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둘일 때 가장 빛나는 별, <라디오 스타>의 안성기, 박중훈
2006-09-22
글 : 이종도
사진 : 서지형 (스틸기사)

연극에선 무대에서 쓰러지기 전까지 배우를 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영화는 다르다. 나이가 들수록 소홀히 여겨지다가 쓸쓸히 퇴장하는 곳이 충무로다. 20년 넘게 주인공을 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가능하다고 안성기와 박중훈이 답한다. 1988년 <칠수와 만수>, 1993년 <투캅스>, 1999년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이후 7년 만에 그들이 <라디오 스타>로 손을 잡았다. 20여년에 가까운 우정의 세월, 20여년의 버디무비 같은 몇몇 순간을 그들에게 청해 들었다. 언제나 변하지 않고 거기 앉아서 엽서를 읽어주고 신청곡을 틀어주는 DJ들처럼 그 남자들은 거기 있었다.

순댓국 냄새와 배기가스 냄새가 뒤엉킨다. 낙원상가의 생기는 <칠수와 만수>, 그리고 <라디오 스타>의 생기와 닮았다. <칠수와 만수>를 다시 20년 만에 찍는 촬영현장 같기도 하다. 둘이 만난 첫 영화는 변두리 인생 영화였다. <라디오 스타>도 변방으로 밀려난 사내들의 이야기다. 달라진 건 둘 사이의 관계다. 18년 전 페인트공 칠수가 만수 방으로 찾아가 넉살좋게 뭉개면서 더부살이를 했지만, 오늘은 매니저 만수가 한물간 왕년의 스타 최곤 방에 가서 여관비를 줄이려다가 타박을 듣는다. 두 사람은 소풍 나온 표정으로 낙원상가의 번잡한 차도에서 감자튀김을 오물거리며 포즈를 잡는다. “내 영화 보고 눈물나긴 처음이야. 마음을 어루만지는 게 있나봐. 행복한 마약 같은 게 있나봐. 여섯번 봤어.” 삼청동의 밥집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안성기의 에쿠우스 옆자리에서 들은 얘기다.

“처음이라는 말처럼 설레는 단어가 있을까요. 첫울음, 첫눈, 첫만남….”-<라디오 스타> 중에서

1. 두 사람이 처음 만난 때는 1987년. 안성기가 <기쁜 우리 젊은날>을, 박중훈이 <미미의 철수의 청춘스케치>를 찍고 있었다. 이듬해 <칠수와 만수>를 함께하며 서로를 알아갔다.

“외모적으로 상당히 개성있잖아요. 장 폴 벨몽도 닮았단 얘기 많이 들었을 거예요. 유쾌하고 재미있고.”안성기
“<칠수와 만수> 때 친해졌죠. 많이 어려워했죠. 나이 차가 있었으니.”박중훈
“난 사회생활을 잘 못해요. 은행도 와이프가 가고 영화 생각만 하고 있고. 중훈씨에게 많이 물어보죠. 경조사할 때 얼마 해야 해? 어느 동네가 살기 좋아, 이런 거죠. 중훈씨는 이사를 많이 다녔으니까.”안성기

“내 인생 누구 땜에 조졌는데. 너 이 자식, 키워줬더니 그게 나한테 할 소리야?”-<라디오 스타> 중에서

2. 두 사람은 함께하는 것들이 꽤 많다. 부산영화제 부집행위원장, 집행위원 그리고 영화배우협회 이사장, 부이사장으로 머리를 맞대는가 하면 사는 동네도 비슷해 일주일에 서너번 운동을 함께한다. 인맥도 함께 담그고 있어 경조사도 같이하는 수가 많다. 그리고 여기에 영화 촬영까지 있다.

“가만 내버려둬도 안 만날 수 없어요. 나흘 전 오후 8시30분에 연락해서 10시 양재천에서 만나 8km 뛰었어요. 애들 데리고 가는 스키장도 비슷하고.”안성기
“내가 맞추는 것 같아. 안 선배는 날 배려해주시고. 뭐 하자고 했을 때 거절한 기억이 별로 안 나.”박중훈
“오히려 내가 한잔 더 하자고 당기지 않아서 덜 좋아하지.”안성기
“음식 결정의 95%를 결정하시거든요. 그 독재는 있으세요.”박중훈
“모든 판단을 논리적으로 해. 난 그런 쪽이 약해. 외로울 수 있거든. 혼자 결정해야 될 때 큰 힘이 되고.”안성기

여기에 낚시까지 더해질 뻔했다. 박중훈은 이번 영화를 찍으며 동강 일대에서 안성기와 함께 낚시도 했다. 그날 일을 마치면 낚시하러 다니고 저녁을 먹은 뒤에 철학을 논한다, 어디서 많이 들은 얘기 아닌가.

“난 어려서부터 낚시했어. 촬영지에 강이나 저수지가 있으면 가서 하죠. 낚시가 사람을 빠지게 하는 요소가 있어서(유혹을 안 했지).”안성기
“난 낚시랑 안 맞아.”박중훈
“막 당겨 가고 부르르 떠는 손맛이 없다 이거지.(몸을 흔들며)”안성기

“얼굴이 심하게 구겨진 인간이 밤이면 밤마다 영월 시내에 나타나 미인을 찾아 헤맨다고 합니다. 밤길 조심하시고….”-<라디오 스타> 중에서


3. <라디오 스타>에선 두 사람의 노래도 들을 수 있다. 고등학교 때 밴드도 했고 재수 시절 스탠드바에서 트로트를 부른 가수 출신이니 박중훈은 그렇다 치자. 그런데 안성기가 부르는 신중현의 <미인>이라.

