준호 감독을 발굴하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이외에도 박종원 감독의 역사물 <낙랑클럽>, 강풀의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26년>도 만들 계획이다.

제작자로서 현재 그가 꾸는 또 다른 꿈은 한국적인 영웅영화다. 현재 유명한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의 판권 계약을 추진하고 있다. 또 한국적 영웅을 <배트맨>이나 <슈퍼맨>처럼 시리즈로 영화화하는 계획도 세우고 있다. 이 계획들은 “할리우드영화가 건드리는 각종 영역을 한국영화가 대체하고 싶다”는 그의 포부에서 출발한다. “<괴물>이 디지털 캐릭터를 만드는 것에 대한 자신감을 세워준 영화라면, 앞으로도 영웅영화를 비롯해 애니메이션, 뮤지컬, 가족영화 등 한국영화가 충분히 이르지 못한 곳에서 자신감을 얻을 만한 프로젝트를 만들어나가고 싶다.”

감독 지망생에서 투자담당자로, 다시 배급전문가로 그리고 제작자로 위치는 바뀌어왔지만, 최용배 대표에게 일관성이 있다면 그건 한국영화에 대한 열정이다. 사실, <괴물> 제작 과정에서 보였던 그의 한국영화에 대한 집념은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마치 그는 “처음부터 한국영화였으니까 계속 한국영화”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런 최용배 대표에게 가장 어울리는 표현은 어쩌면 ‘고지식하다’는 말일 것이다. 그리고 그 고지식함은 한국영화의 중흥기를 다양한 장에서 겪으면서 한국영화가 한발 더 전진할 수 있다는 희망을 경험적으로 체득한 자만이 발휘할 수 있는 여유만만한 태도인지도 모른다.

최용배가 말하는 나의 영화 스승들_ “이들이 있어 지금의 내가 있다”

1. 이춘연 씨네2000 대표
그를 보면 ‘영화 한편 한편에 연연하고 발을 동동 구르면서 살지 말고, 서로 편안하고 행복하게 사는 게 중요하다’라고 말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나 또한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많이 느끼고, 오늘 조금 손해를 볼지언정 무엇인가를 억지로 풀어가려 하지 않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워낙 영화계의 어려운 일을 다 들어주시는 분인데, 나도 답답한 일이 있으면 사장님께 가서 이야기를 한다. 그러면 쌓인 게 다 풀리는 느낌이 든다. 욕심을 내지 않으시는 태도도 존경스럽다. 만약 사장님이 사람과의 관계를 이용해서 프로젝트를 성사시키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잘나갔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안 하신다. 그렇게 잘하는 것보다는 좀더 여유를 가지고 정도를 지키는 것이 영화를 만드는 일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 나는 지금은 아직 초보 제작자에 불과하지만, 만약 권력이 생긴다면 그렇게 행동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2. 강우석 감독
다른 것을 다 떠나서 영화에 대한 모든 것을 배우게 해주신 분이다. 사실 내가 지금 사업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시네마서비스에 있을 때 배운 것을 갖고 하는 셈이다. 인간적인 면에서는 후배들을 끝까지 책임지고 배려하겠다는 마인드를 갖고 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거기에는 이용한다는 면도 있다. 나쁜 의미가 아니라, 결국 서로에게 좋은 관계가 된다는 것이다. 강우석 패밀리 출신으로 아주 멀어져나간 사람은 거의 없지 않는가. 그렇게 끝까지 관계를 지속하고, 항상 관심가져주고 챙겨주는 것이 참 존경스럽다. 요즘에는 <한반도>와 <괴물>이 비슷한 시기에 개봉해 좀 어색한 국면이다. <한반도> 개봉 전에는 개봉일 조정 때문에 만났는데, <괴물> 개봉에 정신을 쏟다보니 연락을 못 드렸다. 강 감독님은 콘텐츠의 가치라는 것도 알게 해줬다. 좋은 영화를 몇편 들고 있으면 그 힘으로 죽 갈 수 있다는 것 말이다.

3. 신철
무엇보다 <엽기적인 그녀>로 대성공을 거둔 다음 <드래곤 워리어>를 만든다고 한국을 떠나는 것을 보면서 존경스러웠다. 당시 나는 제작자의 꿈만 갖고 있었는데 충격이었다. 당시 신 사장님이 한국에서 영화를 하겠다고 했으면 수많은 작품들이 줄을 섰을 것이다. 또 원하는 감독, 원하는 배우와 작업할 수 있는 기세가 아니었나. 그런데도 한국에서는 흥행이고 뭐고 해볼 만큼 다 해봤으니 새로운 차원의 일을 하겠다며 안정된 기반을 박차고 나가는 모습이 대단했다. 그런 것을 다 포기하고 미국에 가서 새로운 도전을 하고 계시다. 그런 모습을 보며 나도 도전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됐다. <괴물> 때도 많이 도와주셨다. CG회사와 계약을 할 때 어떤 점을 조심해야 하는지도 상세하게 말해줬고, 구체적인 진행 과정과 관련해서도 의논을 많이 했다. 게다가 우리 시나리오를 보고서 ‘무조건 되는 영화’라고 말해준 얼마 안 되는 분이기도 하다. 투자자도 소개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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