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8일 <장밋빛 인생>(올리버 다한)으로 포문을 연 2007년 베를린 국제영화제가 영화제 5일째로 정확히 절반에 다다른 2월12일. 22편의 경쟁작 중 11편, 4편의 비경쟁작 중 2편이 기자시사와 프리미어 상영을 마쳤다. 자크 리베트, 이리 멘첼, 프랑스와 오종 등 비교적 이름이 널리 알려진 거장 감독의 영화는 후반부에 공개되는 일정 속에서 전반부에 기대를 모았던 유명감독은 스티븐 소더버그, 로버트 드니로, 빌 어거스트, 앙드레 테시네 등이다.
전설적인 샹송가수 에디트 피아프의 파란만장한 삶과 예술을 다룬 <장밋빛 인생>은 파티의 포문을 열기에 적절한 영화였다. 길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는 어머니에게 버림받고 이곳저곳을 전전하던 어린 시절을 거쳐, 역시 길거리 가수 생활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던 피아프가 클럽가수로 발탁되어, 세계적인 가수가 되고, 평생의 연인을 잃은 뒤 약물중독으로 40대에 삶을 마감하기까지를 다뤘다. 임종을 앞둔 시점과 과거가 교차되는 형식은 평범한 전기영화에 그친 셈이지만 시종일관 흘러나오는 피아프의 노래, 생전 피아프의 외모며 말투를 그대로 재현했다고 평가받는 마리온 고티야의 연기로 눈과 귀가 즐겁다. 불행한 천재예술가의 초상을 그려낸 고티야는 개막 이후 가장 강력한 여우주연상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중반까지 달려온 올해 베를린 경쟁부문의 특징 중 하나는 이름값을 하지 못하는 거장들의 신작이 될 듯하다. <착한 독일인>(스티븐 소더버그)과 <굿바이 바파나>(빌 어거스트)는 그 대표적인 주자로, 두 영화는 각각 <스크린 인터내셔널> 데일리 평점에서 4점 만점 중 1.88과 1.63을 기록하며 하위권을 지키고 있다. 1945년 베를린을 배경으로 포츠담 회담을 위해 베를린을 찾은 미국인과 독일 여인의 사랑과 배신, 이별을 다룬 <착한 독일인>은 명백하게 베를린 영화제를 위한 제목과 배경으로 기대를 모았으나, 베를린영화제에서 조차 환영받지 못할 만한 영화였다. 1940년대 흑백영화의 실제 필름을 중간중간 삽입하고, 영화전체의 촬영과 조명, 미술은 물론 배우의 연기스타일까지 흉내낸 <착한 독일인>은 결정적으로 1940년대 영화의 탄탄한 이야기나 정서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음을 드러내며 웃지 못할 코미디로 전락했다. 현지의 데일리 리뷰 대부분은 실험을 위한 실험에 그친 소더버그의 신작 속에서 악전고투를 치른 조지 클루니, 케이트 블란챗 등의 배우들에 대한 애도를 표했다. <트래픽> <오션스 일레븐> <버블> 등 작가영화와 상업영화 사이에서 묘한 줄타기를 계속하면서 필모그래피 자체를 실험적인 것으로 완성해왔던 소더버그의 또다른 실 험은 명백히 실패한 셈이다.
