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가 만난 사람]
<해변의 여인> <괴물> 촬영감독 김형구
2007-01-02
글 : 김혜리
사진 : 이혜정
행복한 프레임에 살다

사방이 온통 빛이다. 김형구 촬영감독의 언덕배기 집에 들어서니 왈칵 눈이 부셨다. 높다란 벽마다 널찍이 뚫린 창이 불러들인 정결한 겨울 햇살 때문이다. 김형구 촬영감독과 부인 신보경 미술감독은 커튼 한장 걸 엄두를 내지 않았다. 동쪽 창에서 돋아난 해가 거실을 가로질러 부엌 창으로 기우니, 자오선을 품에 안은 셈이다. “처음에는 벽에 그림을 걸까도 생각했지만 가만 보니 창틀이 다 액자더라고. 그래서 아무것도 안 걸었죠. 하하.” 김형구 촬영감독은 그렇게 프레임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김형구 촬영감독은 올해 홍상수 감독의 <해변의 여인>과 허진호 감독의 <행복>을 찍었다. 지난해 촬영한 <괴물>도 올 여름 스크린에 올랐다. AFI(미국영화연구소) 유학에서 돌아와 1994년 <우연한 여행>으로 입봉한 그의 이력은 영평상 수상작 <비트>(1997)부터 유연하고 꾸준한 파동을 그렸다. <비트> <태양은 없다>의 역동과 <아름다운 시절> <봄날은 간다>의 적막, <무사> <살인의 추억> <역도산>과 같은 규모 큰 프로젝트와 <박하사탕>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극장전>으로 이어지는 작가영화 사이를 김형구는 근면한 시계추의 리듬으로 왕복했다. ‘배려’는 김형구와 그의 촬영을 말할 때 유용한 첫 번째 낱말이다. 같이 일하는 동안 행복한가를 기준으로 파트너를 선택하는 홍상수 감독은 김형구 촬영감독을 “점잖으면서도 막히지 않은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김형구의 카메라는 감독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온전히 이해한 다음, 상기 목적에 친절히 봉사하는 컷들을 고심한다. 그래서 “촬영은 좋더라”라는 평에 그의 심장은 내려앉고 “영화 좋더라! 촬영은 뭐, 괜찮았어”라는 소감은 그를 안도하게 만든다.

이탈리아의 감독 에르마노 올미는 “카메라 뒤에 서는 일은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카메라)가 내 대신 당신에게 키스할 거예요’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고백한 바 있다. 내러티브의 뉘앙스를 염두엔 둔 프레임, 감정의 핵심에 다가서는 사려 깊은 움직임은 김형구 촬영의 굳건한 미덕이다. 불행한 시대와 불행한 인간 어느 쪽도 시야에서 놓지 않은 <박하사탕>의 촬영은 봉준호 감독을 매혹했다. 봉 감독은 <살인의 추억>에서 김형구 촬영감독과 손잡은 일을 돌아보며 “감독의 선택이 아니라 구애였다”고 못박는다. 또한 그는 김형구의 촬영이 충분히 음미되지 않았다고 본다. “고전적 구도에 강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괴물>의 강두가 괴물을 총으로 쏘려는 순경을 밀치는 대목에서 카메라가 인물을 좇아 달리다가 강두의 눈에 정확히 포커스가 맞는 컷은 힘있는 촬영에도 탁월한 김형구 감독의 면모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뚝심은 김형구 촬영감독의 다른 무기다. 단편 <비명도시>부터 <영어완전정복>까지 김형구 촬영감독과 작업한 김성수 감독은 <무사> 중국 현장에서 조바심에 쫓기던 감독에게 이 신을 왜 찍고 있는지 조용히 물어온 김형구의 한마디를 기억한다. “김형구는 감독이 어느 하늘의 별을 쳐다보는지 알고 그 빛을 더하려고 노력하며 혼란스러울 때 방향을 상기시킨다. 봉준호, 이창동, 홍상수, 김성수처럼 누구 말도 안 듣는 감독들이 그를 찾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

<박하사탕>의 마지막 1979년 시퀀스에는 촬영감독이라는 유구한 직업에 대한 해석이 있다. 이름없는 꽃을 사진에 담고 싶은 순박한 청년 영호(설경구)는 마음을 빼앗긴 여자 순임(문소리)에게 그 소망을 털어놓는다. 그리고 엄지와 검지를 벌려 만든 네모를 통해 세상을 본다. 영호의 네모가 순임의 얼굴에 이르렀을 때 카메라는 못내 설레어 초점을 흐린다. 김형구에게도 프레임은 연인이고 예배소다. 구도를 잡아 뷰파인더를 들여다보는 순간 무심한 대상들을 연관시키고 이야기와 의미를 발생시키는 프레임의 마력을, 그는 소박한 단어로 예찬한다. 좋은 촬영은 어떤 것인지 미욱한 물음을 품었던 나는 듣던 중 어이없도록 단순한 진실을 깨달았다. 촬영이 영화에 ‘기여’한다는 표현은 부정확하다. 촬영되지 않은 영화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좋은 영화’라고 말할 때 좋은 촬영은 거기 이미 포함돼 있다.