“안 선배가 음정은 맞는데, 박자는 좀 안 맞아요.”박중훈

DJ의 경험과 18번도 거의 비슷하다.

“6개월 했지. <0시의 플랫폼>이라고. 83년 MBC AM에서 심야방송. 라디오는 예전부터 좋아했어. 화술에 도움이 많이 됐어. 더듬거렸는데 얘기가 정리되더라고.”안성기
“87년 KBS AM 밤 10시부터 12시까지 <밤을 잊은 그대에게>, 90년에 KBS 제2FM에서 <박중훈의 인기가요>, 1년씩 했어요.”
“18번은 워낙 레퍼토리가 없기 때문에. <오늘 같은 밤>으로 분위기 살려놓고 우린 빠지지.”안성기
“어차피 시킬 거 아니까 자청해서 듀엣으로 불러요, 어깨동무하고. 지난해 겨울에 레퍼토리 하나 추가했어요. <나도야 간다>.”박중훈

“니가 매니저가 뭔지 알아? 너 이 바닥 몇년 됐어?”-<라디오 스타> 중에서

4. 둘 사이에 서운한 건 없었을까. 물론 묻는다 해도 대답할 사람들은 아니지만. 안성기는 없다고 했고, 박중훈은 한참 고심하더니 이야기를 쥐어짜낸다.

“VIP 시사회 자리 선택권을 형님에게 드렸는데 진짜 좋은 자리 다 가져갔어. 나는 스키다시 자리만 가져갔지. 좀 남겨두시지, 할 수도 있는데 저번에 <한반도> 때 손님들을 못 챙기셔서 이번에 복구하려나보다, 이해했죠.”박중훈
“그러니까 좋아하지. 집에서 속상한 얘기도 슬쩍 우리는 해요. 집안사도 다 알다 보니까 나눌 수가 있어요. 서로 어루만져줄 수 있죠. 내가 낚시 좋아하고 중훈씨도 좋아하면 지루했을 거야. 서로 다르니까 이렇게 오래왔지.”안성기
“둘 사이가 유지되는 건 선망과 질투의 차이랑 같아요. 선망은 내가 가질 수 없는 거고 질투는 내가 가질 수 있는 거죠. 우린 서로를 선망해요. 제가 후배들에게 엄해요. 후배들이 부담스러워하는데 제가 분위기 잡고 있는데 이러세요. 야, 자식 왜 그러냐 임마. 그러면 후배들이 너무 좋아해요. 안성기 선배가 끼어들어서 제게 ‘너만 잘하면 돼’ 그러면 후배들이 그냥 막 뒤집어지는 거예요. 저는 안 선배한테 이러죠. 50년 연기하신 분이 왜 그래요. 그럼 안 선배가 너 몇년 했냐, 그래요. 20년 했는데요. 그러면 그때가 제일 좋아, 그러시죠.”박중훈

“형, 듣고 있어? 형이 그랬지? 저 혼자 빛나는 별이 없다며. 와서 좀 비쳐주라. 쫌.”-<라디오 스타> 중에서

5. 둘은 서로가 서로를 비쳐주는 별이거나, 청취자와 DJ이거나, 매니저와 스타이다. 적어도 둘이서 함께한 네 작품에서 그러했다. 둘에게 어느 순간 상대가 가장 눈부셨는지 물어봤다.

“1989년 겨울인데 그때가 엄청 추웠어요. <남부군> 촬영을 하는데 어마어마하게 추운 산골이야. 엑스트라가 수백명 되는데 비 맞는 장면을 찍는데 같이 밤을 새웠대요. 그래야 극한 상황에서, 안성기도 저러는데, 불만을 늘어놓지 못한다… <라디오 스타>에서 안성기 선배가 김밥 씹는 장면, 우산으로 기타 치는 장면이 가장 마음에 들어요. 그런데 그건 씹으면 되는 거고, 기타 치면 되는 건데, 그 시간 살아온 세월이 있기 때문에 그런 연기가 가능한 게 아닌가.”박중훈
“이준익 감독하고 보면서, ‘나 잘린 거야, 잘렸대?’ 그 장면 싸늘하잖아. 너무 좋고. 라스트신에서 콧망울 커지는 거, 왜 기분 좋으면 잘하는 거 있잖아.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 우 형사 캐릭터는 박중훈만의 창의적이고 사실적인 캐릭터잖아. 그전까진 운동화 신은 형사가 없었지. 아, 참, <우묵배미의 사랑>도 좋다. <그들도 우리처럼>도 있잖아. 너 좋은 영화 많이 했구나.”안성기
“<칠수와 만수>에서 나 8개월째 같은 양말 신었잖아요. 촬영할 때마다 그 양말 신는 거야. 페인트공 양말은 그래야 될 것 같아서.”박중훈
“왜 그랬냐. 어리석은 짓이었지. 그 어리석음을 나도 했잖니. <남부군>에서. 머리 안 감은 거. 23일간 인가. 빨치산이 어떻게 추운데 머리를 감았겠느냐 이거지. 오히려 영화에선 기름기가 너무 나와서 멋있게 보이더라고.”안성기

안성기 의상협찬 c.k 캘빈클라인, 솔리드 옴므 박중훈 의상협찬 케네스콜·스타일리스트 신우식 실장·메이크업 박미정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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