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 반 산트의 2002년작 <제리>가 아보 패르트의 <거울 속의 거울>로 시작한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반 산트 자신도 의도하지 않은 채 시작된 ‘명상 시리즈’는 무의식중에 앞길을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불러내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는 인간은 말에 인색하다. <제리> <엘리펀트> <라스트 데이즈>의 침묵이 숨막혔다면 내면의 목소리에 귀기울여봐야 한다. 실제 벌어진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된 세 영화는 모두 젊은 나이에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반 산트는 리버 피닉스를 떠나보내며 느낀 고통을 ‘죽은 자들이 살아 있던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으로 달래려 했다. 세 영화가 죽음 직전의 시간과 형상에 집착하는 건 우연이 아니다. <라스트 데이즈>는 자연과 은신처를 맴돌다 죽은 한 록스타의 마지막 날들을 붙잡는다. 별다른 의미를 찾기 힘든 그의 말과 행동은 그래서 부질없어 보이지만, 예고된 죽음이 자리하기에 그 모든 것이 역으로 의미를 획득한다. 그의 모습이 어느 때보다도 아름다운 건 곧 사라질 존재이기 때문이며, 그로 인해 보는 자의 안타까움은 더한다. <라스트 데이즈>의 주인공 블레이크는 <명상일기>를 쓴 헨리 데이비드 소로를 동경했는지도 모른다. 명예와 현실적 유혹을 뿌리치고 자연의 삶을 선택한 둘은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이미 마약과 환멸에 찌든 블레이크는 평안을 구할 수 없다. 블레이크는 성공과 구원과 친구의 상징으로 기능하는, 하지만 그에게 해답을 주지 못하는 세 방문객을 접한 뒤 구원의 부재를 노래하고, 이어 ‘살아남은 록스타’ 킴 고든의 방문을 받는다. ‘죽음을 앞둔 자’는 ‘살아남은 자’의 위로를 시간을 뒤돌아 들은 다음 이제 남은 게 죽음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그런데 <라스트 데이즈>의 죽음은 <제리>나 <엘리펀트>의 그것과 달리 사뭇 평화롭다. 그건 아마도 반 산트의 마음이 아닐까 한다. 엔딩 크레딧과 함께 흘러나오는 ‘킹스 싱어스’의 <La Guerre>는 제목 그대로 삶의 전투를 마치고 안식을 찾은 자에게 들려주는 천사의 합창처럼 들린다. DVD 부록인 메이킹 필름(20분, 사진), 47분께의 롱 돌리 숏 촬영과정(9분), (앞 돌리 숏의 실내장면에 해당하는) 인상적인 연주를 수록한 삭제장면(8분), 두편의 뮤직비디오 등의 분량은 많다고 할 수 없으나 풀밭 위의 소풍 같았던 현장 분위기와 치열했던 속 모습을 고스란히 전한다. 두 번째 디스크에 별도 수록된 1.78:1 아나모픽 화면비율 영상은 와이드스크린 모니터용이지 감독의 본래 의도와는 상관없다.
씨네21
검색관련 영화
최신기사
-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희망의 건너편
-
[인터뷰] 배우의 역할은 국경 너머에도 있다 TCCF 포럼 참석한 네명의 대만 배우 - 에스더 리우, 커시 우, 가진동, JC 린
-
[인터뷰] ‘할리우드에는 더 많은 아시아계 프로듀서들이 필요하다’, TCCF 피칭워크숍 멘토로 대만 찾은 미야가와 에리코 <쇼군> 프로듀서
-
[기획] 대만 콘텐츠의 현주소, 아시아 영상산업의 허브로 거듭나는 TCCF - 김소미 기자의 TCCF, 대만문화콘텐츠페스티벌 방문기
-
[비평] 춤추는 몸 뒤의 포옹, <아노라> 환상을 파는 대신 인간의 물성을 보여주다
-
[비평] 돌에 맞으면 아프다, <아노라>가 미국 성 노동자를 다루는 방식
-
[기획] 깊이, 옆에서, 다르게 <아노라> 읽기 - 사회학자와 영화평론가가 <아노라>를 보는 시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