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인간의 기억과 믿음은 진실일까? <유레루>
2006-08-30
글 : 김지미 (영화평론가)
인간 내면과 진실에 관한 질문을 제기하는 <유레루>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가끔 학교나 길에서 믿음 없이는 건널 수 없는 어떤 절벽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들을 만날 때가 있다. 그들이 건네는 작은 수첩 크기의 그 팸플릿에는 우리의 인생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그림이 있는데, 맨 끝부분엔 인간의 힘으로 절대 건널 수 없는 절벽이 있다. 인간이 그것을 건너려면 자만심을 버리고 신(그들이 말하는 신은 기독교적 유일신이다)에게 존재를 의탁하며 믿음을 가져야만 한다. 나는 <유레루>에서 타케루와 미노루 형제가 건넜던 그 낡고 흔들리는 다리를 보며 그 그림을 떠올렸다. 사람들은 믿음을 통해서 할 수 없는 것을 하게 되거나, 보지 않은 것을 보게 된다. 반대로 자신이 한 행동을 부정하거나, 본 것이 사실임을 시인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 영화 안에서 ‘사실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반복적으로 제기되지만 실제로 감독은 사실에는 관심이 없다. 중요한 것은 사실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태도이며, 무엇에 의해 사실이 인정되거나 거부되는가의 문제이다. 그날 하스미 계곡의 그 다리에서는 두 형제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흔들리다’(ゆれる)의 숨겨진 주어는 ‘다리’가 아니라 ‘마음’이다.

기억과 믿음의 함수관계

유망한 사진작가인 타케루는 어머니의 일주기를 맞아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는 아버지의 주유소에서 옛 애인 치에코를 보지만 모른 척한다. 타케루가 그녀를 욕망하기 시작하는 것은 형과 그녀의 관계를 의심 혹은 질투하면서부터이다. 그래서 그는 치에코와 관계를 가진 이후 두 가지 문제에 봉착한다. 하나는 자기를 따라나서겠다는 그녀의 존재가 부담스럽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치에코를 좋아하는 듯한 형이 둘의 관계를 눈치채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다. 이때부터 타케루의 마음은 줄타기를 시작한다. 치에코와의 관계를 형에게 들키지 않으면서 그녀를 자신의 삶에서 떨쳐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복잡한 심사로 얽혀 있는 세 남녀 타케루, 미노루 그리고 치에코는 ‘하스미 계곡’으로 피크닉을 간다. 그 계곡의 낡고 오래된 다리에서 치에코는 추락한다. 그녀는 타케루를 보면서 그 다리를 건넜지만, 그녀의 곁에 있었던 사람은 미노루였다. 미노루가 그녀에게 뻗었던 그 손은 구원의 손이었을까 아니면 원한의 손이었을까.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영화는 극적인 순간을 보여주지도, 들려주지도 않는다. 오로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들과 격하게 흘러가는 물살로 대신한다.

타케루는 사건 직후 큰아버지를 변호사로 선임하고 형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타케루는 그 현장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기억’ 아니라 ‘믿음’을 기반으로 형의 무죄를 주장한다. ‘네가 보지도 않았다면 (미노루가) 아무것도 안 했다는 걸 어떻게 아냐’는 큰아버지의 질문에 ‘형 성격 아시잖아요’라고 대답한다. 그러니까 타케루는 무엇인가를 보았지만 그 장면의 의미를 알 수 없었고, 처음에는 알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단지 형의 평소 성품에 대한 그의 믿음과 범죄자의 동생이 되고 싶지 않은 자신의 이기적인 희망으로 진실의 자리를 가득 채웠던 것이다.