인터뷰에 붙들린 아빠를 기다리던 아이들이 진력날 시각이 됐다. “언니! 찍어줄게!” 김형구 촬영감독의 두살배기 아들이 작은 카메라를 들고 통통 달려와 구슬 같은 눈을 파인더에 진지하게 갖다댔다. 렌즈는 닫힌 채였지만 아기는 뭔가를 보았는지 까르르 만족스럽게 웃었다. 다시, 눈이 부셨다.

-얼마 전 촬영을 끝낸 <행복>이 김형구 촬영감독님의 스무 번째 장편이었나요?
=하하, 어떤 영화를 빠뜨리셨나? 스물한편째입니다. <해변의 여인>이 스무 번째죠.

-죄송합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로서는 올해가 안식년이었지만, 역시 바쁜 한해였죠?
=예전에 서극 감독의 <칠검>을 제안받았다가 촬영기간이 학기와 겹쳐 포기한 적이 있어요. 그래서 안식년에 그런 프로젝트가 왔으면 하고 내심 바랐는데, 웬걸 제 영화를 통틀어 가장 짧은 30회차 6주 촬영의 <해변의 여인>을 찍었죠. 즐거운 현장이었어요. 바닷가에서 조깅하고, 하루 두세컷 찍고 나면 저녁에 회 먹으며 술잔도 기울이고. 끝날 무렵 스탭들이 “감독님, 우리 조금만 더 찍으면 안 될까요?”라고 조르는 지경이었죠. 아, 우리 딸이 인사를 하겠답니다.

-아, 따님이 <괴물>의 고아성양과 무척 닮았네요.
=<괴물> 시사회 뒤풀이 자리에 데려갔더니 이현승 감독과 영화사 봄의 오정완 대표가 착각하고 “너 연기 참 잘하더라” 하고 칭찬하더라고요. (웃음)

-올해 개봉한 작품 두편부터 이야기할까요. <해변의 여인>의 촬영은 신기했습니다. 바닷가 동네의 공기를 시각뿐 아니라 촉감, 냄새까지 살려서 전하는 느낌이었어요.
=그랬다면 홍상수 영화의 작업방식으로부터 전달된 감각 아닐까요? 아시다시피 홍상수 감독은 사전 정보를 많이 주거나 회의해서 계획 세우는 일이 없어요. 그나마 스탭은 기자재를 준비해야 하니 시나리오를 주는데 연기자는 한번 줬다 빼앗아버리니까 배우들이 우리에게 무슨 장면이냐고 넌지시 묻기도 하죠. 아침마다 스탭과 배우가 모여서 감독님이 일어나 (우리끼리 표현으로) ‘집필’하시길 기다리는데 그 날 시나리오를 본 다음에 정확히 어디에 카메라를 놓을지 결정합니다. <행복>의 허진호 감독도 그렇지만, 한국 감독들은 현장에서 느낌을 포착해 찍는 경우가 많아요. 그들과 작업하다보니 저 역시 촬영감독으로서 현장감에 많이 의존하게 된 면이 있어요.

-바닷가에서 문숙과 중래, 개가 뛰어노는 마치 뮤직비디오 같은 대목은 과거 홍상수 영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충격적인’ 장면이었는데요. 어떻게 찍으셨어요?
=<극장전>(2005)부터 주로 실내에서 투숏(두 인물의 숏)을 찍다가 대사하는 인물에게 다가가는 식으로 줌을 썼죠. 그런데 이번에는 펼쳐진 공간에 인물을 풀어놓고 찍다보니 홍상수 감독 영화에서 거의 쓰지 않던 극단적 망원렌즈의 줌을 사용했어요. 인물 움직임에 따라 초점이 어긋난 순간도 있었어요. 돌리(dolly, 이동차)를 써보자고 했지만 홍 감독은 “카메라는 모름지기 삼각대 위에 있어야 불안하지 않다”는 주의예요. (웃음) 개펄에서 문숙의 차가 빠져나가는 마지막 장면도 200도 패닝하며 줌으로 따라가는, 난해한 숏이었어요.

