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한강의 재해석, <괴물>
2006-08-23
글 : 황두진 (건축가)
건축가가 본 봉준호의 <괴물>

건축가로서, 그것도 한국의 건축가로서 나는 동시대의 예술가 및 창작인 중에서 봉준호 감독에게 상대적으로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 번째 이유는 그의 영화적 고향이 바로 ‘지금의 여기’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영화감독이건, 건축가건, 화가 혹은 조각가, 작곡가건, 창작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그 창작 세계의 근간을 이루는 고향 같은 것이 있다. 그 고향은 두고두고 그의 삶에 영향을 끼친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는 여기인데 지금의 여기가 아닌 어떤 다른 시대의 여기를 꿈꾼다. 또 어떤 사람들은 지금은 지금인데 여기가 아닌 전혀 다른 곳의 지금에 관심이 있다. 물론 여기에도, 지금에도 관심이 없고 자기 머릿속에 존재하는 상상의 세계만을 추구하는 사람들 혹은 고향을 상실한 사람들 또한 존재한다.

봉준호의 고향은 ‘지금의 여기’

지금까지 발표된 대표작 세편, 즉 <플란다스의 개> <살인의 추억> 그리고 <괴물>을 통해서 봤을 때, 봉준호 감독은 자신의 영화 작업이 어디에서 시작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드러내고 있는 쪽에 속한다. 그에게는 지금 이 사회의 적나라한 모습들이 창작의 텍스트다. 그는 이른바 ‘진경’(眞境) 감독인 것이다. 분야를 막론하고 그런 입장을 선명히 보여주는 작가는 그다지 많지 않다. 특히 텍스트 자체에 대한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우리나라에서는 더욱 그렇다.

두 번째 이유는 그가 결과적으로 자기의 영화적 고향을 전혀 다르게 느껴지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는 텍스트를 뛰어넘을 줄 안다. 이것은 첫 번째 이유보다 더 중요하며 확실히 더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조건을 다 충족시키는 작가는 정말 드물다. <플란다스의 개>에서의 아파트는 무미건조한 공동주택이 더이상 아니다. <살인의 추억>은 어떤가. 이 영화를 본 사람이면 더이상 농촌의 풍경을 나른한 일상적인 시각으로만 바라볼 수 없을 것이다. 드라마 <전원일기>의 농촌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가 거기 있다.

그리고 이제 우리에게 <괴물>이 주어졌다. 대도시 서울, 그 한복판을 흐르는 한강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하지만 영화 속의 한강은 멀리서 바라본 유장한 물줄기, 즉 한강 둔치 사람들이 벌레같이 작은 점으로 보이는 그런 홍보 잡지 속의 한강이 아니다. 카메라는 집요한 시선으로 사람들의 표정과 행태, 한강 둔치 위 매점 내부의 모습을 잡아낸다. 그리고 분명히 한강의 일부를 이루되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수많은 구조물들, 즉 배수로, 환기구, 그리고 교각과 교량 구조물 사이사이를 헤집고 다닌다. 그렇다. 미군이 한강에 방류한 포름알데히드에 의해 돌연변이로 만들어진 괴물의 서식지는 한강은 한강이되 우리가 잘 모르는 한강, 즉 거칠고 기계화된 한강이다. 18세기에 겸재 정선이 화첩에 담았던, 그 유장한 자연하천으로서의 한강은 아닌 것이다.

한강은 한강이되 우리가 모르던 한강

봉준호 감독은 이렇게 텍스트의 성격을 강화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해체하고 대신 다른 것을 내놓는다. 이른바 말하는 ‘봉준호식 유머’라는 것도 결국 이러한 과정이 만들어내는 절묘한 간극 속에서 제 기능을 발휘한다. 이 간극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고 스스로 웃는, 독특한 심리적 거리를 부여받는다. 마치 일본영화 <담뽀뽀>를 통해 작은 일에 목숨 거는 일본인들의 모습에 일본인들 스스로가 웃었던 것처럼.

어쩌면 감독 자신이 그러한 간극 속에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본인이 어디에선가 밝혔듯이 그는 1960년대 후반생으로 전형적인 ‘386’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 시대를 상징하는 ‘운동권의 추억’이 전혀 없는 사람 또한 아니다. 그래서 그는 괴물 못지않게 괴물스러운 우리 사회의 이런저런 모습에 비수 같은 블랙유머를 날리지만, 동시에 이런 사회를 상대로 싸운 386에 대해서도 마냥 친절하지만은 않다. 운동권 출신 백수 남일(박해일)이 맡은 분열증적인 역할은 이러한 감독의 시선을 여과없이 드러낸다. 그러나 이것은 외줄타기처럼 아슬아슬한 태도다. 진지한 주장을 적당한 유머로 감칠맛나게 포장하는 것이 봉준호 영화의 트레이드 마크라고는 하지만, 언제까지 이럴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이제 그것을 들려줄 때가 되지 않았을까.