‘기억’의 문제는 영화의 처음부터 대두되는데, 그것은 묘하게도 ‘하스미 계곡’과 연관되어 있다. 형제가 ‘하스미 계곡’에 치에코와 간 것이 처음은 아니다. 그곳은 어린 시절 그들이 부모님과 함께 놀러갔던 곳인데, 미노루의 기억 속에 그곳은 가족이 행복했던 한 때를 보낸 곳인 반면, 가족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타케루에게 ‘하스미 계곡’에서의 가족 피크닉은 존재하지 않는다. 미노루에게 가족 영화를 찍어 영사기에 돌리는 것을 좋아했던 어머니는 타케루에게는 냄새나는 주유소에서 아버지에게 노동력을 착취당했던 불쌍한 존재일 뿐이다. 어쩌면 이 상반된 기억이 미노루는 고향에 남아 주유소를 지키고, 타케루는 그곳을 떠나 도쿄로 향하게 함으로써 두 형제의 상반된 삶을 낳았는지도 모른다. 과거의 ‘하스미 계곡’에 대한 기억은 두 형제의 삶을 분리시켰지만, 치에코가 떨어져 죽은 현재의 ‘하스미 계곡’은 두 형제의 삶을 얽어매기 시작한다.

대니얼 L. 쉑터와 일레인 스케리(<뇌와 기억, 그리고 신념의 형성>)에 의하면, 사람들은 ‘기억’이라는 단어를 스스로 경험한 구체적인 사건이나 정신적 경험에 대해서 사용하며, ‘신념’(belief)은 구체적인 맥락이 없는 과거 혹은 현재의 일반적인 사건에 관한 광범위한 정신적 경험에 사용하지만, 사실성(veridicality)의 여부가 주요 관심사가 될 경우 이 두 개념은 구분하기 어렵다고 한다. 즉, ‘기억은 발생했던 일에 대한 신념이며 신념은 기억으로부터 구성되고 강화된다’. 처음에 형의 무죄를 주장했던 타케루의 기억이 전환되는 순간은 ‘형은 정직한 인간이다’라는 신념에 금이 가면서부터이다. 타케루는 형이 치에코가 술을 마실 수 없다는 사소한 사실을 숨겼다는 것을 안 뒤 형의 모든 말과 행동에 숨겨진 의도가 있었다고 의심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다리 위에서 형이 치에코에게 내밀었던 손길이 밀쳐내는 것이었다고 증언한다. 타케루의 기억은 그가 미노루가 어떤 인간이라고 믿느냐에 따라 다르게 구성되는 셈이다. 니시카와 감독은 타케루와 미노루 형제 사이의 치에코의 죽음을 둘러싼 미묘한 갈등을 포착함으로써 믿음과 기억간의 미묘한 함수관계를 보여준다.

진실은 이미지를 통해 재구성된다

<유레루>에서 ‘사진’은 매우 중요한 모티브로 작용한다. 타케루는 사진작가이면서 어머니의 영정사진 한장 제대로 찍어주지 못했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타박을 받는다. ‘사진’은 그가 가족을 떠나 자립할 수 있는 수단이었던 동시에 가족에 대한 소홀함을 보여주는 도구이기도 하다. 먼지 쌓인 어머니의 유품 속에서 찾아낸 필름조각들은 그에게 잊고 있던 기억들을 되살려준다. 어머니가 찍은 영상 속에서 히야카와 가족은 아름답고 행복하게 기억된다. 이 작품에서 카메라를 든 자가 어느 곳에서 사진을 찍었는가 혹은 찍지 않았는가의 문제는 피사체에 대한 그/그녀의 관심과 애정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영화적 진실은 카메라를 조종하는 시선을 통해 구성된다. 대상을 매체를 통해 변형시킴으로써 미를 성취하는 다른 예술 장르와 달리 영화는 사물의 이미지를 직접적으로 전달하기 때문에 객관성을 획득하기 수월한 장르라는 오해를 받는다. 그러나 관객이 접하는 것은 눈앞에 존재하는 무한대의 사물과 인물들을 일정한 각도에서 촬영한 필름조각일 뿐이다. 그 필름조각들이 어떻게 조합되느냐에 따라 그것들은 전혀 다른 지적·정서적 효과들을 산출하게 된다. 감독은 제한된 시간 안에 자신이 원하는 세계를 구현하기 위해 인물과 사건에 대한 매우 제한적이고 통제된 정보들을 제시한다.