-펜션 침대에 누워 있는 중래(김승우)와 문숙(고현정)의 몸 위로 어른거린 커튼 그림자는 자연광이 만든 것인가요?
=홍 감독 영화는 자연광만으로 조명하기가 불가능해요. 하루 종일 같은 컷을 찍기도 하는데 태양광은 한 시간만 지나도 금방 각도가 변하잖아요. 게다가 철저히 순서대로 찍으니 자연광 기다리다가는 일정대로 마칠 수 없죠.

-듣기로는 홍상수 감독과 함께한 첫 작품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2004)에서는 몰래 렌즈를 바꾸신 적도 있다던데.
=생각보단 눈치를 잘 못 채시더라고요, 하하하. 홍상수 감독에게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촬영을 제안 받았을 때 실은 먼저 약속한 작품이 있었어요. 지금 내가 거절하면 홍 감독은 다시 날 찾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선약한 쪽에 싹싹 빌고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를 택했어요. 그런데, 여기가 맞겠거니 카메라 위치를 잡아놓으면 홍상수 감독은 조명하기 힘든 하얀 벽 앞쪽을 가리키며 “난 여기가 더 예뻐요” 그러는 거예요. 뭐, 감독이 예쁘다니 별수있나요? (웃음) <극장전>은 줌의 속도를 두고, 인물들의 분위기를 깨지 않으려는 저와, 컷을 대신하는 줌을 원한 홍 감독의 의견 차이가 조금 있었지만. <해변의 여인>에서는 신뢰가 쌓여 구체적 주문이나 이견이 특별히 없었어요. 내년에도 네 번째 공동작업을 할 거예요.

-<괴물>에서도 줌을 활용하셨습니다. 박강두(송강호)가 딸을 구하기 위해 트레일러에서 탈출해 한강 앞에 선 뒷모습이나, 마지막 원효대교에서 괴물과 대결하는 장면의 촬영방식이 궁금해요.
=한강 교각을 배경으로 흰 옷의 송강호가 서 있는 장면인데, 카메라를 움직이면서 줌으로 숏 크기를 유지하면, 고정된 카메라로 찍은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 있어요. 원효대교 시퀀스에서는 몸에 불이 붙어 강물에 뛰어들려고 하는 괴물의 시점 숏으로 찍은 장면이 있을 거예요. 트럭에 스테디캠을 거치하고 거기다 줌 렌즈를 달았죠. 트럭이 배우에 너무 근접해서 정지하면 사고 위험이 있으니 트럭은 미리 멈추고 저는 모니터 앞에서 전동 줌을 들고 있다가 트럭의 정지를 관객이 알아차릴 수 없도록 트래킹 움직임과 바로 연결해 줌인했어요. 운전기사, 스테디캠 촬영기사, 포커스, 그리고 저까지 네 사람의 호흡이 맞아야 비로소 완성되는 숏이었죠.

-과거에도 아날로그 색보정 작업은 있었지만 D.I.(Digital Intermediate, 필름을 스캔해 디지털화한 다음 화면을 보정하는 작업)로 화면 수정이 크게 자유로워졌습니다. 촬영하는 입장에서는 어떤 차이가 있었나요?
=D.I.는 <역도산>(2004)에서 처음 경험했는데, 일종의 모션 픽처용 포토숍이랄 수 있죠. 현장에서는 통제하기 힘든 컬러와 콘트라스트를 후반작업에서 버튼 하나로 쉽게 해결할 수 있고 화면 일부만 따로 떼서 손보는 작업도 가능해졌으니까요. 한국 영화현장이 그동안 작품당 계약으로 운영되다보니 하루 찍으나 이틀 찍으나 마찬가지라 현장에서 다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었어요. 그러나 앞으로 조건이 바뀌어 할리우드처럼 빡빡한 스케줄로 현장이 운용된다면 후반작업으로 부담을 넘기는 편이 경제적으로 유리하겠죠. 밝기, 컬러 등 D.I.에서 잡을 수 있는 부분을 현장에서 과감히 포기하고 진행하겠지요. 반면 우리는 어차피 ‘현장맨’인데 그래도 되도록 현장에서 승부를 걸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있어요. CF는 이미 카메라맨이 기능적 역할만 한다는 말을 들었어요. 나름의 컨셉을 갖고 열심히 찍어서 갖다줬는데 감독이 후반작업에서 색깔 바꾸고 효과 내서 촬영자가 생각지도 못한 다른 작품이 나왔다고 하더군요. 영화도 그리 되면 어떡하나 싶어요. 하지만 아직 D.I.에 대해서는 표현의 확장이라는 느낌이 더 커요.

