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남자들만의 예쁜 유토피아, <라디오 스타>
2006-11-15
글 : 남다은 (영화평론가)
동성간의 정서적 교류에 매혹된 이 시대 남자들의 로망 그린 <라디오 스타>

<라디오 스타>를 뒤늦게 보았다. 사람들은 이 영화가 인간의 정서를 울리는 가장 인간적인 영화라고 평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 인간은 남자-인간이다. 올해 들어 남자 배우 둘을 내세워 남자들의 관계를 다룬 영화들은 많았다. 거기에는 반드시 폭력과 배신과 야망과 의리가 있고 결국에는 비극이 있다. 처음에는 관계의 순수성을 보여주고 결말로 갈수록 그 관계가 사회 혹은 비열한 욕망과 마주치며 어떻게 무너져내리는지를 보여주는 영화들 말이다. 그런데 <라디오 스타>는 두 남자를 주인공으로 앞세우지만 다른 길을 걷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에는 끈끈한 의리가 있지만 배신이나 폭력 같은 건 없다. 그 의리는 피로 맹세한 수컷 특유의 그것이 아니라, 칭얼거리고 받아주고 토라지고 위로해주는 내밀한 우정에 가깝다. 그것은 사회나 욕망 때문에 부서지는 관계가 아니라, 외부의 장애물로 인해 더욱 견고해지는 관계다. <라디오 스타>는 남자들을 전면에 내세운 이전 영화들과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반대의 구조를 취한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내게는 이 영화가 최근 나온 한국영화들 중 이 시대 남자들의 로망에 가장 근접한 영화처럼 보인다. 세상에 상처받은 남자들이 마지막으로 기대고 싶어하는 곳은 더이상 아내도, 자식도, 어머니도, 돈도, 명예도 아니다. 제도나 혈연으로 엮이지 않지만 오직 추억과 인간적 신뢰, 정서적 교류로 이루어진 남자들간의 관계. <라디오 스타>는 수컷의 쟁탈전과 경쟁심에 관심을 기울이는 대신 이 로망을 자극한다. 많은 (남자)평론가들이 ‘남자’를 지우고 유독 ‘정서적 관계’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 남자들은 어떤 남자들인가? 이준익 감독은 줄기차게 남자들의 관계만을 다루고 있지만, 사람들은 아무도 그의 영화를 퀴어영화라고 불편해하지 않는다. 그는 남자들의 관계를 다루되 섹스장면을 삽입하거나 동성애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하지 않는다. 동성애를 다룬 영화가 반드시 고통과 불편함을 수반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영화들에서, 특히 <라디오 스타>에서 남자들의 관계는 분명 사랑(사실 이 노골적인 사랑은 성관계가 없다뿐이지 단순한 우정이라고 보기는 어렵다)처럼 보임에도 이 사랑은 이성애 중심적 사회와 마찰하지 않는다. 게다가 <비열한 거리>나 <홀리데이> <야수> 등에는 ‘남자’영화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지만, <라디오 스타>는 그렇게 불리지도 않는다. 대신 ‘인간적’이라는 수사가 따른다. 이준익 감독이 그리는 남자들의 관계는 동성애와 이성애, 남자와 ‘인간’ 사이의 어딘가에 존재하는 듯하다. 그는 그걸 굳이 설명해내려고 하지도 않고 관객 역시 궁금해하는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의 영화에는 마음 저 밑바닥을 울리는 “자연스러움의 미덕”(유운성, <씨네21> 574호)이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라디오 스타>에 등장하는 두 남자의 관계가 그다지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동성간의 정서적 교류에 매혹된 이 시대 남자들의 로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다소 고민스러웠다.

