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인터뷰] <라디오 스타>의 이준익 감독
2006-09-21
글 :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내 나이에 맞는 영화 찍고 싶었다”

이준익(47) 감독이 또 ‘업’됐다. <왕의 남자>가 1200만명 관객을 동원하며 역대 흥행 1위로 올라선 게 엊그제 같은데, 그 뒤에 만든 <라디오 스타>(28일 개봉)가 지난 7일부터 시사회를 열기 시작한 이후로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17일 이 감독을 만났을 때도, 그는 영화 본 지인들로부터 오는 찬사의 문자 메세지를 열어보느라 바빴다.

한물 간 가수(박중훈)와 그의 매니저(안성기) 사이의 관계가 영화의 중심이다. 처음 구상은 다르지 않았나.
=처음엔 좌천된 여자 프로듀서와 떠밀려난 왕년의 가수왕이 영월 방송 프로그램에서 만나 생기는 로맨스가 중심 축이었다. 거기에 매니저 기능이 좀 있고, 영월 방송국의 소시민적인 직원과 주민들 이야기가 붙어있었다. 그런데 그런 로맨스가 지금 사람들에게 먹힐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또 그게 내 나이의 감독이 할 만한 이야기인가 회의스럽기도 했다. 그래서 매니저와 가수로 중심축을 이동시켰다. 굳이 매니저와 록 가수의 얘기에 한정되는 게 아니라, 먼 길을 오래 같이 걸어온 동반자의 이야기. 이게 뭔가 삶을 더 깊이있게 접근할 수 있는 통로가 될 듯했다.

이야기는 단순한데, 뜻밖에 사람들의 삶을 위로하는 품이 넓고 깊다.
=성공 뒤에 온 실패의 지난함 같은 건 현대인의 일상에서 상존하는 감정이 아닌가. 특히 70~80년대 학번 세대에게는 충분히 익숙한 감정일 것같다. 인생에서 성공과 실패는 한 시기의 현상일 뿐이다. 성공하면 반드시 행복한가. 그러면 실패하면 불행해야 하는데 그게 아니다. 성공과 실패를 떠나서, 최선을 다했던 모습 안에는 비루하고 남루한 일상만 남아도 소중한 가치가 있다. 그건 대다수 현대인을 위한 위로가 된다. 관객이 웃고 우는 게 과도한 경쟁사회를 사는 현대인의 고단함에 기인한 거다. 학생도 마찬가지다. 얼마나 고단해. 빨리 학생 신분을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입시 끝나면 달라지나. 사회에서 더 긴 터널 안에서 뜀박질해야 하고. 과당경쟁 시스템에서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 고단함이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을 웃고 울리는 것 아닐까.

영화가 특별히 강한 갈등을 갖고 있지도 않은데.
=영화의 중심이 인물들의 내적 갈등이다. 한물간 가수가 자존심은 남아서 주먹질하고, 매니저는 뒷수습하면서 돈 빌리러 다니고. 어찌 할 방법이 없어서 결국 영월로 가고. 둘 다 지독한 루저들이다. 그런데 영월이라는 변방에 가서 그곳 주민들과 소통하면서 도시에서 가졌던 출세, 성공 같은 사회적 욕망으로부터 해제된다. 그 순간에 다시 사회적 욕망이 손을 내민다. 음반업자가 음반 취입하자고 한다. 얼싸하고 달려가보니 업자가 매니저더러 당신은 빠지라고 한다. 매니저는 더 큰 박탈감을 안고서 가수와 정 떼기를 하려 하고…. 이런 유혹과 둘 관계의 균열이 외적 갈등이지만, 관객들은 둘의 이미 내적 갈등을 알고 있다. 원래 외적갈등과 내적갈등이 동일한 크기로 전달되면 영화가 무척 평면적이 된다고. 이 영화에서 외적 갈등에 기인한 긴장은 그리 중요하다고 보지 않았던 거다. 그 바닥의 내적 갈등을 관객들이 따라오도록 하는 게 중요하지. 그러다보면 어디서도 존경받지 못하는 존재들이 끝에 가면 가장 존경할 만한 우정을 간직한 인간들임이 드러나는 거지. 왜 글에도 텍스트가 있고 컨텍스트가 있잖아. 시에는 활자와 행간이 있고. 내적 갈등이 컨텍스트이고 행간인데 이 영화의 텍스트, 외적 갈등은 너무 통속적이잖아. 그런데도 관객이 반응한다는 건 컨텍스트에 대한 공감이 있다는 말 아닐까. 이 영화와 유사한 영화를 찾아보기 어렵지 않나. 어떤 장르에 쉽게 귀속되지 않는 영화 아닌가. 나는 영화에서 영화를 따오지 않고 세상에서 영화를 가져오려 한다. 영화는 세상을 담는 그릇이라는 게 내 지론이고.

