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모리스 피알라가 78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 칸영화제 조직위원장인 질레 자콥은 “그의 죽음으로 프랑스영화는 부모를 잃은 고아가 되어버렸다”고 애석해했다. 그러나 정작 고아처럼 보이는 건 살아생전 모리스 피알라의 존재다. 굳이 그의 비타협적인 성격- 이를테면, <사탄의 태양 아래서>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뒤 내뱉은 독설이나 <경찰>을 찍으면서 소피 마르소와 갈등했던 일화- 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프랑스 영화계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치는 그를 범주화하기 어렵게 만든다. 1925년에 태어나 20대를 화가로 보냈던 그는 무대 조감독과 배우를 거치고 근 10년을 단편영화 만드는 데 보낸다. 그리고 1967년 마침내 장편, <벌거벗은 유년기>로 데뷔한다. 누벨바그가 탄생한 지 10년이 지난 뒤, 그보다 젊은 고다르, 트뤼포가 누벨바그의 기수로 이미 활발한 활동을 시작한 뒤였다. 그래서 모리스 피알라의 작품들은 장 외스타슈, 클로드 소테 등과 같은 포스트 누벨바그 그룹에 속하면서도 동시대의 흐름으로부터 어딘지 어중간한 위치에 있는 듯하다. 68혁명 이후 고다르처럼 정치적인 논쟁의 중심에 서거나, 외스타슈처럼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대신, 90년대까지 꾸준하게 작품 활동을 해온 피알라는 당대의 작가군단에서 비교적 평범한 축에 속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오는 1월26일부터 필름포럼에서 열리는 ‘모리스 피알라 걸작선’은 자기만의 확고한 언어로 시대를 통과한 모리스 피알라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그는 <벌거벗은 유년기>부터 마지막 작품이 된 <르 가르슈>(1995)까지 총 10편의 장편을 남겼는데, 그중 5편(<우리는 함께 늙지 않는다>(1972), <대학부터 붙어라>(1979), <루루>(1980), <우리의 사랑>(1983), <반 고흐>(1991))이 상영될 예정이다.
버림받은 소년이 양부모에게서 자라면서 비행소년이 되는 과정을 담은 <벌거벗은 유년기>에서부터 그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주제는 사회에서 고립된 유년기의 상처와 사회적 규율로부터 일탈한 사랑이다. 그의 불우한 어린시절을 반영하는 듯한 이러한 작품들에는 일체의 감상주의적인 시선이 배제되어 있다. 그는 인물들의 내면에 밀착하면서도 거기에 동요하지 않고 현실적 조건과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환기시키는 방식을 택한다. 물론 배우들의 비관습적인 연기나 서사의 반부르주아적 경향, 즉흥 연출, 현장 촬영에 비중을 두는 방식에서는 누벨바그의 흔적을 찾아볼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의 작품들을 규정짓는 가장 두드러진 특성은 그가 고수하는 엄격한 자연주의자적 태도에 있을 것이다.
지난한 결혼생활 끝에 파국을 맞는 부부의 이야기인 <우리는 함께 늙지 않는다>에서 피알라는 남녀의 사실적인 감정을 좇아가면서도 자신은 그들의 감정으로부터 거리를 둔다. 이는 <대학부터 붙어라>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작품은 대학과 취업 사이에서 방황하는 청춘의 허망함을 주의 깊게 따라갈 뿐, 그 시절에 대한 어떤 향수도 부재한다. 인물들의 심리와 관계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관찰함으로써 그러한 통찰을 통해 그 밖, 즉 현실의 풍경으로 시선을 확장시키는 것. 이와 같은 현실 해부의 방식은 이자벨 위페르와 제라르 드파르디외가 주연한 <루루>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특히 이 작품은 한 여자를 중심으로 남편과 애인의 삼각관계를 기묘하게 공존시킴으로써 피알라의 영화 중에서도 유독 복합적인 감정적 흐름을 보여준다. 그러나 여기에서 비롯된 긴장감은 멜로의 쾌와 슬픔으로 해소되는 대신, 인물들 각각이 처한 계급적인 현실을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한다. 이처럼 중산층 가정의 위기를 불륜, 유년기의 갈등, 인간의 폭력성 혹은 내적 분열 등으로 접근하는 방식은 <우리의 사랑>에서 좀더 두드러진다. 영화는 성적으로 자유분방한 소녀의 내면을 따라가는 데 그치지 않고 그녀의 공허감을 프랑스 중산층 가정의 공허한 풍경 속에서 읽어낸다. 피알라는 스튜디오를 최대한 배제하고 현장의 즉흥적인 분위기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가족 구성원 각각의 결함이 극대화되어 충돌하는 순간을 포착해낸다. 이 영화가 보여주듯, 그는 좁은 공간 속의 인물들 각각의 배치, 동선, 시선 등을 통해 이들의 위태로운 심리를 형상화해내는 데 탁월한 재능을 발휘한다. 이 영화에서 피알라는 직접 소녀의 아버지로 분함으로써 배우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처럼 냉정한 시선으로 개인의 내면을 경유하여 시대를 통찰했던 피알라는 1991년 인상파의 대가, 반 고흐의 삶을 영화화한다. 고흐의 마지막 3개월에 대한 영화 <반 고흐>는 천재의 비극에 대한 드라마틱한 접근 대신, 어느 예술가의 고독한 말년을 그저 ‘쳐다보는 데’ 할애된다. 스타일은 그 어느 때보다 화폭 같지만, 피알라의 시선은 그 어느 때보다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다. “내 방식은 너무 힘들다”고 토로하던 그가 화가였던 과거를 반추하며 고흐의 마지막 삶에서 자신의 마지막을 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