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이 올지 안 올지 모르는 시사회. 부부지만 앙숙이 돼버린 남녀 주연배우들. 남자배우는 산에서 도닦고 있고 여자배우는 스페인 남자에게 홀려 예전에 찍은 영화쯤은 안중에도 없다. 겨우 시사회장에다 ‘모셔’ 놨지만, 영화홍보자에게는 최악의 상황이다. 근데 이 상황을 쏠쏠히 재미있는 퀴즈쯤으로 생각하는 이가 있다. 바로 빌리 크리스털이 연기한 영화 속 영화 <아메리칸 스윗하트>의 홍보담당자 리. 악재를 호재로 바꾸는 놀라운 솜씨로 배우와 언론을 요리하는 그에게서 빌리 크리스털 자신의 흔적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지난해까지 아카데미 시상식 사회를 여섯번이나 보며 쟁쟁한 배우들의 마음자락을 쥐락펴락하는 데 이력이 났을 법한 그는, 스탠드업 코미디로 내공을 쌓은 뒤 TV로, 그리고 영화로 성공적으로 입지를 넓혀온 흥미로운 배우다. “내 우스갯짓이 먹힐까 안 먹힐까 하는 생각에 1948년부터 발뻗고 자본 적이 없다”며 엄살 아닌 엄살을 부리는 그에겐 삶이 곧 재미난 거리를 찾는 과정. 기자시사회를 소재로 한 ‘인사이드 할리우드’ 코미디 <아메리칸 스윗하트>의 아이디어도 <애널라이즈 디스> 시사회 행사에서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크리스털이 낸 것이다. 이탈리아에서 열린 <애널라이즈 디스> 시사회에서 한 기자가 크리스털에게 “왜 당신들은 결혼하지 않나요? 난 멕 라이언이 다른 남자에게 키스하는 게 싫고 당신이 딴 여자한테 키스하는 것도 싫습니다”라며 황당한 말을 해댔는데 그로부터 사이가 나쁜 부부 배우들이 시사회 행사에 참여하는 영화 <아메리칸 스윗하트>가 나온 것이다.
미국 TV드라마 최초의 게이 캐릭터 조디 달라스(<소우프>), 할리우드영화 최초의 임신한 남자(<래빗 테스트>). 초창기 빌리 크리스털이 맡은 역들은 하나같이 심상치 않았다. 의 쇼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의 1984/85년 시즌은 그를 스타로 만든 프로그램. “당신 괴에에엥장해요!”(You look mahhhhvelous!)라는 유행어가 대히트를 하면서 그는 스타급 코미디언이 되었다. 1986년 크리스털은 이 유행어에서 따온 <앱솔루트리 마블러스>라는 제목의 다소 이른 자서전을 내기도 했다. 크리스털이 처음 사람들의 이목을 끈 것은 다섯살 꼬마 시절. 재즈 뮤직 프로모터였던 아버지 밑에서 자란 그는, 재즈 싱어들의 공연이 한창이던 어느날 무대 위로 훌쩍 뛰어올라 탭댄스를 추었다고 한다. 그 시절 크리스털과 한 무대에 섰던 재즈 보컬 중에는 종종 아기 크리스털의 베이비시터 노릇을 해주기도 했던 빌리 홀리데이도 있다고.
대단한 입담으로 TV쇼와 코미디 프로를 달구던 크리스털이 스크린에서도 비로소 대박을 터뜨린 건,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1989)였다. 아기자기하고 따뜻한 웃음을 자연스레 불러내는 크리스털의 해리 연기는, 빌리 크리스털을 그저 재치있는 코미디언에서 하나의 배우로 다시 보게 했다. 이후 스탠드업 코미디언의 이야기를 그린 <토요일 밤의 남자>로 감독 데뷔까지 한 크리스털은 그와 쌍벽을 이루는 코믹 배우 로빈 윌리엄스와 공연한 <파더스 데이>, 마피아 로버트 드 니로의 정신과 의사 역을 맡았던 <애널라이즈 디스> 등을 거치며 어느덧 할리우드의 관록있는 중년배우로 탄탄히 자리잡았다.
요즘 그는 여기저기서 축하인사를 받고 있다. 어린 시절 메이저리거가 되기를 꿈꾸던 그가 연출과 제작을 겸해 만든 의 야구영화 이 무려 12개 부문의 에미상 후보에 노미네이트된 것이다. 점점 이마가 넓어지는 만큼 입꼬리의 웃음주름도 넉넉해지는 부드러운 배우 빌리 크리스털. 그의 다양한 영화활동은 애니메이션 <몬스터 주식회사>의 목소리 출연, <애널라이즈 디스>의 속편 <애널라이즈 댓> 출연 등으로 쉼없이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