영화의 울림이 큰 건 내적 갈등을 중시했기 때문이라는 얘기인가.
=내적 갈등이 깊으니까 외적 갈등은 간단하게 가도 된다는 거지. 내 영화가 늘 그렇지만 이 영화도 비주류, 마이너리티, 아웃사이더들이 세상에서 자기 존재감을 확인하는 방식에 관한 거고.

에피소드도 단순하다.
=이 영화는 관계에 대한 영화다. 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고단하게 삶을 지탱하면서 함께 해온 관계. 그런데 에피소드가 관계를 깨면 안 된다. 에피소드는 스케치에 그쳐야 한다. 영화의 감흥이 우연히 얻어진 것처럼 보려고 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런 걸 다 정확히 의도하고 한 거라고.

이 영화에선 영월 여관의 한 방에 가수와 매니저 둘이 자면서 시간을 흘려보내는 장면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돌이켜보면 우리도 그렇게 죽치면서 보낸 시간이 많았다. 어느 때부터 그러지 않고 멀어지면서 서로들 사회에서 뭔가가 돼간 건데 그 뒤로 각자 좁아지고 비굴해지고 뭔가를 잃어간 것같은 생각이 든다. 그래서 아직도 함께 죽치는 이 둘의 모습이 울림을 주는 것같다. 과거에 우리도 그랬지 하는 향수가 아니라, 지금 순간에도 저렇게 죽치는 이들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고 그게 소중해 보인다고 할까.
=그게 아웃사이더의 미학 아닐까. 사회조직에 들어가면 다 서열화된다. 어쩔 수 없이 비겁해지는 게 있다. 반면 아웃사이더들은 비겁해질 건덕지가 없다. 그런데 조직에 들어간 이들은 또 다 행복한가. 자기 상황을 객관화시켜서 보면 누구나 아웃사이더 아닐까. 그건 대통령도 마찬가지일 거다. 자본주의 사회의 서열화, 계급화 안에선 누구나 상대적으로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다. 국내 감독 중에 내가 나이로 랭킹 안에 들어가는데 내 나이에 맞는 영화가 뭘까. 이제 밀려난 70~80 세대의 마음을 알아주는 영화. 그걸 찍는 게 맞지 않을까. 또 그런 영화를 사람들이 많이 본다면 그건 세대간의 단절을 회복하는 계기가 될 거다. 이 영화는 한국 대중 음악의 삼대를 다루는 것이기도 하다. 일부러 한국 록의 1세대인 신중현의 노래를 세곡이나 넣었다. 그리고 주인공 최곤은 2세대에 해당하고, 영월 시골 밴드로 나오는 노브레인은 3대인 것이고. 한국 팝의 연대성을 신중하게 고려해서 곡도 배치하고, 멘트도 넣은 거다. 나는 영화의 미학적 기능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영화의 사회적 기능을 추구한다. 영화가 카타르시스를 줘야 할, 즉 정화해야 할 사회의 페이소스(고통)가 뭐냐를 찾는 거고. 미학적 기능을 추구할 의지는 아예 없다. 지식이 감동을 주는 걸 봤는가. 감동을 주는 건 행동이다. 행동주의자가 없으면 지식인들은 밥 굶는다. 지식인은 행동주의자를 기술하면서 먹고 산다. 나는 지식인이 되고자 노력해본 적이 없다. 학력도 떨어지고. 아이큐도 97이다. 예비고사는 (340점 만점에) 160점 맞았고.