<유레루> 역시 두 시간이 채 안 되는 러닝타임 속에 7여년이라는 내러티브 타임을 담아내기 위해 인물과 상황에 대한 매우 함축적인 신들을 활용한다. 어머니 기일에 아버지가 엎지른 사케(술??)가 자신의 바지를 적시는 줄도 모르고 바닥을 닦는 미노루의 모습은 가족에 대한 자기 희생적인 태도를 한눈에 파악하게 한다. 또한 미노루가 감옥 안에서 보낸 7년 동안의 변화가 빨래를 둘러싼 세개의 신을 통해 압축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그렇지만 감독은 가장 중요한 갈등인 ‘하스미 계곡’에서의 사건에 대해서는 매우 유보적인 태도를 취한다. 관객은 미노루가 어떤 인물인지 종잡을 수가 없어진다. 그는 충동적으로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인물인가, 아니면 죽음의 현장에 자신이 존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죄책감을 느끼는 선량한 인물인가. ‘살인’을 통해 이전에 제시된 그에 관한 정보들을 수정하고 타케루의 최후 진술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가 이기적인 타케루의 욕망에 희생되었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오카 마리에 의하면 사건을 진술하는 행위, 즉 사건에 관해 서사를 형성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기억에 의해 영유될 수 있는 가능성과 사건의 ‘표상불가능한 잉여’, 암흑의 심연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라고 한다(<기억 서사>). 인간은 사건을 영유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에 영유되며 사건에 관한 기억을 서술함으로써 자기만의 사건을 갖는다. 마찬가지로 영화는 이미지와 소리를 통해 사건의 이야기함으로써 사건을 보는 몇 가지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야기된 것의 이면에는 언제나 이야기되지 않은 것들이 남아 있다. <유레루>는 인간이 신념을 통해 어떤 식으로 기억을 사후적으로 복원하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영화라는 매체가 이미지들을 통해 이야기를 어떻게 재구성하는지 보여준다.

이를 위해 감독은 플래시백과 사진을 적절하게 사용한다. 다리 위에서의 일은 법정 증언을 통해 사후적으로 제시되는데, 이때 카메라는 미노루의 시선보다는 멀리 있으며, 타케루의 시선이 되기에는 너무 가까이 있기 때문에 회상의 주체가 누구인지가 모호해진다. 그러므로 그것은 당시에 이들 형제가 본 것이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또는 타인에 대한 감정이 개입된 상태에서 상상적으로 재구성된 장면이라고 봐야 한다. ‘하스미 계곡’에서 치에코를 사이에 두고 미노루와 타케루가 함께 서 있는 모습을 담은 한장의 사진은 그러한 이미지의 허구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세명밖에 없던 계곡에서 그 사진은 누구에 의해 어떻게 찍혀진 것인지 설명되지 않는다. 감독은 의도적인 정보의 교란을 통해 ‘하스미 계곡’의 진실의 폭을 더 넓히며, 진실은 결코 밝혀질 수도 없고 어쩌면 단일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이 영화의 결말인 타케루의 후회와 반성으로 가득 찬 내레이션, 그리고 두 형제간의 화해를 의미하는 마지막 장면은 영화 전체가 품고 있던 질문에 위반되는 답변이다. 그러한 봉합은 관객에서 순간적 위안을 줄 뿐 이 작품이 전달하려고 했던 인간의 내면과 진실에 관한 복합적인 질문들을 무화시키며, 작품 전체를 단순한 오해와 그로 인한 비극적인 해프닝으로 전락시키기 때문이다. 감독은 두 형제를 서둘러 만나 미소 짓게 하기보다는 좀더 다층적인 의미로 확산될 수 있는 결말을 마련했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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