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남자>의 칠득이는 동생뻘인 팔복이와 함께 정직하게 웃고 우는 광대였다. 그러기에 칠득이가 웃으면 세상이 그와 더불어 기뻐하는 듯했고, 눈물 흘리면 세상이 그와 더불어 울어주는 듯했다. 자그마한 몸집과 자그마한 이목구비, 그러나 미친 왕의 놀이판에 휩쓸려 죽어버린 형님에게 탈을 씌워주던 모습만은 커다란 기억으로 남던 배우. <왕의 남자> 원작인 연극 <이>(爾)에 홍 내관으로 출연했던 인연으로 광대패에 합류하게 되었던 정석용이다. “<이>가 영화로 만들어진다기에 김태웅 연출에게 나를 추천하라고 찔렀다. (웃음) 그땐 내관 역을 얻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이준익 감독은 <이>가 아니라 이상한 동네 아저씨로 출연한 <양덕원 이야기>를 보고선 광대가 어울린다며 칠득이를 하라고 하더라.” 그리고 이준익 감독과 맺은 인연은 다시 한번 매듭처럼 엮여 <라디오 스타>로 이어졌다.
정석용은 폐쇄 직전인 강원도 영월 라디오 방송국이 배경인 영화 <라디오 스타>에서 경력은 오래됐지만 한적하게 소일해온 엔지니어 박 기사를 연기했다. 이름도 없이 ‘박기사’인 박 기사는 처음엔 그저 소품처럼 놓여 있는 듯하다가 차츰 귀여운 말투와 행동으로 살갑게 다가오는 인물이다. “처음엔 캐릭터가 너무 없어서 걱정했다. 하지만 이준익 감독은 처음엔 관객이 네가 누구인지 몰라도 갈수록 너를 좋아하게 될 거라고 말했다.” 이름도 없고 성격도 없고 배경도 없는 보통명사 박기사가 어떻게 세상 어디에도 없는, 술 취해 왕년을 자랑하는 국장에게 “디제이도 하셨었었더요?”(*오타 아닙니다. 이건 편집과 교열이 보시고 지워주세요)라고 혀가 꼬이며 천진하게 구는, 고유명사가 되었을까. “예전에 어느 연출이 ‘배우는 리액션이 전부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만큼 배우에겐 리액션이 중요하고, 따라서 상대와의 호흡이 중요하다. 나는 캐릭터를 분석하기보다는 상황을 따라가며 점차 자연스러워지는 배우여서 <라디오 스타>를 찍으면서도, 분위기가 몸에 익으면서, 인물이 살아나기 시작한 것 같다.” 국장 역의 정규수와는 술을 마시며, 이준익 감독과는 바둑을 두며, 정석용은 “처음엔 대사가 반 페이지 분량도 안 됐던” 박 기사에게 그만의 삶을 주었다.
어딘지 낯익은 모습을 더듬어가다보면 첫 영화인 <무사>에 이르게 되는 정석용은 그전에 연극 무대를 많이 겪어보진 못했다. 그는 졸업을 앞둔 대학 4학년 2학기, 스물여덟에야 연극배우가 되기로 결심했지만, 대학로에 인맥이 없던 터라 연극 한편 출연하고 반년 노는 일도 흔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가 대학로에 나선 시기는 IMF 한파가 극장을 꽁꽁 얼리던 무렵이었다. “설마 되겠나 싶었지만 친구가 오디션 보러 간다기에 같이 갔다가 붙은” <무사> 이후에도 <영어완전정복>을 제외하면 이렇다 하게 오래 출연한 영화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흥겨우면서도 처량맞은 연기를 보여준 <왕의 남자> 이후 그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기간이 점점 짧아지고 있다. 얼마 전에는 조근식 감독의 <그해 여름> 촬영을 마쳤다. 과거를 향한 향수가 배어 있는 이 영화에서 정석용은 아들을 잃은 슬픔도 있고 사연도 있는 마을 이장 역을 맡았다. “영화는 리얼해야 하니까 자기보다 나이 많은 인물을 연기하는 건 부담이 된다. 이장이면 사십대 중반은 넘긴 나이일 텐데. 걱정이 됐지만 인물이 매력적이어서 할 수밖에 없었다. 대사 리딩과 리허설을 충분히 거치고 촬영을 하는 조근식 감독의 스타일도 좋았다.” 배우는 인물이 매력적이어서 영화를 택한다 하지만, 그 역의 관계도 성립할지 모른다. 영화가 매력적인 배우를 향해 다가가는. 정석용은 그처럼 영화를 부르는 배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