<정복자 펠레>(1987) 이후 20년간 이렇다 할 작품을 선보이지 못한 어거스트의 신작 <굿바이 바파나>는 그가 앞으로도 예전의 명성을 되찾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 될 것이라는 예상을 가능케 했다. 30년에 걸친 넬슨 만델라(데니스 헤이스버트)의 옥살이와 마침내 쟁취한 흑인의 승리를 만델라의 간수였던 제임스 그레고리(조셉 파인즈)의 눈을 통해 바라보는 이 영화는 남아공의 흑인문제를 백인의 시각에서 다뤘던 <파워 오브 원>과 같은 영화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시각을 선보인다. 만델라와 그레고리의 우정은 별다른 계기없이 평생동안 이어지고, 백인우월주의에 가족중심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그레고리의 부인 역시 별다른 이유없이 만델라와 흑인운동에 동조한다. 기자시사가 끝난 뒤에는 작은 박수소리와 함께 야유가 터져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덴마크에 이주한 스웨덴 노동자 부자의 파란만장한 생활을 그린 서사극 <정복자 펠레> 역시 <굿바이 바파나>의 순진하고 대책없는 휴머니즘과 맞닿는 면이 있었다. 달라진 것은 그런 종류의 주제에 대해 더 이상은 무조건적인 찬사를 보내지 않는 세상과 관객일 것이다.
스티브 부세미, 줄리 델피의 연출작이 파노라마부문에 진출하는 등 올해 베를린에는 배우들의 연출작이 유독 눈에 띈다. 그중에서도 경쟁부문에 진출한 로버트 드니로의 <굿 셰퍼드>는 단연 기대작이었다. CIA의 전신인 기관 OSS의 활동과 CIA의 탄생까지를 한 요원의 30년을 통해 보여주는 영화로 러닝타임 167분의 대작이다. 민주주의와 국가를 위해 사랑도 가족도 포기해온 에드워드 윌슨(맷 데이먼)의 모습은 패밀리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끝에 비극을 맞이하는 <대부2>의 콜레오네 부자의 모습을 합쳐놓은 듯하다.
공교롭게도 감독인 로버트 드니로가 출연했고 제작자 중 한 명인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가 감독했던 <대부2>의 기시감은 상당히 선명하여 기자회견에서도 관련한 질문이 오갔다. 비정한 남자들의 세계, 비극으로 끝나는 부자를 다뤘다는 점에서 드니로의 감독 데뷔작인 <브롱크스 테일>과도 연장선상에 있는 <굿 셰퍼드>는 미국의 뿌리깊은 애국주의에 대한 비판과 함께 첩보기관의 생생한 이면과 역사를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스릴러와 첩보물, 가족드라마와 사회드라마 사이에서 모든 것을 놓치지 않으려는 욕심이 영화의 목적과 메시지를 모호하게 만들었다는 비판 역시 존재한다. 영화제의 한 데일리는 영화의 제목(Good Shepherd)을 인용하여 “좋긴 하지만 훌륭하지는 않다”(Good but not Great)는 제목의 리뷰를 싣기도 했다.
유명한 감독이 잇따라 실망을 안겨주는 가운데 <목격자들>(Les Temoins)을 들고 베를린을 찾은 평론가 출신 감독 앙드레 테시네가 거장의 이름값을 지켰다는 평가다. 1980년대 서구를 덮친 에이즈의 공포를 소재로, 서로 엇갈리는 두 커플의 이야기를 그린 이 영화에 대해 <버라이어티>의 데보라 영은 테시테의 최고작 중 하나로 꼽으며 “<목격자들>의 힘있는 이야기는 살아있는 것이 기적이라는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며 죽은이들의 삶을 증언한다”고 평했다.
고전하는 기성감독의 신작 속에서 그리 유명하지 않은 젊은 감독들의 작품들 중 좋은 평가를 받는 것들이 눈에 띈다. 내몽골 유목민의 일상과 가치관을 인류학적으로 고찰한 <투야의 결혼>(왕궈난)은 우물을 파다가 불구가 된 늙은 남편과 두 아이를 부양하기 위해 억척같이 살아가는 투야가 주인공이다. 그녀는 생존을 위해 이혼과 재혼을 결심하고, 남편과 함께 살아 줄만한 새 신랑을 찾아나선다. 실제 유목민 캐스팅을 방불케하는 배우들의 연기와 함께 유목민의 억센 삶, 보기드물게 강렬한 여주인공의 캐릭터 등이 인상적이다.
