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할리 베리가 닦은 길을 따라, <데자뷰> 배우 폴라 패튼
2007-01-18
글 : 박혜명

몇년 전의 할리 베리를 보는 듯하다. 액션스릴러 <데자뷰> 속의 폴라 패튼은 가늘고 매끈한 콧날과 뺨을 가졌고 흑인들의 전유물과도 같은 비율 좋은 탄탄한 몸매를 과시하며 주목을 끄는 아름다운 흑인 여자다. 또 <엑스맨>(2000)의 베리만큼은 아니어도 폴라 패튼은 <데자뷰>의 주인공 덴젤 워싱턴과 뜀박질을 하면서 간간이 액션도 구사한다. <스워드 피쉬> <007 어나더데이> 등에서 ‘섹시한 흑인 여배우’로 대중적인 매력 어필에 성공한 할리 베리의 역할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듯하다. 타입캐릭터 안에서 최선을 다한 그녀가 심지어 <데자뷰>의 포스터에서 보여주는 옆모습은 문자 그대로 할리 베리의 생김과 닮았다.

선배와의 차이점이라면 ‘연습생’ 기간이 길지 않았다는 것. 주류영화의 주역으로 발돋움하기까지 패튼이 걸어온 우회로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짧다. 1966년생인 할리 베리는 <정글 피버> <마지막 보이스카웃> 등을 거친 다음 워런 비티의 정치물 <불워스>(1998)에 진입하기까지 20여편의 TV물과 영화를 거쳐야 했다. 반면 폴라 패튼은 “집에 앉아 TV채널을 돌리고 있으면 하루에 한번씩은 꼭 만나게 되는 배우” 덴젤 워싱턴과 공연하기 전까지 고작 4편에 출연했다. 그중 한편은 윌 스미스 주연의 코미디물 <Mr. 히치: 당신을 위한 데이트 코치>이며 또 다른 한편은 같은 해 <데자뷰>보다 조금 일찍 미국 개봉한 뮤지컬영화 <아이들와일드>다. 패튼은 <아이들와일드>에서도 주연을 맡았다.

일단 엄청난 행운이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데자뷰>를 계기로 쏟아진 인터뷰에서 폴라 패튼은 다음의 삼단논법을 들곤 한다. “어릴 때부터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걸 흉내내길 좋아했다”→“부모님이 영화를 좋아하셨다”→“배우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해밀튼 매그닛 예술고등학교에 들어가 연기를 전공했고 아서 밀러의 희곡 <크루서블>에서 애비게일을 연기하는 게 가장 좋았다는 기억도 털어놓지만, 그런 흔하디 흔한 설명보다 좀더 흥미로운 건 그녀가 고등학교 졸업 즈음 마음을 바꿔 감독이 되고 싶어했다는 이야기다. USC의 여름 특별강좌에서 영화연출을 배운 뒤 패튼은 <PBS> TV쇼를 통해 다큐멘터리 제작지원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도 했다. 다른 세명의 선발자들과 함께 3개월간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메디컬 다이어리>(2000)라는 다큐멘터리를 찍었고, 버클리에서 영화 수업을 한 학기 들으며 자기가 정말 연출자를 하고 싶은 게 확실하다고 믿게 됐다. 그리고 USC로 돌아가 정식으로 영화과를 수료했다. 그 마음이 다시 배우쪽으로 돌아선 건 졸업 뒤 프로덕션 어시스턴트(P.A., 우리나라 현장으로 치면 제작부장 정도에 해당하는 스탭)로 본격적인 현장 일을 시작한 다음이다. “여기 커피 좀 갖고 와!” “여기 이것 좀 치워!” 같은 온갖 사소한 명령에 움직이는 일이 점점 싫어지던 와중에 여주인공이 여차저차한 사정으로 중도하차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 순간 현장에서 패튼은 이렇게 생각했다. ‘아, 내가 했으면 좋겠다. 사람들이 나보고 심부름 그만하고 연기하라고 했으면 좋겠다.’

커피잔 나르던 장갑을 벗고 제리 브룩하이머, 토니 스콧, 덴젤 워싱턴이란 이름과 함께하게 된 폴라 패튼은 <데자뷰>를 찍으면서 그들이 자신에게 실망할까봐 늘 노심초사했다고 한다. 자동차에 탄 채로 물에 빠지는 장면을 찍는 게 제일 힘들었다면서 그는 익사할 뻔한 기억을 이야기했다. “촬영 경험이 미숙해서 코로 숨쉬면 안 된다는 훈련사항을 잊었다. 갑자기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저쪽에서 뭔가 구조대 비슷한 사람들이 몰려드는 걸 봤다. 배로 올라오기 전에 겨우 정신을 차렸는데, 감독이 나보고 좀 올라와서 쉬었다 하지 않겠냐고 묻더라. 괜찮다고 했다. 만약 그 말에 배 위로 올라가면 다시는 물에 들어갈 일이 없어질 것 같아서였다. 매일 생각했다. 잘리지 말자, 잘리지 말자. 촬영이 절반쯤 지나면서부터 안심했다. 그래, 이젠 늦었어. 영화가 여기까지 진행됐으니 이젠 날 자르지도 못할 거야. (웃음)”

다행히도 잘리지 않고 영화는 마쳤지만, 이제부터가 그녀에게는 진짜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할리 베리는 섹시하고 예쁜 흑인 여자배우로서 상업적 안정을 취하지 않고 <몬스터 볼>을 통해 2002년 흑인 최초로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1989년 처음 연기자로 데뷔해 긴 무명 시절을 거친 베리가 할리우드 안에서 흑인 여배우에 대한 이미지와 위상을 ‘공식적으로’ 바꿔놓지 않았다면, 배우로서 거의 보여준 것 없는 서른살의 폴라 패튼이 <데자뷰>의 주역으로 캐스팅되는 일은 어쩌면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할리 베리의 도도함과 강인함보다는 유함의 매력이 돋보이는 폴라 패튼은 이제 선배가 닦은 길을 넓힐 만한 역량을 부지런히 보여줘야 할 것이다. “이 순간을 저 혼자 감당하기에 저는 정말 보잘것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은 도로시 댄드리지, 레나 혼, 다이앤 캐롤, 그리고 제 곁에서 함께 일하는 제이다 핀켓 스미스, 안젤라 바셋, 비비카 A. 폭스 그리고 모든 무명의 흑인 여배우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 기회의 문이, 오늘 밤 열렸습니다.”(할리 베리의 오스카 여우주연상 수상 소감 중에서)

사진제공 GAM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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