동성 사회적 욕망을 그대로 체현한 공간, 영월

이 영화에서 가장 의아했던 것은 카메라가 남자들의 이야기와 별 관계없는 영월의 풍경을 내려다볼 때다. 영화는 라디오에서 울려퍼지는 음악 위로 영월 방송국에서 영월의 자연, 길, 실제 영월 시장의 풍경으로 자주 이동하는데, 처음에는 도무지 이 무의미한 이동의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영월의 풍경들을 미학적으로 뛰어나게 담으려고 한 것 같지도 않고, 음악에 적당한 배경이 없어서 사용한 것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영화 후반부, 박민수(안성기)가 서울로 올라간 뒤, 사람들로 붐비는 도시의 거리와 양복을 입은 회사원들로 가득 찬 지하철역의 풍경들이 등장한다. 이 숏들을 본 순간, 나는 이 영화가 나름의 일관된 구조 위에서 설계된 이야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서울과 영월, 중심부와 주변부, 냉혹한 자본의 논리와 소박한 진정성, 현실과 이상. 도식적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구도가 이 영화를 지탱하는 힘이 된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영월이라는 공간은 단순히 패자들이 쫓겨난 유배지가 아니라 따뜻한 주변인들과 진정성과 자연이 있는 곳으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실패한 박민수와 최곤이 우여곡절 끝에 상처 입은 영혼을 치유할 수 있는 곳은 서울이 아니라, 영월이다. 영월은 말하자면, 남성 패자들의 마지막 안식처, 그들의 유토피아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이 유토피아가 과거의 영광을 회복해주는, 혹은 그러한 착각을 불러일으켜주는 공간은 아니다. 영월의 주민들이 <최곤의 오후의 희망곡>에 보내는 열화와 같은 성원은, 사실 최곤보다는 자신들의 무료한 일상을 귀담아들어주고 방송해주는 프로그램 자체를 향한 것이다. 최곤이 이 점을 몰랐을 리 없다. 변성찬(<씨네21> 574호)이 지적했듯, 최곤은 영월에서 자신에게 쏟아진 인기를 재기 가능성과 혼동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최곤이 영화의 마지막까지 영월을 떠나지 않는 이유, 그리고 박민수가 다시 영월로 돌아오는 이유는 단지, 최곤의 음악적 부활을 위해서가 아님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영화가 떠나지 못하는 영월의 공간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에 대해 자본의 경쟁 논리가 지배하는 서울에서는 더이상 진정한 삶의 이야기가 부재하므로 영월을 벗어난 <최곤의 오후의 희망곡>은 더이상 이전과 같은 방송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다. 혹은 최곤과 박민수의 영월에서의 재회는 이른바 세속적인 이해관계를 버리고 쇼비즈니스 세계가 결코 줄 수 없을 진정하고 인간적인 정서로의 돌아옴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다. 아마도 영화의 의도는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유토피아가 <라디오 스타>의 동성 사회적 욕망을 그대로 체현한 공간이라는 사실이다. 이성애 중심적 사회에서 동성 사회적 욕망은 이중성을 지닌다. 이 욕망의 메커니즘은 남성들만의 감정적 연대를 통해 이성애 중심적인 체제를 구성하는 동시에 동성애적 욕망을 금기시한다. 동성과의 관계를 기반으로 하면서, 동성애를 부정하는 이 모순적인 구분이 동성 사회적 욕망의 논리다. 그래서 동성 사회적 욕망에는 동성애의 금기와 함께 보존의 욕망이 언제나 함께 자리하고 있다. 그렇게 본다면, 영화가 최곤과 박민수 사이의 교류를 정서적 측면에만 한정시키고 그러한 감정을 인간 보편의 것으로 확장한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이들의 강한 감정적 유대는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 혹은 보지 않으려고 한다. 그것은 두 남자 사이의 동성애적 욕망이다. 심지어 그들 사이에서 “사람들이 우리 사귀는 줄 알면 안 돼”와 같은 묘한 암시 혹은 무의식의 흘림이 있음에도, 아무도 이들의 동성애적 욕망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착취구조 한가운데 내던져진 여자 캐릭터들

<라디오 스타>가 남성적 유토피아를 구성하는 또 다른 방식은 이 영화 속 여자 인물들의 위치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강 PD(최정윤)나 다방의 김양(한여운)도 최곤과 박민수만큼 떠돌다가 영월에 도착한 패자들이지만, 이 남성적 유토피아는 그녀들에게 관심이 없다. 아무리 감독이 따뜻한 시선을 보낼지라도 김양은 가부장제의 착취구조 한가운데 내던져진 인물이고 강 PD는 영화 내내 자기만의 이야기를 거의 갖지 못한 채 최곤을 ‘바라보는 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가장 문제는 영화가 박민수의 아내에게 부여한 위치이다. 왜냐하면 영화는 자신의 욕망을 지속하기 위해 혹은 영월의 남성적 유토피아를 유지하기 위해 그녀를 철저히 착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는 그녀를 과거 최곤의 팬클럽 회장으로 설정하고 그녀의 희생을 일종의 꿈에 대한 대가로 여기게 만들면서 박민수의 태도, 나아가 자신의 태도를 합리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의 고단한 김밥과 삶의 구질구질한 냄새가 이 영화의 이상을 가능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면서 말이다.

결과적으로 <라디오 스타>가 꿈꾸는 남성 공동체의 욕망은 최곤과 박민수의 관계를 비현실적으로 만든다. 그들의 관계가 불가능하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현실의 진실에서 떨어져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그토록 진정하다고 여겨지는 이들의 관계가 사실은, 진정한 욕망과 누군가의 노동을 은폐한 결과일지도 모른다는 역설. 그 과정에서 박민수는 어느 쪽으로도 끝까지 나아가지 못하면서 아무것도 포기하지 못하는 이기적인 욕망의 소유자가 되고, 최곤은 단 한번도 현실과 마주하지 않는 지극히 유아적인 인간이 되어버린다. 그래서인지 내 눈에 이들의 삶에 대한 태도는 자신들이 거쳐온 그 지난한 삶의 역사가 무색할 정도로 감상적이고 순진하게 보인다.

그런 점에서 밴드 ‘이스트 리버’ 역시 최곤과 박민수의 관계를 연상시키는 또 다른 남자들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공통된 꿈을 나눈다고 믿으며 그저 자기들만의 세계에서 코스프레하는 것에 만족을 느끼는 남자들의 예쁜 유토피아. 이것을 진정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제도에 위협을 주지 않는 정도에서 이루어지는 남자들의 정신적인 유대 혹은 정서적 소통은 이성애 중심적 사회의 본질이고 토대이다. 만약 이것이 경쟁에 지친 이 시대 남자들의 로망이라면, 그것은 폭력에 찌든 남자들의 야망만큼이나 무기력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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