펠레가 참여한 브라질 축구팀이 멕시코 월드컵에서 우승을 거두고 브라질 독재정권의 횡포가 극에 달한 1970년을 축구광 소년의 눈으로 바라본 <부모님이 휴가를 떠난 해>(Cao Hamburger) 역시 촉망받는 젊은 감독의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운동권 부모는 어린 소년을 할아버지 집에 맡기고 정권의 눈을 피해 ‘휴가’를 떠난다. 많은 이들이 ‘휴가’를 떠난 뒤 돌아오지 않은 그해, 브라질 축구는 달콤한 승리를 맛보지만 소년은 아픈 성장통을 겪는다. 부모 대신 소년을 돌보는 브라질의 유대인 집단의 독특한 문화와 함께 브라질의 다양한 이민자 집단의 풍경이 펼쳐진다. 기자회견에 나선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정치적인 이야기보다는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는 이질적인 사람들이 교류하고 소통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인상적인 데뷔작 <Private>으로 로카르노 영화제 대상을 수상한 바 있는 사베리오 콘스탄조 감독의 <In Memory of Myself>는 단순하고 간결한 가운데 풍부한 여백의 미를 내세운 영화다. 존재의 의미를 깨닫는 수도자의 내면이라는, 일견 전형적인 플롯을 지닌 영화지만, 베니스에 실제 존재하는 수도원이라는 완벽한 로케이션과 단조로운 스토리의 빈 구석을 가득 메우는 절묘한 음악, 작은 수도원을 하나의 우주로 묘사하는 촬영의 힘으로 침묵과 고독, 존재의 의미라는 추상적인 개념들은 손에 잡힐 듯 생생한 이미지로 다가온다.
물론 젊은 감독들의 영화라고 모두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선댄스 인스티튜트에서 만들어진 <When a Man Falls in the Forest>(Ryan Eslinger)는 샤론 스톤의 파격적인 변신으로 초반부터 호기심을 자아냈던 영화다. 물론 섹시배우의 이미지를 완전히 벗어버리고 초췌하고 피로한 미국 중산층 중년 주부를 기꺼이 받아들인 스톤의 시도는 눈여겨 볼 만 하다. 그러나 대인공포증을 지닌 소심한 중년남자와 삶의 무게에 짓눌린 가장, 사랑하는 이를 잃은 상처를 극복하지 못한 독신남을 주인공으로 이들이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 <When a Man Falls in the Forest>는 루저와 중산층 가정의 파탄을 다루는 미국 인디 영화의 어떤 계보를 충실히 따르는 범작에 그쳤다.
2차대전 당시 실화를 바탕으로 새로운 소재를 개척한 홀로코스트영화 <위조자들>(Stefan Ruzowitzky)은 영락없는 베를린영화제용 영화다. 연합국 경제를 붕괴시킬 목적으로 달러와 파운드를 대량 위조하려던 나치는 유대인 수용소 안에서 유대인 전문가를 불러모아 화폐를 위조하도록 한다. 예술과 풍류를 사랑하는 당대 최고의 위조전문가 샐리(솔로몬의 애칭)를 주인공으로 한 <위조자들>은 2차대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가 유독 많이 눈에 띄는 올해 베를린 영화제에서, 독일영화라는 점과 유대인 학살을 다뤘다는 점은 어느 정도의 프리미엄을 누리고 있는 듯 보인다. 젊은 감각으로 스타일리시하게 완성된 이 영화에 대해 현지 언론 및 독일기자들은 찬사를 보내고 있지만 외부인의 입장에서 <위조자들>은 그저 ‘너무 많은 홀로코스트영화’ 중 한 편일 뿐이다.
한편 8개 매체의 필자들에게 평점을 매기도록 하는 <스크린인터내셔널> 데일리에서 현재까지 최고점을 기록한 영화는 2.38점을 받은 <투야의 결혼>(왕궈난)과 <위조자들>(스테판 루조비즈키) 두편이며, <When a Man Falls in the Forest>가 1점으로 최하위를 차지했다.