"영화하는 사람들은 정말 좋은 사람, 착한 사람들이에요."

-<봄날은 간다>(2001) 때, 극중 상우의 집 같은 개량한옥에서 자랐다고 회상하셨는데요.
=서울 화곡동의 국민주택 단지였는데, 열심히 연탄을 간 기억이 있어요. 그러다 가스 마시고 헤매기도 하고…. (웃음) 여름에는 마루 문을 활짝 열어놓았고 겨울에는 따뜻한 내 방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곤 했죠.

-부친이 사진 찍는 취미도 있으셨고 바이올린을 배우라고 권하셨다고요.
=살기 힘든 1970년대였지만 예술에 관심이 많은 부모님이셨어요. 아버지는 전쟁기에 평안남도에서 단신으로 월남하여 군에서 사무를 보는 관리병으로 일하셨는데 고전음악을 굉장히 좋아해서 일요일 아침이면 오페라 아리아를 틀어주시며 “얘들아, 일어나라” 깨웠던 기억이 있어요. 전쟁 초기에 베트남에 다녀오셨는데 레코드를 잔뜩 사오셔서 저도 10대 시절에는 관현악곡을 틀어놓고 지휘하는 시늉을 했죠. 첸카이거 감독의 <투게더>를 찍을 때 큰 도움이 됐어요. 극중 주인공이 연주한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이 암기하다시피한 곡이라 카메라를 잡은 제 손이 저절로 활의 리듬에 따라 움직이며 찍은 컷이 있어요.

-감독님의 온화하고 유연한 성격에 대한 영화인들의 경험담을 들어보면, 성장기에 심리적으로 굉장히 안정된 환경에서 지내지 않았을까 짐작하는데요.
=풍족하진 않았지만 부모님이 많은 사랑을 주셨고 원하는 일은 모두 하게 해주셨어요. 중학교 때 사진을 처음 찍은 것도 아버지 영향이죠. 아버지가 베트남에서 무진장 많이 찍어온 사진을 모두 컬러 슬라이드로 만들어 밤마다 환등기로 집에서 영사를 했는데 그 재미가 대단했어요. TV도 흑백인 시절이잖아요. 제게는 극장보다 앞선 영화적 경험이죠. 학년이 올라가자 아버지의 카메라를 물려받았고요. 그래도 사춘기의 어려움은 있었죠. 미국 유학을 가서 파일럿이 되겠다고 결심하고, 현지 아르바이트 준비를 한다고 엉뚱하게 자동차 정비학원에 다닌 적도 있어요.

-중앙대 사진과 재학 시절 연합 영화 동아리에 몸담으셨습니다. 영화보다 동아리가 더 좋았다고 말씀하신 적 있습니다. 최근에도 “내게 중요한 것은 영화적 결과보다 영화를 찍는 동안 같이 일하는 사람과 느끼는 행복”이라고 밝히셨고요.
=동아리에서 사람들과 논쟁하고 부딪히다가 뒤풀이로 갈등을 풀며 끝내 뭔가를 여럿이 만들어내는 일이 너무나 재미있었어요. 지금까지 스물한편을 만들었지만 영화하는 사람들은 정말 좋은 사람, 착한 사람들이에요. 물론 그렇지 못한 몇몇 제작자도 있겠지만(웃음). 영악한 사람들이라면 더 큰 보수를 찾아 떠나지 않았겠어요? 펀드매니저 같은 일을 해서 큰돈을 벌겠죠. 하하. 그러니까 우리는 너무 착하거나, 음, 너무 무능하거나. (일동 웃음)

-영화현장에서 평생의 친구들을 사귀고 반려자인 신보경 미술감독님도 만나셨잖아요. 영화현장이 연애하기 좋은 환경이라고 보세요?
=보통 직장동료도 매일 보긴 하겠지만, 영화현장은 피부로 부딪혀가며 서로를 느끼니까요. 특히 지방에서 오래 찍는 영화가 커플을 양산하는데, 하하, 서너달씩 집 떠난 남녀가 촬영 끝나면 뭘 하겠어요? 어디 가서 차나 한잔 하자, 아니지, 술 한잔이겠죠? (웃음) 5개월간 지방을 돌며 찍은 <살인의 추억>은 너덧 커플이 맺어져 두쌍이 결혼했답니다.

