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물정 모르는 아이일 거라고, 그저 예쁜 소녀일 뿐이라고, CF로 만들어진 허구의 세상에서만 숨쉴 수 있는 인형일 거라고 생각했다면 우리는 아직 이 소녀를 모르는 거다. 1999년, 기묘한 소음과 허밍, TTL이라는 문신을 새기고 우리를 응시하던 소녀에게선 피노키오의 나무냄새가 났다. 그러나 2001년, 8개월 동안 부산의 짠내나는 바람에 단련된 임은경에겐 인간의 땀냄새가 풍겨나왔다.
현재 막바지 작업중인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의 촬영 틈새, 서울의 스튜디오로 날아온 임은경은 여전히 눈을 떼지 못하게 예쁜 소녀였지만 영화 초반에 비하면 한껏 밝아지고 웃음도 잦아졌다. 현실인 듯 가상이고 가상인 듯 현실인, 오락실에서 동전바꿔주는 날라리 소녀 ‘희미’이자 자신을 외면한 세상에 분노하는 성냥팔이 소녀 ‘성소’인, 모든 경계가 불분명한 데뷔작이 자신을 힘들게 했음이 분명한데, 이 소녀는 그저 이 영화가 고맙다고 한다. “어둡게 자라서 말도 안 하고, 표정도 없고 그랬는데, 영화 찍으면서 많이 밝아지고 명랑해져서 좋아요. 또 오랜 시간 동안 여러 사람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도 재미있고요.”
하지만 촬영 초반 성소의 캐릭터를 잡아가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장선우 감독은 마치 숙제를 던져준 선생처럼 임은경이 첫 번째 과제를 풀어내는 과정을 지켜볼 뿐이었다. “‘스스로 학습’이었어요. 감독님은요. ‘그냥 네가 편한 대로 해, 네 느낌대로 해’ 그러셨는데요. 음… 이게 맞는지, 저게 맞는지 모르니까 그게 더 어렵잖아요?” 처음에는 이해가 안 돼도 그냥 쭉 읽어나갔고 두 번째부터는 꼼꼼히 읽었다. 그리고 시나리오를 읽은 주변 사람들에게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성소는 세뇌당한 불쌍한 아이야.” 세뇌당한다는 게 어떤 느낌일까? 전혀 감이 안 잡혔다. “성소는 억압받은 아이야.” 억압? 억압은 세뇌보다는 쉬웠다. “성소는 시스템에 세뇌당한 아이고, 어떻게 보면 학교제도란 것도 커다란 시스템이잖아요. 학교 다니면 늘 ‘이런 건 하면 안 돼’, ‘이건 해’ 하는 억압을 많이 받으니까요.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정말 성소처럼 다 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낄 것도 같았어요.”
그렇게 임은경은 서서히 자신만의 성소를 빚어나갔고, 꾸준히 시나리오 오른쪽 백지에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을 써내려갔다. “다음날 찍을 시나리오 옆에 그 신에 대한 막연한 제 느낌들을 썼어요. 그전 상황은 어땠지? 지금 성소는 어떤 마음일까. 내가 바구니를 왼손에 들고 있었나, 오른손에 들고 있었나, 뭐 이런 거요.” 그냥 고민하는 것보다 눈으로 보는 게 정리가 잘 되었고 좀더 공부하는 자세로 진지하게 영화를 대할 수 있었다.
“저 원래 겁이 없어요.” ‘헤헤’ 웃는다. 성소의 변화를 담은 2부를 찍기 위해 지난 겨울 임은경은 혹독한 액션훈련을 거쳐야 했다. 하지만 와이어에 매달려 거친 액션을 하는 것도, 높은 건물에서 단숨에 떨어지는 것도, 몸무게가 버티지도 못할 만큼 무거운 총을 들고 쏘아대는 것도, 눈앞에서 쉴새없이 터지는 총소리도,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정작 이 열아홉살 ‘큰애기’가 무서워하는 것은 조그마한 곤충이다. “특히 귀뚜라미가 무서워요. 가느다란 발 많이 달린 건… 으으으… 싫어요.” 한두번 들었을 말이 아닌 “예쁘다”는 칭찬에 두볼이 금새 빨갛게 달아올라 어디라도 숨을 태세이고, 처음 번 돈으로 부모님께 보약을 해드렸다는 이야기에 슬그머니 미소를 짓는 임은경. 그와 있으면 세상 누구라도 착해질 것 같았다.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부모님께 할말이 있으면 은경의 손을 통했고, 그렇게 어린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일찍 고된 세상을 알아버렸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에게서는 일찍 알아버린 세상에 대한 절망이나 냉소는 찾아볼 수 없다. “친구들에게 특별한 부탁을 했어요. 자기는 자기가 어떤 상태인지 잘 모르잖아요. 그래서 내가 조금이라도 변했는지, 잘난 척하는지, 못되지진 않는지 꼭 말해달라고요. 나쁘게 변하는 건… 안 좋잖아요. 영원히 그렇게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혼자서 끙끙대며 뽑아낸 고치실로 자신만의 무균실을 만들고, 오염된 세상을 불러들여 정화시키는 필터 같은 소녀. 2001년, 충무로 거친 들판에 작고 여린 소녀의 몸을 빌려 메시아가 재림했다.
대학
친구들은 다 고3이라 수능준비해요. 물론 저도 대학에 가고 싶은 생각이 있지만 영화작업을 좀더 하고 싶어요. 또 ‘쟤는 연예인이니까 대학갔을 거야’ 하는 오해도 받고 싶지 않고, 학교갈 시간도 없을 텐데 간판만 있는 대학생도 하기 싫어요. 정말 공부하고 싶을 때, 충실할 수 있을 때 갈래요. 일문학과에 가고 싶어요. 일본엔 일 때문에 2번 정도 갔는데, 공기도 안 좋고, 사실 별로 살고 싶은 곳은 아니지만 전 일본어가 좋아요. 소리도 예쁘고요.
사람들의 관심
부담도 많이 되고, 물론 싫을 때도 있죠. 하지만 나를 바라봐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내가 있는 거니까…. 그렇게 생각해요. 고마운 일이라고.
요즘 제일 재미있는 것
비트마니아가 재미있는데 잘 못해요. 그래서 자주해요. 또 ‘틀린 그림찾기’도 좋아해요. 음… 집중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많이 되거든요.
시나리오를 이해하는 임은경만의 비법공개
불안하면요… 으음… 시나리오를요… 그냥, 뚫∼어져라 쳐다봐요. 그럼 좀 위안이 되거든요. 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