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탕발림이란 걸 뻔히 알면서도 그가 파놓은 사랑의 함정은 피할 수 없다. “눈이 예쁘다, 너.” 최신 유행 아이템인 게스 청바지까지 찾아 대령하는 맘 좋은 사촌언니가 아무리 뜯어말려도 열여덟살 나정주의 ‘예쁜 눈’에는 조하늬밖에 보이지 않는다. 여자 꼬이는 솜씨 하나는 끝내주는 3학년 선배이자 밴드부 보컬 조하늬. 눈웃음을 동반한 수줍은 미소가 귀엽게 느껴질지 모르나 악마 같은 그에게 넘어가 눈물 흘린 소녀들이 산을 이룰 정도다. ‘될 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더니 장차 뭇여성들을 “꺅!” 소리 지르게 만드는 유명 가수로 자라날 그의 이름 석자에 7반 한송이도, 9반 영아도, 서른살까지 그를 탓하며 노처녀로 늙어갈 어린 나정주도 껌뻑 넘어간다.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는데 하늬 역이 가장 눈에 띄었어요. 자기 색깔을 제일 많이 지니고 있는 캐릭터라고 생각했어요. 너무 하고 싶어서 감독님께 맡겨달라고 말씀드렸죠.” 김정민이 연기한 느끼하기 그지없는 조하늬의 아역을 덜컥 받아안은 이중문은, 극중 대사나 몸짓을 직접 선보이는가 하면 눈이 마주치면 배시시 미소 지을 정도로, 겉멋 부리는 스크린 속 그보다 훨씬 솔직하고 쾌활했다. “어렸을 때 내성적이라 말을 잘 못했어요. 그러다 어느 순간 느꼈죠. 이렇게 소극적으로 살아서 내게 좋을 게 없겠구나, 내가 나서서 잘하지 않으면 그게 그대로 돌아오겠구나. 지금은 먼저 얘기도 잘하고요, 잘 웃는 편이에요.”
칼을 품으며 젊은 삶을 마감하는 <야수>의 이동직 역은 그런 이중문에게 무척 어렵고 괴로운 것이었다. 네다섯신밖에 되지 않는 짧은 출연 분량에도 자신의 촬영은 한달 걸러 찾아올 정도로 드문드문했고 “웃음 많은 성격” 때문에 배역에 적응하지 못할까봐 “머리도 안 깎고 수염도 기른 지저분한 상태”를 유지했던 넉달 정도의 촬영 기간 내내 정말 우울하게 지내서였다. “<야수>는 제가 가진 것 중에 가장 어두운 면을, <언니가 간다>는 제가 가진 것 중에 가장 느끼한 면을, <열여덟 스물아홉>은 제가 가진 것 중에 가장 순수한 면을, <101번째 프러포즈>는 제가 가진 것 중에 가장 수다적인 면을 뽑아낸 작품이에요. 연기를 할 때는 그런 식으로 제 속의 어떤 부분을 더 뿜어내요.” 느긋하고 부드러운 말투와 달리 다부지고 끈덕진 구석도 많다. 고등학교 졸업 뒤 진학했던 유전공학과를 자퇴하고 학원과 집을 쳇바퀴처럼 오가며 연기자의 꿈을 좇았던 에피소드가 이를 증명한다. “정확하게 6주 다녔어요. 휴학을 해야 할지 자퇴를 해야 할지 굉장히 고민했죠. 당시에는 좋아하는 일을 하다가 실패하는 게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고 연기에 대한 스스로의 의지 역시 시험하고 싶어서 결국 자퇴를 했어요. 그 다음 무작정 입시연기학원에 등록해 공부했죠. 반년 정도 그런 생활을 했는데 그 시기가 제 인생에서 제일 열심히 살았던 때예요. 다시 그렇게 살라면 못할 것 같아요.”
‘가운데 중’(中)자와 ‘글월 문’(文)자가 합쳐진 이름이 독특하게 느껴진다는 평에 “집안의 기대를 받으며 자랐죠(웃음)”라는 농담 섞인 답변이 돌아왔다. 원래 조용한 성격이었고 학교 친구들조차 배우가 됐다는 소식을 믿지 않을 정도로 착실한 학생인 그였기에 연기에 대한 갈망을 피력했을 때 주위의 소란이 컸다. “다들 헛바람이 들었다고, 안 된다고 말렸죠. 이요원씨가 제 사촌누나예요. 저까지 연기자로 나서면 딴따라 집안처럼 보일 거라는 얘기도 들었어요. 부모님 역시 화를 내셨죠. 유전공학과에 다니고 있을 때 아버지랑 대학로에 밥을 먹으러 간 적이 있어요. 연기를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는데 조용히 계시다가 창밖을 가리키세요. 보니까 전단지 나눠주는 친구들이 있더라고요. ‘너 저렇게 되고 싶어?’ 물으시는데 ‘네’라고 대답했어요.” 그렇게 얻은 “반년의 유예기간”을 무사히 이겨낸 이중문은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에 합격했고 더블액션, 카메라워크 등을 직접 체험하며 촬영해 “가장 많이 배운 작품”이라고 여기는 드라마 <그녀는 짱>을 통해 데뷔했다. 행운은 조금 더 길게 이어져 드라마 <열여덟 스물아홉> <101번째 프러포즈>와 스크린 데뷔작 <야수>를 거쳐 <언니가 간다>에 도달한 현재, 도톰하고 단정한 입매로 그는 대답한다. “감독님들은 영화 전체를 걱정하세요. 좋은 연기자란 감독님의 그런 걱정 중에 일부를 떼내서 자기 걱정으로 삼는, 자기 역할에 책임을 지는 존재예요. 그건 연기자가 해야 할 당연한 숙제라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