-비단 감독님만의 경험은 아니겠지만, 촬영부 막내 시절 내내 카메라 다리만 붙들고 있다가 식사 시간에는 혼자 카메라 지키고 남들 먹은 뒤에야 혼자 밥을 먹은 추억이 있으시죠. 그맘때 혼자 밥을 먹을 때면 무슨 생각을 하셨어요?
=도리어 행복했죠. 당시 촬영부는 군대와 같아서 막내는 신병이나 마찬가지였어요. 제1, 2, 3조수의 서열이 있어서 ‘이병’ 격인 제게 일병이 스트레스를 주고 일병은 상병에게 시달리는 체제였어요. 늘 몹시 긴장되고 피곤했는데 먹을 때만큼은 혼자 있으니 마음이 편했어요.

-AFI(미국영화연구소) 유학을 떠나실 때는 몇년 지나면 충무로가 달라져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하셨겠네요.
=조수 생활을 마치고 김태균 감독이 ‘영화공장 서울’이라는 제작사를 차릴 때 제가 적극 동참했어요. 거기 모인 친구들이 감독으로 데뷔해야 내가 카메라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들이 나의 꿈”이라고 믿었죠. 거기서 오석근 감독이 연출한 <네 멋대로 해라>라는 영화의 촬영을 맡았는데 모두 경험이 없으니 프로덕션이 더뎠어요. 결국 촬영감독이라도 충무로 경험자를 쓰면 속도가 붙겠거니 판단한 제작부장이 저를 잘랐어요. 이 작품이 잘돼야 회사가 잘되고 그래야 너한테도 좋다는 이야기였죠. 하지만 영입된 충무로 촬영감독은 일정이 길어지자 도망가버렸고 대안이 없으니 다시 저를 찾았어요. (웃음) ‘영화공장 서울’ 작품으로는 현재 영화아카데미 원장 박기용 감독의 <광 1990>도 있는데, 박기용 감독은 그 작품을 뭐랄까 생애 가장 커다란, 우(愚)라고 생각해요. (일동 폭소) 그래서 비디오 가게에 그 영화가 있으면 무조건 빼서 폐기처분했다는 설이 있죠. 결국 영화공장도 문을 닫고 AFI 입학허가를 받았는데 이번에는 이정국 감독이 광주항쟁을 그린 <부활의 노래>를 국민 모금으로 만든다는 거예요. 저도 제작비를 보태고 3회차를 촬영했는데 펀딩이 안 돼 새로 나선 제작자가 촬영감독 교체를 요구했다는 거예요. 내가 꼭 필요하다고 해서 합류했는데 큰 상처를 입었죠.

-<비트> <무사> <영어완전정복>을 함께 찍은 김성수 감독 말씀에 따르면, AFI를 졸업하고 돌아온 김형구 촬영감독님이 “영화에 대한 생각이 정리됐다”고 말씀하셨다고요.
=저는 사진도 있는 그대로 피사체를 찍는 스트레이트 포토 위주로 작업했고 영화에서도 조명에는 무지했어요. 모르니까 아예 피하려는 습관마저 있었죠. 하지만 철저히 미국의 촬영감독 시스템(Director of Photography)에 따라 가르치는 AFI에 가니까 촬영의 핵심은 조명이었어요. 그래서 카메라 작동은 오퍼레이터에게 맡기고 조명 설계를 해보았더니 굉장히 재미있었고 나중에는 테이크 갈 때마다 흠이 보여 “잠깐!” 하고 조명 기기를 매만진다고 별명이 ‘잠깐이’가 됐죠. 촬영 도제 시스템 안에서는 공부하지 못했을 부분이고 조명부 생활을 10년쯤 해야 배울 내용이었죠. 요컨대 AFI에서 얻은 가장 큰 배움은 시스템이었어요.

-유학을 마친 뒤 도제 시스템을 고집하는 촬영감독협회의 인준을 받지 않고 바로 장편 촬영을 시작하셨어요. 대놓고 투쟁하지는 않았으나 관행에 흠집을 내고 충무로에 새로운 촬영감독이 진입하는 다른 길을 터놓은 셈입니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대단치 않은 일 같지만 당시로서는 진로가 막힐 가능성을 불사한 일이었을 텐데요.
=중앙대 사진과, 영화 서클, 영화 아카데미, AFI를 거쳐 영상원 교수까지 저와 같은 경로를 한두해씩 먼저 밟은 박현철 촬영감독과 제가 초창기에 작품하는 데에 불이익을 받았죠. 협회의 어르신들과 저는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 같았어요. 저는 서클에서도 아카데미에서도 촬영만 했고, 오직 찍는 것을 제 일로 알았는데 막상 충무로에 오니까 찍는 일과 무관한 조수 생활부터 10년 하라는 거였죠. 제가 협회에 찾아가 촬영을 하고 싶다고 하니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으며 찍은 작품을 말해보래요. 단편과 16mm 작품을 말씀드리니 “야, 그건 애들 장난이지. 이건 35mm야. 영화라고”, 하셨어요. 그러니까 제가 한 작업은 장난이고 35mm영화와는 건널 수 없는 차이가 있다는 입장인데 사실 도구의 차이에 불과할 수도 있지 않은가 싶었죠.