봉준호 감독이 바라본 우리 도시의 모습에 대해 생각해본다. <살인의 추억>에서도 그랬지만 이번에 <괴물>을 보면서 나는 그가 우리 사회의 보이지 않는 이면에 비상한 관심을 갖고 있다고 느꼈다. 그는 순수하게 전원적인 자연도, 그렇다고 고도로 발달된 기계도 아닌 어정쩡한 어딘가를 탐색한다. 건축적 용어로는 변방적, 경계적 공간들이다. 그래서 농촌을 농촌답게 하는 논이나 밭보다는 하수구나 무덤, 그리고 도로 같은 것들에 더 관심을 보인다. <살인의 추억>을 보고 나면 ‘농촌이 이렇게 흥미진진한 곳이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변방적 공간에 대한 관심

도시에서도 비슷한 시선은 유지된다. <괴물>에서 감독은 세련된 기계로서의 도시적 이미지를 철저하게 배제하려 애쓴다. 남일이 현서(고아성)의 위치를 추적하기 위해 이동통신사에 근무하는 친구를 찾아가는 장면이 그 대표적인 예다. 물론 추적하는 경찰을 따돌리기 위해서였겠지만, 여기서 그는 이런 건물을 찾아갈 때 지나게 마련인 넓은 도로가 아닌 도시의 뒷골목을 따라 건물에 접근한다. 그래서 그 유리 건물은 도시의 작고 낡은 건물들 위로, 마치 정글 속에 떠오르는 고대의 유적과도 같이 비일상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렇다고 할리우드영화에 종종 나오는, 근사한 야경 속에 경관 조명을 받아 환상적으로 떠오르는 세련된 기계로서의 고층 빌딩은 결코 아니다. 감독은 자기가 어디서 누구를 위해 영화를 만들고 있는지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싫건 좋건 이것이 우리 도시의 모습이다. 대자본이라고 해봤자 대부분 규모가 그리 크지도 않고, 크고 작은 자본들이 서로 불편하리만큼 밀접하여 만들어내는 도시, 대기업 사옥 바로 옆에 개인이 운영하는 구멍가게가 엄연히 현존하는 도시, 그것이 바로 우리 도시의 모습이다. 어정쩡한 인간 강두만큼이나 어정쩡한 기계가 우리의 도시인 것이다. 봉준호 감독은 과장이나 속임수없이 이런 도시의 속성을 솔직하게, 그러나 기분 나쁠 정도로 정확하게 그려낸다. 아마 그런 입장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장면이 강두가 고문에 가까운 바이러스 검사를 받던 의료 공간일 것이다. 처음에 이곳은 마치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태엽 오렌지>를 연상시킬 정도로 정교하면서도 냉혹하게 작동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강두가 탈출하고 이 장소의 엉뚱한 실체가 드러나면서 관객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상태가 된다. 기계와 자본, 그리고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갖가지 힘들에 대한 뿌리 깊은 냉소와 분노가 지칠 줄 모르는 감독의 유머와 공존하는 장면이다. 건축가의 시선으로 보건대 단연 이 영화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장면 중 하나다.

어정쩡한 도시 공간에 대한 솔직한 스케치

그리고 이제 모든 이야기의 배경, 즉 한강이 있다. 이 영화에서 한강의 장면들은 압권이다. 이것은 결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공식적인 한강의 모습이 아니다. 엄청난 스케일의 교각 앞에서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강두(송강호), 괴물을 추적하다가 교량의 철골 구조물(속이 비어 있는 ‘box beam') 속에서 기어나오는 남주(배두나), 그리고 괴물에 의해 원효대교 부근의 좁은 배수구로 잡혀온 현서 등이 겪은 한강은 둔치에서 인라인을 타거나 유람선을 타고 잠실과 여의도를 왕복해본 사람들이 겪은 한강과는 완전히 다른 그 무엇이다. 도시하부구조(urban infrastructure)에 대한 감독의 유별난 관심은 나로 하여금 혹시 그가 토목공학 전공자가 아니었나 하는 의문이 들게도 한다. 여기에는 이런 구조물을 실제로 만들거나 관리하는 사람이 아니면 갖기 힘든 시선이 분명히 존재한다. 심지어 이런 장소들에 대한 관심이 먼저고 나중에 이를 배경으로 영화를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든다. 감독이 텍스트와 맺고 있는 관계는 때론 이렇게 끈적끈적하기조차 하다.

예술이 우리에게 주는 효과의 하나는 세상을 다르게 보도록 한다는 것이다. 예술의 힘을 강조하는 수많은 주장들에도 예술이 세상 그 자체를 직접 바꾸지는 않는다. 그러나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생각을 바꿔놓을 수는 있다. 그러면 오히려 세상이 조금씩 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 봉준호 감독이 주는 의미는 이런 사실을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깨닫게 해준다는 데 있다. 게다가 그는 이런 성과를 지금의 여기, 즉 현대의 한국적 텍스트를 가지고 이루어내고 있다. <괴물>은 감독의 그런 태도와 입장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면서, 동시에 그의 다음 행보가 과연 무엇일까를 묻는 의문부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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