영화 안에서 노브레인을 일석 삼조로 쓰고 있는 것같다. 음악 필요할 때 음악 해주고, 코미디 필요할 때 코미디 해주고, 대사 필요할 때 대사 쳐주고.
=노브레인은 일상이 그래. 걔네들 그렇게 살아. 연기가 아니다. 그건 다큐멘타리야. 그들을 넣은 게 이 영화가 20대에 호소할 게 없어서이다. 30~40대는 노브레인 모른다. 10~20대는 안성기, 박중훈을 모르고. 다리를 놓자는 거지.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현재와 손잡을 여지가 없었다. 현재성이 없어. 정서나 배우로 치면 <라디오 스타>가 훨씬 올드한 영화인데 여기엔 김추자부터 노브레인의 ‘넌 내게 반했어’까지, 노래로 과거와 현재 30년을 통으로 묶잖아. 그래서 현재 관객에게도 소구할 수 있다고 보는 거지.

처음 구상처럼 멜로의 틀 안에서도 긴 세월을 함께 해온 관계를 다룰 수 있지 않나.
=그렇지. 지금 이 영화에서도 두 명 중 하나, 예컨대 가수를 여자로 바꾸면 진한 멜로가 되는 것 아닌가.

만약 여자 가수와 남자 매니저가, 남녀의 애정이 아닌 동료애로 20년 희노애락을 같이 한다면 얘기가 먹힐까.
=먹힐 걸. 난 사랑을 안 믿어. 그걸 우정으로 채우는 거고. 난 마음을 안 믿어. 한자로 마음 ‘심(心)’자는 획의 방향이 다 달라. 지리멸렬이야. 그건 마음은 변한다는 거다. 마음이 맞는 사람은 오래 못 간다. 뜻이 같은 사람은 오래 가지. 그게 동지 아닌가. 이런 생각도 한다. ‘마음을 믿는 건 지조가 없는 거다.’ 난 내 마음이 변하는 걸 알기 때문에 남의 마음이 안 변할 거라고 믿질 않아. 내 마음 변하는 건 용서하면서 상대방 마음 변하는 건 용서 못하는 건 무례한 인간이야.

다음 영화는 멜로 한다고 했는데, 마음을 안 믿는 사람이 멜로 찍어도 되나.
=제목이 <매혹>이고 정진영하고 하려고 하는데, 한번 가 볼라고. 호기심이 강해서. <왕의 남자> 때 다음 영화를 묻길래 <왕의 남자>에서 가장 멀리 간 영화를 할 거라고 했는데, 이 영화가 그렇지 않아?

정진영, 박중훈 등 배우는 계속 같이 가는데, 새 배우에 대한 호기심은 없나.
=새로운 길을 가는데 꼭 잘 모르는 사람하고 같이 가야 하나. 잘 아는 사람 하고 안 가본 길을 가는 게 새로운 거 아닌가. 새 사람하고 하려면 그동안 걸어온 길을 확인해야 하는데 그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같이 해온 사람은 잘 아니까. 새 사람이 어떤 길을 자꾸 가보자고 하는데 나는 이미 가 본 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나.

이번 영화는 경쟁 사회에서 지친 이들을 위로하는데, 당신이 출연한 광고는 증권회사 광고였다. ‘당신은 성공했지만 그래도 지금의 당신에 만족할 수 없다’는, 매우 성공 지향적이고 경쟁 중심적 광고다.
=광고 출연은 영화 감독으로서가 아니라 개인적인 거다. 안 해본 걸 해본다는 차원이고. 씨에프 모델이 되면 어떨까, 알고 싶기도 하고. 물론 돈도 되고. 여러 광고 중에 증권 광고를 택한 건 그래도 상대적으로나마 그게 산업자본에 보탬이 된다고 보니까. 만약 아파트 광고 같으면 하지 말아야지. 부동산투기를 가속화시키는 건데.

<왕의 남자> 성공으로 빚은 다 갚았나.
=40억원 빚 완전히 다 갚았다. 그런데 세금 낼 돈이 떨어져서 다시 빚져야 될 판이다. 이번 영화 잘 되면 세금 내는 거고. 난 아직도 ‘빚테크’ 하고 있다. 평생에 재테크 해본 적이 없다.

흥행 1위 감독으로 최정상에 올라보니 어떤가.
=남들이 나를 보는 눈이 바뀌었다. 하지만 나는 나를 보는 눈이 안 바뀌었다. 남이 나를 보는 눈이 진짜라고 하는데 과연 그게 진짜일까? 그것게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돈과 명예가 한꺼번에 들어온 케이스인데, 실제 내 일상은 바뀐 게 없다. <왕의 남자> 종영일 다음날 <라디오 스타> 크랭크인했고. <왕의 남자> 토론토영화제 초청됐는데, 이 영화 개봉 때문에 거기도 못 가고.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