"촬영감독은 ’찍기’를 위해 이유가 필요하죠"

-김성수 감독께서 <무사>를 촬영할 당시 정신없이 액션을 찍느라 현장에서 몰아치고 있노라면 김형구 촬영감독님은 거기 휩쓸리지 않고 침착하게 “우리가 지금 이걸 왜 찍는 거였지?”라고 초심을 환기시켜 주셨다고요.
=솔직히 그건 제 임무예요. 감독은 생각도 많고 욕심도 많으므로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게 마련이에요. 하지만 저는 앞뒤 컷과 이어진 흐름 속에서 이 컷이 어떻게 쓰일지 정보가 없으면 카메라 렌즈를 대는 일 자체가 불가능하거든요. 감독은 “찍고 보자”고 말하더라도 촬영감독은 그 ‘찍기’를 위해 이유가 필요하죠. ‘그냥’, ‘일단’ 찍을 수는 없어요. “우리가 뭐하는 거지?”라고 때때로 반문할 수밖에 없죠.

-촬영 분량을 바로 붙여보는 현장편집은 촬영감독의 작업에도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현장편집에는 문제점도 있어요. 한컷 찍을 때마다 전원이 작업을 중지한 다음 이리저리 붙여보는 동안 기다리니까 현장이 느려지는 치명성이 있죠. 가끔 현장편집 노트북을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웃음) 사실 저는 현장을 전쟁터에 많이 비유하거든요. 옆에서 전우가 쓰러져가는 걸 고통스럽게 지켜보며 싸우는 치열하고 긴장된 공간이어야 하는데, 임무가 불분명하거나 서로에게 일을 미루는 인력이 보일 때도 있어요. 예컨대 <극장전>의 현장 인원은 배우까지 스무명이 전부였는데, 나 아니면 할 사람이 없다는 인식이 투철하니까 경험이 없는데도 크리스마스 이브 종로통 통제까지 해내더라고요. 우리 영화현장에는 진짜 프로페셔널이 더 많아야 해요. 모든 영화가 출발할 때는 세밀한 시간표를 만들지만 처음 몇번 지나면 지켜지질 않거든요. 나중엔 됐다고, 종이 아깝다고 그만 만들라고 했죠. (웃음)

-<무사>와 같은 해에 <봄날은 간다>도 개봉했죠. 고 유영길 촬영감독님의 유작인 허진호 감독의 데뷔작 <8월의 크리스마스>의 잔상이 혹시 부담스럽진 않았나요?
=유영길 촬영감독님은 스승님이나 다름없는데 공교롭게도 허진호 감독뿐 아니라 이창동 감독, 박광수 감독의 작품도 유영길 촬영감독님에 이어 제가 찍게 됐어요. 부담이라기보다 유 감독님이 주신 선물처럼 느끼기도 했고 “열심히 해보겠습니다”라는 마음이었죠.

-<박하사탕>(1999)은 여러 번 보고서야 촬영이 얼마나 섬세한지 깨달았습니다. 영호라는 인물을 바라보는 감독의 눈이 되어 모든 컷이 심리적으로 ‘적정한’ 거리, 밝기, 움직임을 고민한 인상입니다.
=<박하사탕>에서 중요한 컨셉은 콘트라스트를 낮추는 거였어요. 그때까지 한국영화는 명암 차이가 너무 강해서 중간톤이 빈약했어요. <박하사탕>은 여러 시퀀스로 분절된 인물의 삶이 매우 센 편이므로 화면도 그리 되기 쉬운데 저는 하이라이트는 누르고 검정은 너무 먹지 않도록 조절해 중간 단계를 풍부한 층으로 표현하고 싶었어요. <살인의 추억> 전까지 개인적으로 가장 만족스러운 작품입니다.

