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1 9월24일(일) 밤 12시30분
한 남자가 있다. 그는 간호사다. 이 남자는 평소 짝사랑하던 여인이 식물인간이 되자, 그녀를 돌보기 시작한다. 식물인간이 되지 않았다면 그녀는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이건 그에게 더 없는 행운이다. 그는 가만히 누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여자와 일상을 나눈다. 그는 자신이 그녀와 진짜 사랑에 빠졌다고 믿는다. 또 다른 남자가 있다. 투우사 여인을 사랑했지만, 그녀 역시 사고로 식물인간이 된다. 한 병원의 두 남자와 식물인간이 된 두 여자. 그리고 사랑.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얇은 실로 연결된 이들의 인연을 촘촘하게 엮어 기이한 멜로(?)를 만들어낸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이 영화는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개인적인 감상을 밝힐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녀에게>에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그 부분을 설명해내지 못한다면, 이 영화는 그저 독특한 멜로 혹은 지극히 감상적인 남성 판타지 수준을 넘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가장 문제적인 장면은 이것이다. 베니그노(남자 간호사)는 식물인간이 된 여성을 돌보는 것을 넘어, 그녀의 몸을 사랑한다. 그리고 결국 그녀는 임신을 하고, 그는 강간혐의로 감옥에 간다. 도대체 알모도바르는 무슨 생각을 한 걸까. 식물인간은 정신만 죽었을 뿐, 육체는 살아 있으므로 사랑은 가능하다고? 식물인간은 사랑을 느끼지 못할 거라는 우리의 편협한 생각이 정신 중심적이라고? 그의 사랑으로 그녀는 기적같이 삶을 되찾았다고? 사회의 법으로, 이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그의 사랑은 숭고하다고? 이 사랑을 나쁘다고 판단하는 사회가 더 폭력적이라고? 이러한 분석이 유치하다고 비난받을지라도 분명한 것은 알모도바르가 이 위험한 순간을 약간의 신파와 남성 판타지로 너무 단순하게 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녀에게> 속에 삽입된 또 다른 영화, <애인이 줄었어요>(알모도바르가 직접 만든 흑백무성단편영화)는 베니그노의 행위가 강간이었음을 우회적으로 드러내주는 수단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렇게 보더라도 알모도바르의 태도는 여전히 미지근하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에게>는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이나 <나쁜 교육> 혹은 곧 개봉할 <귀향>보다 퇴행적으로 보인다. 그 퇴행성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는 물론 관객 각자의 몫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카에타노 벨로소의 그 유명한 비둘기 선율, “쿠쿠루쿠쿠우우”만은 정말 감동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