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정(純情). 툭 털면 폴폴 먼지가 묻어날 것 같은 단어. 어색함없이 걸치기 힘겨운 옷을 소이현은 자연스레 입어왔다. 함량과다의 닭살스러움이 아닌 풋풋하고 사랑스러운 방식으로. TV와 스크린을 오가며 활동해온 그에겐 기자(<부활>)나 경찰(<특수수사일지: 1호관 사건>)처럼 똑 부러지는 전문직 여성 역할이 주로 주어졌지만, 그 이면에는 언제나 쉽사리 진심을 내보이는 순수함이 존재했고, 그것은 종종 뜨거운 사랑으로 이어지곤 했다. 미국에서 의대를 졸업했지만, 한 남자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한국을 찾는 드라마 <하이에나>의 정은이나, 연인을 위해 생명을 내놓는 <어느날 갑자기-죽음의 숲: 어느날 갑자기 네번째 이야기>의 정아처럼. <중천>, 영혼들이 49일간 머무른다는 판타지 세계로 소이현은 활동 무대를 옮겼지만, 가슴 짠한 순정만큼은 버리지 않았다. 퇴마 무사대인 처용대의 홍일점 ‘효’는 보답받지 못할 사랑임을 알면서도 이곽(정우성)을 향한 마음을 끝내 저버리지 못하는 여자다.
“영화를 보시면 알겠지만 <중천>에서 효의 출연 분량이 절대적으로 많지 않다. 100신 중에 20신 정도 있을까? (웃음). 하지만 조금 나와도 강한 인상을 남길 수 있는 캐릭터라고 생각해 기꺼이 선택했다.” 검을 휘두르며 허공을 가르는 무사로 변신하는 것이 쉬웠을 리 없다. 3개월 동안 혹독한 트레이닝을 통해 검술과 승마, 와이어 액션 등을 익혔다. 시작부터 끝까지 중국 현지에서 진행된 촬영은 반년가량이나 지속됐다. 몸을 낯선 환경에 맞추는 것은 기본이고, 악천우와 소음 등 시시각각 따라붙는 변수들을 감내해야 했다. “출연 분량이 적은 경우 감정선을 유지하는 것이 더 힘들다. 일부로 적응하려고 내 촬영 분량보다 2~3일 정도 먼저 들어가서 촬영장 분위기를 익혔다.” 출연이 많지 않기에 오히려 모든 장면이 놓칠 수 없이 소중하다고 말하는 소이현은 마지막 촬영 때 흘렸던 눈물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한국이 아니라서 더 애틋했던 것 같다. 스탭들과 같이 자고, 생활하면서 정이 듬뿍 들었다. 마지막 장면 촬영이 끝나고 인사하고 있는데 스탭들이 케이크에 촛불을 켜서 가져오더라. 오늘이 ‘효’ 마지막 촬영이다, 축하한다고 하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어렸을 때부터 고전무용을 배워온 소이현의 꿈은 본래 무용 선생님이었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장난처럼 지원한 슈퍼모델 선발대회에서 주목을 받고, 현재 소속사 대표와 인연이 닿으면서 비로소 연기자라는 직업을 생각하게 됐다. “회사에 들어오면 데뷔하기 전에 트레이닝 기간이 있다. 몇달 동안 연기 지도를 받으면서 처음으로 확 빠져든 것 같다. 연기란 게 이런 거구나 알게 되면서 정말 매력적이고 재미있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기찬의 뮤직비디오 <감기>의 수녀 역할로 처음 카메라 앞에 선 소이현은 드라마 <노란 손수건>으로 본격적인 배우의 길에 들어섰다. <선녀와 사기꾼> <4월의 키스> <부활> 등 주로 브라운관의 신예로 사랑받던 그는 <맹부삼천지교>에서 조폭들을 쥐락펴락하는 당돌한 여고생으로 스크린에 입문했다. <죽음의 숲…>과 <중천>까지 필모그래피는 3편으로 짧지만, 소이현의 출연작은 코미디, 공포, 판타지라는 장르를 가로지른다. 최근 1년간 부쩍 잦아진 활동에 지치지는 않느냐는 질문에 “체력이 약하면 이 일 할 수 있겠어요?”라 반문하는 그는 <죽음의 숲…>을 찍으며 “숲속의 으스스함을 즐겼다”고 선뜻 말할 만큼 두려움없이 자신을 던지는 스타일이다. ‘소이현의 재발견’이라는 입소문을 퍼뜨린 드라마 <하이에나> 역시 그러한 도전의 일환이었다. “망가지는 것을 즐겼다. (웃음) 메이크업도 제대로 안 하고, 머리도 망가뜨리고, 푼수짓을 하고, 그런 것이 더 재미있었다. 나 스스로도 새로운 자신을 발견했고, 자신감을 얻었다고 할까.”
연기를 할 때 “무언가 내 안에서 확 뿜어져나오는 뜨거운 것”에 매료되었다는 소이현은 “연기는 나의 천직”이라고 말하는 데 망설임이 없다. 주현, 고두심 등 대선배들의 “만들지 않고, 꾸미지 않은 연기”에 압도되곤 한다는 그는 “대사 한마디만으로 상대방을 깜짝 놀라게 할 수 있는 내공”을 꿈꾼다. “아직까지는 인터뷰할 때 배우 소이현씨 하는 게, 나도 약간 어색하다. 보시는 분도 어색하리라 생각한다. 앞으로 배우라는 수식어가 어색하지 않도록, 내게 자연스럽게 붙을 수 있도록 만들어가고 싶다.” 눈물을 자아내던 순정은 든실한 의지와 열정의 옷을 입었다. 소이현은 배우의 직인을 차분한, 그러나 당찬 걸음으로 새겨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