-<박하사탕>도 한 예지만 촬영감독의 공헌은 생색이 덜 나잖아요. 영화상들도 자극적 스타일의 촬영에만 민감하고, 관객은 반복 관람 뒤에야 촬영의 기여를 알아보고, 모처럼의 혁신도 업계 내부자만 눈치채고요.
=특별히 관심있는 사람 말고는 모르죠. 하지만 캐릭터도 조명 하나에 따라 굉장히 달라져요! 얼마 전 미국의 한 워크숍에서 기성 촬영감독들에게 사막에서 목마른 사람이 카페테리아를 발견하는 내용을 주고 한두컷으로 자유롭게 찍어오게 했는데 결과가 천차만별이었어요. 밝기, 콘트라스트부터 단순한 팬, 트래킹, 카메라를 고정해 찍은 사람, 안에서 밖으로 한컷에 찍은 사람 등등. 사실 영화의 숏에 정답은 없지만 촬영감독은 감독의 머릿속에 담겨 있는 상을 화면에 옮기는 방법을 제안할 수 있어야죠. 이른바 콘티라고 해서 컷 나누기도 감독 영역처럼 보이지만 조명의 색상이나 명암 차이 같은 부분은 감독이 신경쓰지 못하거든요.

-<살인의 추억>(2003)의 김무령 PD는, 멜로보다 사회적 요소가 들어간 굵직한 드라마가 있는 기획이 있을 때 김형구 촬영감독님을 적임자로 제일 먼저 떠올릴 거라고 하시더군요. 안정감을 잃지 않으면서 감정을 담아내기 때문이라고.
=제가 신뢰하고 같이 일한 감독들의 취향이 그랬던 것 같네요. 분명한 건, 공포영화는 무서워서 싫고요. (웃음) 허름한 느낌이라도 코끝이 찡하고 눈물이 핑 도는 시나리오에 끌려요.

-감독님이 촬영한 김성수 감독의 단편 <비명도시>와 <비트>를 다시 보니 ‘골목영화’라는 장르 이름이 떠올랐어요. 골목도 한국 도시만의 공간 아닐까요. 도시의 변화 때문에 앞으로는 그런 영화를 찍기 힘들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뒷골목(alley) 장르랄까, 확실히 다르죠. 외국 대도시 뒷골목은 그래도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너비지만 <비명도시>와 <비트>의 공간들은 거의 다 아파트가 들어서며 사라졌어요. 특히 <비명도시>의 홍대 뒷골목들은 남김없이 재개발됐을 거예요. 경기영상위원회의 공모에 심사위원으로 갔는데 광명시처럼 옛 서울 모습이 남은 공간이 눈에 밟히더라고요. <투게더>는 베이징에서 찍었는데 거기도 ‘후통’이라 불리는 골목들이 많이 사라졌더군요.

"앵글 하나를 흡족하게 잡을 때의 흐뭇함은 감사의 감정에 가까워요"

-시머스 맥거비라는 촬영감독이 “촬영감독의 최대 무기는 튼튼한 방광과 노출계”라는 어록을 남겼더군요. (웃음) 감독님이라면 무엇을 무기로 꼽으시겠어요?
=노동 시간이 짧은 만큼 그 안에 정해진 목표를 채우기 위해 잠깐의 쉴 틈도 없이 가는 할리우드에서는 일리있는 이야기네요. 하지만 우리는 빨리 다음 세팅으로 넘어가고 싶어도 현장편집 등으로 본의 아니게 쉬는 시간이 있으니까 사정이 다르죠. 촬영감독의 무기라면 좋은 눈도 있겠고 그렇죠, 홍상수 감독과 작업하려면 간도 좋아야겠죠.(웃음)

-사실주의와 표현주의의 경계가 촬영만큼 모호한 분야도 없는 듯합니다. 이를테면 <비트>는 형광등, 백열등 같은 현실의 광원을 살리는 조명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표현주의적 촬영으로 불렸잖아요. 사실적 촬영이라고 말할 때 사실 그대로를 찍느냐, 관객이 영화 보는 관습에 비추어 사실적으로 찍느냐는 완전히 다르겠죠.
=고민했던 부분입니다. 하지만 그런 논쟁은 수업 시간의 커뮤니케이션을 편하게 하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어요. 다큐멘터리는 당연히 사실적일 것 같은데, 실제 우리 눈은 카메라 렌즈와 달라서 인위적 조명을 하지 않은 다큐멘터리가 기괴하게 보일 때가 있어요. 사람의 눈은 아무리 희거나 검어도 사물의 텍스처를 파악하지만 카메라는 그런 능력이 없거든요. 실은 <박하사탕>의 촬영 개념이 우리 눈에 보이는 것에 가장 가깝게 빛을 그러데이션하는, 말하자면 ‘자연주의’였죠. 그런데 너무 자연스러워 못 알아봤는지 혹시 조명 안 하고 있는 그대로 찍었냐는 관객도 있더라고요. (웃음)

