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할리우드 샛별의 멋진 외출, <디파티드><네버 포에버> 베라 파미가
2006-10-24
글 : 문석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뉴욕 소호의 한 호텔 방 앞에서 쪼그려 앉아 있는 마음은 착잡했다. 그 방 안에 최근 미국 영화계에서 가장 떠오르는 여배우 중 하나인 베라 파미가가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문제는 방에 사진기자가 홀로 남아 있다는 점이었다. 베라 파미가가 의상 코디네이터, 메이크업 아티스트까지 포함된 일행을 향해 “사진기자만 남고 모두 나가주세요”라고 말했을 때부터 치밀었던 요상스러운 감정의 정체가 질투심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무렵에야 방문은 열렸다. 숨겨진 모습을 끌어내기 위해서라면 낯선 나라에서 온 사진가와 단둘이 20분가량 호텔 방에 머무는(?) 일도 서슴지 않는 베라 파미가는 자신의 첫인상을 ‘열정’ 또는 ‘혼신’이라는 단어로 간직하길 바라는 듯했다.

선대의 고향인 우크라이나 설원을 닮았을 희디흰 피부와 푸른색, 녹색, 회색이 오묘하게 뒤섞인 색의 눈동자를 갖고 있는 이 여배우는 사실 우리에겐 낯선 존재다. 변태 부부에게서 아이를 구해내는 강한 여성을 연기한 <러닝 스케어드>를 제외하면 그녀의 인상을 깊이 남길 만한 영화는 아직 한국에 도착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친근감이 드는 이유는 그녀가 한미 합작영화인 <네버 포에버>에 출연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 나우필름과 미국 영화사 박스3가 공동제작하고 <그 집 앞>의 김진아 감독이 연출하는 이 영화에서 파미가는 주인공 소피를 연기한다. 소피는 남편인 한국 동포 앤드류(데이비드 맥기니스)와 함께 살지만, 불임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는 여성. 불임의 원인 제공자 앤드류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며 힘들어하던 소피는 우연히 한국인 남성 지하(하정우)를 만나게 된다. 소피는 앤드류 몰래 지하에게서 아이를 얻으려 한다. 무미건조한 섹스로 시작된 소피와 지하의 관계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격렬한 사랑으로 발전한다.

이 정통 멜로영화는 베라 파미가의 필모그래피에서는 매우 독특한 자리를 차지한다. 아름다운 외모에도 불구하고 첫인상이 그랬던 것처럼 파미가는 강렬하고 열정적인, 한마디로 ‘센’ 여성 캐릭터를 주로 맡아왔다. “그동안 내가 맡았던 캐릭터는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자신이 누구인지를 잘 아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소피는 완전히 정반대의 지점에 있다. 소피는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 모르는 희미함 속에 사는 여성이다.” 단지 기존 캐릭터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출연을 결정한 것은 아니다. 파미가가 <네버 포에버>에 출연하게 된 진짜 이유는 김진아 감독과 하정우 때문이었다. <네버 포에버>의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베라 파미가는 <조슈아>라는 독립영화를 막 끝마친 뒤였다. 이 영화에서 심각한 산후우울증에 걸린 여성을 연기했던 그녀는 실제로도 정신적 고통을 겪었다. “<네버 포에버>의 시나리오가 좋았지만,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내 뜻을 전달받은 김진아 감독은 호텔 방으로 두편의 영화 DVD를 보내왔다. 그건 수년간 김진아 감독이 스스로를 촬영한 <김진아의 비디오 일기>와 하정우가 주연한 <용서받지 못한 자>였다.” 파미가는 <…비디오 일기>를 보면서 스스로를 치유하는 방법을 깨달았을 뿐 아니라, 시나리오를 보며 내심 걱정됐던 섹스신에 대한 의문 또한 풀어냈다. “그 영화에는 김진아 감독 자신의 누드도 보이는데, 매우 심오하고 시적이었다. 그러고 나서 <용서받지 못한 자>를 봤는데 하정우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두편을 보고 나니 이들과 함께 작업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버 포에버>는 올해 베라 파미가가 찍은 여섯 번째 영화다. 그 앞에는 마틴 스코시즈의 <디파티드>, 앤서니 밍겔라의 <브레이킹 앤드 엔터링>이 있었고, 독립영화인 <퀴드 프로 쿼> <조슈아>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배경으로 하는 국제적 합작영화 <인 트랜짓> 또한 이미 촬영을 마친 상태다. 이처럼 베라 파미가가 바빠지게 된 배경에는 2004년 선댄스영화제에서 큰 반향을 얻은 독립영화 <다운 투 더 본>이 있다. 평범한 삶을 꿈꾸는 약물중독자를 실감나게 연기했던 이 영화가 선보인 이후 몸사리지 않고 개성적인 연기를 펼치는 대형 여배우에 목말랐던 미국 영화계는 베라 파미가를 향해 러브콜을 날리기 시작했다. 마틴 스코시즈의 눈에 띈 것도 <다운 투 더 본> 덕이었다. 그러나 베라 파미가는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대형영화에 출연하게 된 것을 진정한 성공이라고 생각지도 않는 눈치다. 그녀는 여전히 뉴욕주 북부 시골 농장에서 “염소들과 말 그대로 레슬링을 하며” 살기를 원하고, “할리우드영화냐 독립영화냐 또는 A급 감독이냐 신진 감독이냐보다는 이야기와 캐릭터가 흥미롭냐 아니냐”를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출연을 결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년 상반기 <네버 포에버>의 개봉에 맞춰 한국을 찾을 계획이라는 베라 파미가가 놀라운 빛의 눈동자를 장난스레 굴리며 얘기를 던진다. “한국에 가면 한국 음식도 먹고 한국인도 많이 만나고 싶다. 그리고 하정우의 노래를 들을 거다. 뉴욕에서 촬영 도중 제작진들과 함께 가라오케 바에 간 적이 있는데, 하정우는 수줍어하면서 노래를 안 했다. 하하하하… 정우, 기다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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