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촬영장에서 있었던 일. 영화에서 연인으로 나오는 두 배우가 스탭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다. 상대역인 남자와 조금 떨어져 앉아 있던 여자가 밥먹는 내내 상대방 모습을 유심히 보며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고 있더란다. 왜 그럴까 싶어 조감독이 물어봤다. “뭘 그렇게 봐요?” “아, 예, 사랑하는 연습 하는 거예요. 진짜 연인처럼 자꾸 바라보고 좋아하는 마음을 가져야 카메라 앞에서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거 같아서요.” 촬영 기간 내내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야 하는 배우들에게 이런 일이 드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다 진짜 정분이 났다는 얘기도 더러 들어봤지만 그런다 한들 이상할 게 없다. 진실한 감정을 드러내는 연기와 감정을 모방하는 연기 가운데 당연히 전자가 관객의 마음을 훨씬 잘 움직일 것이다. 실제 부부인 두 노인이 주연을 맡은 박진표 감독의 <죽어도 좋아!>를 떠올려보라. 거짓이 없는 그들의 표정은 전문 배우가 따라한다고 나올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연기는 촬영장에서 시작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촬영장 밖의 삶에서도 상당한 영향을 받는 것이다.
멜로영화는 아니지만 <라디오 스타>를 보면서도 이런 생각을 했다. 안성기와 박중훈. 비교가 약간 이상하지만 그들은 <죽어도 좋아!>의 실제 부부처럼 찰떡궁합이었다. 한물간 록스타와 수십년 그를 보살피는 매니저라는 설정이 의도한 대로 그들은 다독이는 형과 칭얼대는 동생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칠수와 만수> <투캅스>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등을 통해 오랫동안 명콤비로 각인된 그들은 겉으로 화려하지 않아도 은근히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법을 알고 있다. 보다보면 “얼쑤” 추임새를 넣어주고 싶을 만큼 둘의 호흡은 척척 맞는다. 실제 그럴 법한 서로에 대한 애정이 스크린에 그대로 묻어나는 듯하다. 여기엔 그들 각자가 몇 십년 쌓아온 배우로서의 삶도 한몫을 한다. 영화에서 안성기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배신하지 않고 항상 그 자리를 지키는 남자다. 그러면서도 무게를 잡거나 까다로운 인상을 주지 않고 늘 미소지으며 좌중을 즐겁게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 안성기가 그러하니 설득력이 생길 수밖에 없다. 박중훈은 그런 안성기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면서 지난날의 스타였다는 자부심 때문에 맘에 없는 말을 뱉곤 한다. 그러다 안성기가 보고파서 완전히 무너지는 순간이 나온다. “형, 듣고 있어? 형이 그랬지. 저 혼자 빛나는 별이 없다며. 와서 좀 비쳐주라. 쫌.” 그순간 울먹이는 박중훈의 표정엔 어떤 거짓도 없어 보인다. 함께 영화를 본 장미 기자는 “어린아이 같은 표정”이라고 말했는데 정말 박중훈 안에 숨어 있는 어린아이를 보는 것 같다. 그게 속물적인 것이든 순수한 것이든 박중훈의 욕망에 관한 정직한 표현을 관객은 오랫동안 사랑해왔다.
어쩌면 이준익 감독이 <라디오 스타>에서 가장 잘한 일은 안성기, 박중훈을 캐스팅해서 그들이 놀 수 있는 멍석을 깔아준 것일지 모른다(이 말이 이준익 감독을 폄하하는 말로 들리지 않기를). 이번호 특집 인터뷰에서 밝혔듯 사람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것은 그의 큰 장점이다. 사실 안성기, 박중훈이 선남선녀 스타를 캐스팅하는 것보다 흥행과 마케팅에 효과적인 카드는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영화적으론 90% 이상 성공을 보장하는 카드였다. 그걸 알고 활용할 줄 아는 데서 이준익 영화의 상당한 힘이 나온다. 하긴 <왕의 남자>도 개봉 당시엔 스타 파워에서 밀려 흥행하기 힘들 거라 예상됐던 영화가 아니었나. 누군가는 땅을 치며 후회하고 있을 거란 예감이 든다. 왜 내가 안성기, 박중훈 콤비가 나오는 영화를 먼저 기획하지 않았을까, 라며. 콜럼버스의 달걀이 이런 문제였지, 아마.
P.S. 필자분들의 피치못할 사정으로 인해 정훈이 만화와 전영객잔이 한 주 쉰다. 정훈이 만화랑 전영객잔 없이 <씨네21> 뭘 보란 말이야 하실 분이 계실줄 안다.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것말고도 볼 것 많다. 얼마나 읽을 게 많은지 한번 점검해보는 기회로 삼아도 좋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