-촬영감독이 보는 배우는 좀 다를 것 같은데, 피사체로서 배우에 대해 특별한 경험은 없으세요?
=<투게더>에서 첸카이거 감독의 부인인 여배우를 반드시 예쁘게 찍어야만 했던 경험은 있지만, 글쎄요. 우리 여배우들은 무조건 피부가 희어야 한다고 믿는지 여태 적당한 스킨톤을 지닌 여배우를 본 적이 없어요. 화장을 전혀 안 해도 미백을 하는지 표백을 하는지(웃음) 무조건 하얗죠. 조명이 힘들고 남자배우와 함께하는 숏에서 스킨톤 조절이 어려워요. 그런데, 미국영화를 보면 스킨톤이 놀랄 만큼 일정해서 분장팀의 능력에 감탄하게 됩니다.

-오래전 영화잡지 <키노>에 친필로 “한편의 영화가 사람을 변화시키고 그 변화된 사람들이 모여 사회를 변화시키길. 좀더 나은 사회를 위한 영화로서”라는 문구를 쓰신 걸 봤습니다.
=제가 속했던 대학 영화 동아리는 본래 운동 성향이 강한 ‘우리 마당’이라는 집단의 영화패였는데 정치 운동으로서 영화를 하라는 요구를 받고 떨어져나왔어요. 그러나 ‘영화마당 우리’로 독립한 뒤에도 영화를 통해 세상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기본적 고민은 계속됐죠. 그 시절 영화 책을 사면 표지에 제일 먼저 적던 문구였죠. 어느 순간부터 많이 잊고 살았네요.

-촬영감독의 천적은 무엇인가요? 혹은 누구인가요?
=감독과 조명기사겠죠? 최대의 동반자이자 현장에서 많이 부딪히는 천적이죠. 개인적으로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 영화 만드는 순간의 행복을 좌우하는 존재가 감독이기도 하고요. 만약 우리 영화도 할리우드처럼 규모가 커져서 카메라가 여러 대 쓰이면 촬영감독이 카메라를 떨쳐버리고 감독과 작품에 대한 논의에 집중하는 날이 올지도 몰라요. 하지만 아직은 아니죠. 게다가 저는 카메라를 직접 다루는 작업을 굉장히 즐겨요. 파인더를 들여다보는데 셔터가 돌아가면서 트래킹으로 다가갈 때, 배우의 감정을 목격할 때, 내가 원하는 아름다움을 만들었을 때의 환희는 말로 다 할 수 없어요. 카메라를 조수에게 맡기고 모니터 앞으로 빠져본 적이 있는데 어찌나 좀이 쑤시던지. “조금만 위로, 오른쪽으로” 잔소리하다가 결국 “그냥 내가 할래”라고 나서고 말았죠.

-언제나 프레임과 씨름하는 작업입니다. 프레임이 구속처럼 느껴질 때도 있나요?
=프레임이 구속이라면 이 직업이 불행하겠죠. 제겐 프레임과 겨루는 일이 가장 큰 기쁨이고 즐거움이에요. 내가 프레임에 무엇인가 잡아놓지 않으면 현장은 돌아가지 않아요. 우선 카메라가 딱 앵글을 잡으면 그때부터 연출부, 제작부, 미술부가 그 안을 채우기 시작하는 거죠. 그래서 언제나 가장 먼저 내가 뭔가 해내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요. 물론 간혹 망설임이 있지만 내가 빨리 확신을 가져야 모든 일이 돌아간다는 사실을 명백히 인식하고 있어요. 결정은 빠른 편이고 대부분 즐거워요. 드디어 뭔가 만들었구나! 좋아! 소리없이 속으로 외치죠.

-작품 수가 10편이 넘었을 때 “나는 내 스타일을 말할 엄두도 안 난다. 계속 어린 마음으로 도전만 하고 싶다”고 말하셨습니다. 스무편을 넘긴 지금은요?
=그대로예요. 저는 우연히도 호흡이 빠른 김성수 감독 영화와 느린 영화들을 번갈아 찍었고, 김성수 감독이 나비픽처스를 차리고 뜸해진 다음부터는 거꾸로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빠른 영화들과 어울려 제 작업에 일정한 주기를 만들어주었죠. 단조롭지 않게, 재미나게. 전 정말 운이 좋아요. 하나님이 저를 좋아해서 이런 것을 예비했다가 주시는구나 싶어요. 제 능력이 크다고는 결코 생각지 않습니다. 앵글 하나를 흡족하게 잡을 때 솟는 흐뭇함은 그래서, 저로서는 감사의 감정에 가까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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