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페이소스를 만드는 푸근한 쉼표, <후회하지 않아> 배우 정승길
2006-11-23
글 : 김도훈
사진 : 오계옥

이송희일 감독의 퀴어영화 <후회하지 않아>는 느낌표 사용이 잦은 영화다. 두 남자의 고통스러운 사랑을 강조하는 느낌표들은 보는 이의 가슴을 수시로 막다른 골목으로 내몬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아>에는 푸근한 쉼표도 하나 찍혀 있다. 스타카토의 리듬으로 무거운 이야기를 쉬어가게 만드는 호스트바 마담이다.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이년아, 저년아”를 외치며 종로 뒷골목의 페이소스를 그려낸 배우는, 옴니버스영화 <동백꽃>의 두 번째 에피소드 <떠다니는 섬>에서 게이 남자를 연기한 인연으로 호스트바 안주인 자리를 꿰찬 정승길이다. “사실 똑 따먹는 역할 아닌가. 얼마 나오지는 않지만 시나리오상에서도 임팩트가 큰 역할이었고, 휴게소 같은 느낌의 역할이라 무겁게 흘러가는 수민과 재민의 사랑 이야기 속에서 쉽게 드러나는 캐릭터다.” 모두 캐릭터 덕이라는 자평은 지나치게 겸손한 게 아닌가 싶다. 게이 호스트바 마담이라는 역할을 관습화된 캐리커처의 수준으로 떨어뜨리지 않는 물 흐르는 연기는 정승길이라는 배우의 내공을 조용히 그러나 단호히 드러낸다.

정승길은 지난 10년간 연극판에서 밥먹고 살아온 남자다. 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배우의 길을 꿈꾸었던 것은 아니다. 서울예대 영화과에 재학하던 당시, 그는 평론가를 꿈꾸며 심야상영관을 매일 드나들던 할리우드 키드였다. 그런데 그는 어느 순간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곤 했다고 고백한다. “나는 왜 영화를 좋아하는 걸까? 영화의 무엇이 이렇게 좋은 걸까?” 질문의 해답을 찾아가자 종점에는 배우라는 존재가 있었다. 연출이나 시나리오작가가 아니라 배우라니. 왠지 낯선 대답이지만 “깜깜한 어둠 속에서 배우들의 연기를 보면서 다른 생각을 잊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배우가 되자고 결심했다”는 말에는 짙은 진심이 드리워져 있다. 1996년에 학교를 졸업한 그는 연극인의 영화아카데미인 공연예술아카데미를 수료했고, 1999년에 발을 딛은 대학로에서는 <쇼팔로비치 유랑극단> <로베르토 쥬코>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 등의 연극을 거치며 든든한 허리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무대에 선 시간만큼이나 영화에 대한 갈망은 계속됐다. 연극계에서는 어느덧 선배와 후배의 수가 비슷한 중견이 됐고, 연극인 출신의 아내를 맞이했다. 그럴수록 조바심은 늘어갔다. “자그마한 단역부터라도 영화를 시작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 걱정이 됐다. 인지도도 좀 높이고 돈도 좀 벌어야 했으니까. (웃음)” 물론 순수한 열정으로 굴러가는 대학로와 자본과 매니지먼트의 논리로 흘러가는 충무로는 도무지 비슷한 데가 없었다. 미리 합격자를 뽑아놓고 진행하는 홍보성 오디션도 있었고, 회의가 진행 중인 사무실 한 귀퉁이에서 스크린 테스트를 하는 무성의한 영화사들도 있었다. 어이가 없었다. 그는 “구차하게 이런 오디션 다니느니 그냥 열심히 좋은 연극을 계속하다보면 기회가 오겠지”라는 믿음으로 차근차근 학생들의 단편에 출연하며 카메라를 대하는 법을 익혔다. 눈에 띄는 역할은 없었지만, 송일곤 감독의 <거미숲>에서는 장현성과 함께 다니는 형사 중 한명을 연기하기도 했다. “알고 보면 부산영화제에 초청된 작품만 장편 두편, 단편 두편, 합해서 네편”이라며 웃는 그에게 영화는 연극만큼이나 가슴을 들뜨게 만드는 무대인 듯하다. “대학 때 8mm와 16mm로 영화를 함께 만들었던 친구들이 지금도 충무로 현장에서 스탭으로 일하고 있다. 가끔은 ‘언제 뭉쳐서 사고 한번 쳐보자!’라고 다짐하곤 한다. 하지만 나 역시 지금보다는 한 단계 올라선 이후에 그들과 작업을 하고 싶은 욕심이 있다. 그래서 <후회하지 않아>는 참 고맙고 좋은 기회인 것 같다.”

정승길은 스스로를 “본능적인 배우가 아니라 이성적인 배우”라고 칭한다. 가진 것 이상으로 오버하는 연기를 체질적으로 잘 못 견뎌한다는 말이다. <후회하지 않아>의 게이 마담 역할을 어떻게 요리할 것인가 고민을 거듭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송희일 감독의 술 취한 말투에서 외양만 뽑아먹는다고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해답은 감독을 최대한으로 믿는 것, 그리고 캐릭터를 인간으로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시나리오의 역할로서만 충실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자신만의 색깔을 칠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내가 하는 연기를 스스로 의심하지 않아야 남들도 나의 연기를 의심하지 않는다”는 말은 평범한 철학처럼 들리지만, 누구나 이토록 의심없는 믿음을 들려주는 법은 아니다.

정승길은 올해만 네편의 연극 무대에 올랐고, 12월에는 <양덕원 이야기>로 또다시 무대에 오른다. 영화와 연극 중 좀더 끌리는 무대는 어디냐는 질문을 보내자 “둘 다 좋다. 게속 무대에도 나가고 이렇게 영화에도 출연할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다”는 말이 돌아왔다. “다만 나태하고 태만한 성격 탓에 좀더 적극적으로 자기 관리를 못한다”고 덧붙이며 웃는 그에게 누군가는 말해주어야 할 것이다. 지금 같은 인생의 쉼표는 당분간 누리기 힘들지도 모를 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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