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본능을 의지로 사수하는 옹골찬 신인, <라디오 스타>의 배우 한여운
2006-10-12
글 : 김도훈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이준익의 세계는 남자들의 굿판이다. 남자들이 전쟁을 하고 남자들이 줄을 타고 남자들이 크게 라디오를 켠다. 그의 세계를 동성우((同性友)적인 동화의 세계라고 말하는 것도 크게 누가 되지는 않으리라. 그런데 이준익의 세계에 들어와 속깊은 여운을 또랑또랑 남기는 여인들이 있다. “호랑이는 가죽 땜시 죽고 사람은 이름 땜시 죽는다”고 외치던 계백 마누라가 그랬고, 장녹수가 그랬고, <라디오 스타>의 다방레지 김양이 그러하다. 손님없는 다방에서 커피를 나르던 김양은 주인공 최곤이 진행하는 라디오에 출연해 김추자를 좋아하던 엄마 이야기로 영월과 관객의 심금을 울린다. 당돌하고 철없고 촌스럽지만 진실한 페이소스를 간직한 캐릭터다. 딱 이준익의 여인네다.

이제 갓 1년의 경력을 채워낸 신인 한여운의 얼굴은 어디선가 본 듯 익숙하다. <내 이름은 김삼순>의 파티셰 ‘인혜’ 역과 스타 선발 리얼리티쇼 KBS <서바이벌 스타 오디션>으로 수백만 시청자의 눈을 잡아챈 덕이다. 그러나 300 대 1의 오디션을 뚫고 <라디오 스타>의 김양 역할을 얻어낸 것이 그저 신데렐라의 행운만은 아니었다. “자네는 너무 대학생처럼 생겨먹어가지고 다방레지 역할 어디 하겠냐”는 이준익 감독의 첫마디에 한여운은 전혀 기죽지 않고 맞받아쳤다. “아니 감독님. 얼굴에 점 붙이고 껌 짝짝 씹어야 다방레지인가요. 대학생이 이런 일 저런 일 겪다보면 다방레지도 될 수 있고. 뭐 그런 거 아닌가요?” 이런 당돌함이야말로 이준익 감독이 오디션의 첫 타자였던 한여운을 <라디오 스타>의 세계로 불러들인 이유일 것이다.

중학생 시절부터 연기자를 꿈꾸었던 한여운은 고등학교 들어가자 대학로에 찾아가 연극을 구경하고 워크숍에 참여하기도 하며 연기의 세계를 기웃거린 소녀였다. 걱정스러웠던 부모님은 “생각만큼 쉽고 화려하고 좋은 직업이 아니야. TV를 한번 켜봐라. 너보다 잘나고 예쁜 애들이 수두룩하잖아”라며 냉정한 충고를 보내곤 했다. 그러나 한여운은 포기할 수가 없었다. 딸의 고집을 꺾지 못한 부모님은 망해도 먹고살 구멍을 만들라며 먼저 대학 입학을 권했고, 한여운은 연세대 인문학부에 들어가 철학과를 선택했다. 철학이라는 학문이 연기자로서의 삶에 도움이 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학로에서 연극하는 분들과 만나면 내가 모르는 철학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이 작품 속에는 이런 철학이 숨어 있지. 이런 식의 이야기 말이다. 처음에는 나도 그런 걸 알아야 연기자라고 할 수 있겠구나 싶어서 철학자들의 저서를 하나씩 읽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기회란 쉽게 찾아오지 않는 법이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이제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며 부모님에게 선언을 하자 오히려 “등록금은 없다”는 엄포가 돌아왔다. 밤에는 대학로 연극무대를 돌아다니고 낮에는 고등학생 과외로 등록금과 생활비를 버는 생활의 노곤함이 시작된 것이다. 휴학만이 살길이었다. 2년간의 휴학 생활 중 뮤지컬 <피터팬>과 악극 <미워도 다시 한번>에 출연하며 연기의 꿈을 키워나갔지만 더 큰 기회는 다가오지 않았다. 한계가 느껴졌다. 부모님의 경고가 슬그머니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그렇구나. 바로 이런 걸 이야기하셨구나. 겁이 덜컥 났다. 돈도 없고, 가고 싶은 학교도 못 가고, 오디션은 계속 떨어지고, 완전히 바닥이구나. 절망이었다.” 포기하고 학교로 돌아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내 이름은 김삼순>이 찾아왔고, KBS 드라마 <투명인간 최장수>가 찾아왔고, 두편의 영화 <라디오 스타>와 <전설의 고향>이 한꺼번에 밀어닥쳤다. 이제는 또 다른 의미의 노곤한 생활이 시작되었으나 행복의 지수는 전혀 다른 종류다. <라디오 스타>의 시사가 열린 이후로 부쩍 오디션 제의도 늘었다. 하지만 한여운은 지금 당장 스타가 되는 것보다는 천천히 연기자라는 이름을 얻고 싶어한다. “오디션에서 떨어진 적도 많다. 하지만 내 작품이라고 부를 수 있는 영화는 따로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나를 기다려주는 작품이 있을 때까지 한번 기다려보고 싶다.” 기다리는 시간도 배우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인 것 같다는 말에서 철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인 옹골찬 소녀가 내비친다.

연기에 도움이 되는 철학자가 있냐는 맹한 질문을 던졌더니 미셸 푸코라는 이름이 돌아왔다. 하지만 이내 “막상 대학에서 정식으로 철학을 배우기 시작하니까 너무 어렵다. 그래서 누구를 좋아한다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쑥스럽고 말이 안 되는 것 같다”며 웃는다. 그럴 터다. 지금은 책 속의 이치보다는 본능을 따라야 하는 때일 것이다. 한여운이 요즘 가장 곱씹는 말은 “지금이 제일 머리 안 아프고 좋을 때야. 가서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는 거야”라던 선배 문소리의 충고다. 한여운은 아주 잠시 입을 닫더니 이내 웃으며 입을 뗐다. “그게 맞는 것 같다. 지금이 가장 행복한 때인 것 같다.”

의상협찬 BNX·스타일리스트 김소영·메이크업 고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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